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197화 (197/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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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용사가 지나치게 강해져버린 나머지 최종 페이즈까지 칼질 3방에 쓰러져버린 대마왕.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만들었지만 아마도 영원히 작동되지 않았을 최종병기가 마왕성과 함께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혀가면서 아름다운 푸른 하늘이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후……이러니저러니 그래도 엔딩을 보고 난 다음의 이 후련한 느낌은 RPG만한 게 없다니까. 스토리나 NPC들이 조금 짜증나면 어때. 세상에는 저런 4가지 없는 놈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평화가 찾아왔으면 그걸로 되는 거잖아? 가끔씩은 이렇게 착한(?)일을 끝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감동적인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합창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엔딩의 여운을 만끽해가던 류안.

하지만 다음 순간에 노래를 중단시키고는 안구를 테러하는 눈부신 섬광과 함께 등장한 여신이 모든 감상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호호호호! 수고하셨어요, 용사님! 설마 정말로 대마왕을 쓰러트릴 줄은 몰랐……아, 아니. 당신이라면 반드시 해낼 줄 알았습니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정말로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이런 수전노 년이……’

세계를 구해줬더니 소원을 들어주기는커녕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여신.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일삼아대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대마왕도 쓰러트렸겠다. 들고 있는 장비들은 저한테 넘겨주시면 안 될까요? 용사님이 사라지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장비들까지 사라져버리면 아깝잖아요. 그 비싼 장비들은 전부 다 제가 꿀걱……아, 아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 세대의 용사에게 전해줄게요. 저 믿으시죠?]

‘네년을 믿느니 카티아에게 생선을 맡기겠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고약한 심보에 자신의 아이템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지만, 다음 순간에 떠오르는 선택지는 그를 좌절시켜버리고 말았다.

예.

아니오.

아니오가 선택되지 않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호호호호! 역시나 용사님은 호구……아, 아니. 배포가 남다르세요. 이게 다 얼마야? 호호호호호호!!]

‘젠장, 이 게임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엔딩의 여운이고 나발이고 전부 다 날아가 버리고 서러움만 물밀 듯이 몰려오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곱게 보내줄 수는 없다는 듯이 마왕에 일격에 나가떨어졌던 동료들(이라고 쓰고 짐 덩어리라고 읽는)이 다가와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해냈어요! 우리들이 힘을 합쳐서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어요!”

해맑게 웃으면서 기뻐하는 여자 무투가.

‘우리들이 아니라 나 혼자서겠지!! 그나저나 나 지금 육체가 사라지고 있거든? 왜 그렇게 기뻐하는 건데?!’

하지만 동료들의 진정한 뒤통수 행렬은 그걸로 시작에 불과했다.

“용사님, 당신의 숭고한 희생은 오래도록 기억될 거예요. 그러니까 뒷일은 저희들에게 맡기고 안심하고 떠나주세요! 꺄앗! 아잉, 용사님도 보는데 자기도 참……”

평소에는 얌전한 척, 있는 대로 내숭을 떨어대면서 고고한 척은 혼자서 다하던 여사제가, 팔라딘의 품에 끌어 안기자 콧소리를 내면서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용사님, 고향에 돌아가면 여자 무투가와 여사제 두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사회라서 잘 되었네요! 아,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은 부담스러우실까봐 굳이 용사님의 이름을 따서 짓지는 않겠습니다. 참고로 두 사람 모두 3개월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여자 무투가마저 마저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기자 항상 쿨하고 4가지가 없던 그녀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3개월이면 거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양다리로 붙어먹었다는 거잖아?! 이런 빌어먹을 팔라딘, 크아아아악!’

자신은 시스템상의 이유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던 여자들을 양팔에 끼고 시시덕거리는 그의 모습에, 류안은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극한의 살인충동에 휩쓸려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눈앞의 년놈들을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활성화되는 유일한 커맨드는 대사창을 넘기는 것 뿐.

잠시 후 엔딩 크레딧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헤아리기도 힘든 제작진들의 이름과 그들의 지인들, 키우는 애완동물들, 자신들의 어렸을 적의 장래희망이나 자작시, 머리를 다듬어주는 헤어 디자이너, 어머니, 아버지, 누나, 형, 동생, 친구, 사돈의 팔촌의 5남의 돌잔치 사진 같은 것들이 영원처럼 길게 이어지더니 한술 더 떠서 자신이 사라진 세계의 후일담까지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세계를 구한 용사 류안의 영웅담은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그렇게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자신의 동상을 세워나가는 목공들의 대화가 이어져 나갔다.

[하여간에 국왕님도 참 변덕스러워. 경제가 어려워진 이유가 국민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갑자기 용사의 동상을 세우라는 건 무슨 심보야? 애초에 그 양반이 죽은 건 100년도 더 지난 일이라고. 초상화 한 장도 없이 무슨……]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대충 적당하게 만들자고. 어차피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대충 적당히 미화시켜서 만들면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니까 말이야.]

울컥.

[나도 크면 용사 류안님처럼 세상을 구하는 훌륭한 영웅이 될 거야!]

[애가 미쳤니? 어디에서 집안을 말아먹으려고……요즘 같은 세상에 용사니 모험가니 하는 불안정한 직장을 가지면 어디에서 밥 굶어죽기 딱 좋아요! 그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학원이나 가! 머리에 쥐날 때까지 공부해도 안정적인 직장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울컥울컥.

[세상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용사 류안 때문입니다! 그가 쓸데없는 자기 공명심으로 마왕들을 쓰러트리는 바람에 인간들과 마물들은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2만 명에 이르는 마왕의 후예들(고아)이 제국을 건설해서 우리들을 핍박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옳소!]

