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6 ----------------------------------------------
지상편
세 번째 선택지는 없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정통 RPG의 주인공 캐릭터와 동화해버린 나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민한 끝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마왕의 부하가 되어서 세상의 절반을 달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예”를 선택하고 결정버튼을 눌러도 무반응.
‘이런 더러운 답정너 같으니라고……’
선택지를 만들어놓고 고를 수가 없는 부조리함에 분노하면서 류안은 어쩔 수 없이 빵셔틀 용사가 되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아니오”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마다하고 나에게 맞서겠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내주마!!”
‘오해입니다. 마왕님! 저도 입사하고 싶었는데 선택지가……선택지가……’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당한 마왕은 길길이 날뛰면서 초필살기로 짐작되는 거대한 암흑구슬을 만들어내며 류안을 향해서 집어던졌다.
‘보통은 이쯤에서 누군가가 구해주러 오는 게 정석인데……’
하지만 다음 순간에 떠오르는 메시지가 희망을 꺾어버렸다.
[BATTLE START!]
대화이벤트를 보느라 묶여져 있던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여지고 인벤토리를 열자 적절(?)하게도 목검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필드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왕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달려서 간신히 회피한 류안은 마왕의 사각으로 들어가서 3연타를 날렸다.
[대미지 0]
[대미지 1]
[대미지 1]
‘아무리 봐도 패배하는 플래그인데?!’
참고로 정보창으로 표시되어 있는 마왕의 hp는 99999.
류안의 hp는 10.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라스트 보스와 싸우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상황제시에, 포기하고 자살해볼까 하는 유혹이 다가왔지만 5단계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죽는다는 선택지는 도전 실패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쩔 수 없이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보기로 결심한 류안은 마왕이 공격모션에 돌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아니나 다를까 무적결계를 만들어내면서 사방을 메우는 광탄을 무차별로 난사.
슈슈슈슈슈슈슝!!!
‘피할 수 있어! 불타올라라, 나의 천수반사와 말초신경!!’
도트데미지에 스치기만 해도“일어나세요. 용사여”라고 속삭이는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대폭발의 향연.
류안은 보스의 공격을 이쪽으로 구르고, 저쪽으로 구르며 때로는 목검으로 받아넘기거나 흘려 넘기면서 12시간의 혈투 끝에 hp1을 남기고 마왕을 토벌해내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해 냈다.
‘해냈다! 마왕을 전설의 목검으로 쓰러트렸어! 이제 이 세계의 평화가 찾아올 거야!’
오랜 고생 끝에 간신히 승리를 쟁취하고는 잠깐의 달성감을 만끽하면서 즐거워하는 그.
하지만 정통 RPG는 마왕이 첫 번째 전투에서 쓰러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후후후후,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이군. 그렇다면 이제 나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도록 하지! 크오오오오오오!]
흔한 패턴의 대사를 중얼거리면서 진정한 힘을 개방시키는 마왕.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원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콰콰콰콰콰콰쾅!
방어막이라고 짐작되는 투명한 방패로 진정한 마왕의 일격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막아내는 보라색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여신.
[큭, 여신……또다시 나를 방해할 셈이냐?]
[대마왕 모스! 당신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이 노예, 용사님은 제 손으로 지켜내겠습니다!]
‘이 BITCH년이 대놓고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예쁘기 때문에 웬만하면 만사가 용서되는 외모를 보유한 여신이 대놓고 자신을 노예라고 표현하자, 류안은 당장에 그녀에게 달려들어서 정의실현을 하고 싶다는 충동으로 흑염룡을 일깨워 올렸다.
하지만 RPG의 시스템적인 제약은 그가 여신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잠깐의 이벤트가 흘러지나가자 여신의 신전으로 끌려가면서 꼼짝없이 사명을 부여받는 용사(라고 쓰로 노예라고 읽는)류안.
[……어둠에 휩싸인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자!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의 평화를 되찾아주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급하면 그냥 댁이 쓰러트리는 편이 빠를 거 같은데……’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수준이나, LV이나, 능력이나, 아무리 따져 봐도 여신이 모험을 떠나는 편이 손쉽게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아보였지만 현실은 또다시 LV1용사의 맹목적인 헌신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제시되는 선택지.
예.
아니오.
당연하지만 아니오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고를 수 없는 선택지는 왜 만들어두는 거냐고?!’
[오오오오오! 받아주시는 겁니까? 흔쾌히 허락해주시다니 역시나 노예, 아니 용사님이로군요. 당신의 앞날에 축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참고로……원래는 축복을 해드릴 때마다 돈을 받고 있습니다만 땡전 한 푼 없는 거지, 아니 주머니 사정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특별히 한 번만 공짜로 해드릴게요. 아, 참고로 저쪽에 있는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여신의 검이나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는 쳐다보지 마세요. 비싼 거라서 자꾸 쳐다보시면 때가 탑니다.]