[용사 류안의 동상을 쓰러뜨려라!! 가짜 용사를 몰아내자.]

울컥울컥울컥.

그리고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가 커져나가자 매스컴에 등장해서 눈물을 찍어내면서 피해자를 가장하는 여신의 인터뷰.

[사, 사실. 류안은 진정한 용사가 아니었어요. 훌쩍……그게 다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모르고……저도 그의 가증스러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한 명의 가련한 여신, 아니. 여자에 불과하다고요. 훌쩍훌쩍.]

[울지 마십시오! 여신님,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을 믿습니다!!]

[옳소, 여신님 만세! 우.유.빛.깔 미.소.천.사 여신님. 우와아아아아!!]

[고마워요. 여러분……앞으로도 많이 응원해주실 거죠?!]

[우와아아아아!!!]

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울컥.

[자, 지금까지 보셨듯이 당신은 영원히 기억될……]

“너 같으면 저딴 식으로 기억되고 싶겠냐? 이런 망할 XX새끼들……끄아아아아아!! 이런 빌어먹을 게임! 빌어먹을 현실!! 퍽킹 AVG(angry video game)저 빌어먹을 년놈들을 싸그리 다 정의구현하고 지옥가게 해주세요! 제발!!!”

땅바닥을 내리치면서 절규하는 류안의 눈앞에 어느새 나타난 브륜힐트.

[저, 저기……]

“……너야?”

[무, 무슨 말인가?]

“미니게임을 저런 빌어먹을 형태로 구성한 게 너냐고……”

[나, 나는 단지 인간들이 개발한 게임을 가져와서 모델로 삼았을 뿐이다. 따, 딱히 게임의 세부적인 구성까지 간섭하지는……]

“……후후후후. 아니야, 나는……너를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아주 좋아. 바로 이런 게임을 기다려 왔어.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류안은 마치 마신과도 같은 검고 흉포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음산한 웃음을 터트려대기 시작했다.

[괘, 괜찮은가? 그대, 아무래도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라니까? 덕분에 나에게 부족한 게 뭔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어. 나에게 부족했던 건 헝그리 정신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였다고, 키키킥, 키키키키킥! 덕분에 지금은 눈앞에 신이 나타난다고 해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브륜힐트. 크크크크크크큭!!!”

조금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그의 말에 브륜힐트는 공기가 냉각되는 착각과 함께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올게. 나중에 보자, 브륜힐트.”

[무, 무운을……]

류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의지로 미니게임의 공간을 빠져나가 현실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품속에 숨기고 있던 게임의 타이틀을 꺼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용밀레 퀘스트2]

‘다음에도 비슷한 미니게임을 만들어달라고는 했지만……정말로 이것을 실행시켜줘도 되는 걸까? 아무리 봐도 불길한 예감밖에는 생기지 않는데……]

여신과 4가지 없는 동료들이 또다시 등장한다는 용밀레 퀘스트의 후속작을 바라보면서 브륜힐트는 깊은 고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

한 편, 시간정지가 풀려버리자 이상을 감지한 콘트라베이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중얼거렸다.

“왓 더……스테이지가 갑작스럽게 LV1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일까요? BOY♂?”

“죄,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총구를 겨누면서 물어보셔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관자놀이에 권총이 겨눠진 보좌관은 공포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지만, 콘트라베이스는 유쾌하게 웃어대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서 안심시키고는 주저 없이 총탄을 발사해 버렸다.

탕!

“하하하하하!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군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사령부는 여전히 우리들의 손아귀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괴물전차와 오르카의 아르고스 시스템만 있으면……”

[미안하지만 더 이상 네놈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없다.]

콘트라베이스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펜져스이자 광기의 사도로 활동하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저, 전차를 후진시키세요! 매몰지를 돌파하는 건 중단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성보다는 동물적인 공포를 우선시하며 내리는 명령.

쿠구구구궁!

명령을 받은 제국군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괴물 전차는 급하게 거리를 벌려나가면서 후퇴해 나갔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을 파고들어갔던 매몰지의 얇은 틈 너머에는, 리엑터 시스템을 오버플로우까지 충전시키고 자신의 전력을 발휘시키는 필살기의 준비를 끝낸 류안이 자세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보고 있다면 똑똑히 기억해둬라, 율리안, 그리고 파비안……이것이 바로 내가 텔넷에서 가져온 궁극의 필살기이자 네놈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니까.’

로스탐의 주먹에서 공간마저 왜곡시켜버리는 검은 빛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소용돌이친다.

기기기기긱!

당장에라도 시위를 떠나서 돌진하려고 하는 사나운 맹수 같은 기운을 억지로 잡아당기자, 쇠가 비틀어지는 것 같은 비명소리를 내질러대는 로스탐의 오른쪽 팔.

마침내 그 힘의 한계가 종말점에 도달하자 류안은 전방의 매몰지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시위를 당기는 사람처럼 그 힘을 가볍게 해방시켜 나갔다.

“울부짖어라, 그람.”

그리고 거대한 빛의 파도가 매몰지를 돌파해서 제국군을 집어 삼켰다.

============================ 작품 후기 ============================

여신과 동료들에 대한 정의구현은 용밀레 퀘스트2에서 이루어집니다.

원래는 저것보다 짧게 꿈도 희망도 없이 끝내서 주인공을 분노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독자분들이 정의구현을 원하시는 것 같아서...크흠.

사실, 어떤 분이 지적하셔서 뜨끔하기는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정통 RPG가 아니라 드퀘가 저렇습니다.

물론, 이번 미니게임은 드퀘만이 아니라 몇 가지를 짬뽕시켰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꿈도 희망도 없는 동심파괴의 세계라는...

그래서 제가 드퀘를 좋아합니다(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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