‘……당신, 솔직하게 말해서 세계평화에 별로 관심 없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화려한 보물들은 자신이 챙기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신의 축복인지 뭔지를 내려주고는, 지상으로 내쫓아버리는 불량여신의 행패.
생각 같아서는 세계의 위기고 나발이고 도적단으로 뛰어들어서 개 같은 세상 갈아엎자를 외치고 싶었지만, 정통RPG의 시스템은 그의 외도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류안의 용밀레 여행.
“큰일이네. 마을에 마물들이 쳐들어 왔어! 부탁이니 자네의 힘으로 녀석들을 쓰러트려주게!!”
‘이 마을에는 자경단이나 수비대도 없냐?! 무기 값은 쓸데없이 비싸면서…….’
촌장의 부탁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마을사람들을 도륙하고 있는 괴물들을 쓰러트리자, 언제 부탁했냐는 듯이 태도가 180도 돌변하면서 거만해졌다.
“수고했네. 자, 마을의 위기를 구해준 보답으로 약초 3개를 주도록 하지.”
다시 한 번 말을 걸어보지만 “수고했네.”라는 대화가 반복되면서, 볼 일을 다 봤으면 꺼지라는 싸늘한 눈초리만이 되돌아 왔다.
쫓겨나듯이 마을을 떠나면서 얼마 뒤에 만난 여자사제1.
“류안님, 아이가 배고파서 울고 있습니다. 저 아이를 위해서 빵을 구하러 가죠.”
역시나 육체의 대화는 불가능하고 쓸데없이 퀘스트를 늘려대면서 진행을 방해하는가 싶으면, 물리공격에 지나치게 약해서 한 방만 맞아도 녹다운해버리는 스페X카급의 생존력을 보유하고 있는 민폐녀였다.
“빵을 구하고 싶다고? 아쉽지만 제분소가 망가져서 밀가루를 구할 수가 없어. 제분소를 고치려면 목수와 목재가 필요한데 목재를 구하려면 서쪽 숲으로 떠나야 하고, 목수는 허리가 다쳐서 약초를 구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북쪽 고원에……”
‘빵이 없으면 과자를 쳐 먹이면 되잖아!!’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간신히 빵을 구해다가 바치자 꼬마는 그것을 음미하더니, 울음을 뚝 그치고는 정색하면서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바삭거리는 맛이 부족하네요. 속이 약간 덜 익은 것 같기도 하고……화덕에서 막 꺼내 오신 것 치고는 다른 길을 우회하시느라 식어버렸습니다. 저는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이 아니면 입에 대지를 않거든요. 뭐, 지금은 배가 고프니까 어쩔 수 없이 먹어드리지만 제 점수는요……”
‘……이래서 사람들이 악마가 되는구나.’
감사하다며 레어 아이템을 넘겨주기는커녕 온갖 꼬투리를 잡으면서 투덜거리는 꼬마의 모습에 살인충동이 용솟음쳤지만, 역시나 정통RPG에는 마을사람을 공격하는 비윤리적인 행동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눈이 삐었냐?!’
“역시 류안. 용사 중에서 용사야!”
어느새 합류한 동료 여자 무투가(역시나 방어력이 약한)의 격려.
‘용사라는 단어가 빵셔틀로 들려오는 건 내 착각이겠지?’
“좋아!! 이 기세로 마왕을 쓰러트리는 겁니다!!”
대책 없이 근성과 파이팅이 넘치는 팔라딘(방패 없는)외침에 한숨을 내쉬면서 류안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막장게임을 벗어나기 위해서, 미니게임의 첫 번째 단계를 클리어 하는 조건인 5마왕 중의 첫 번째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 초원도시의 마왕은 세상의 절반을 줄 테니 자신의 부하가 되라는 대마왕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쓰레기 중에서도 쓰레기입니다! 사실 다른 마왕들도 전부 그렇고요. 어쨌든 그 놈은 인근의 예쁜 여자들이라는 여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여서 하렘을 건설하고는 밤낮으로 주지육림의 향락을 즐기는 부러운……아, 아니. 쓰레기입니다! 하루빨리 녀석을 퇴치하고 여자들을 구해주십시오! 용사님!!”
예.
아니오.
류안은 선택지가 나오자마자 광속으로 “예”를 클릭했다.
‘좋아! 여자들을 구출해서……아, 19금 이벤트는 나오지 않겠지. 그, 그래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미인들에게 둘러싸여서 대대적인 환영을……후후후후.’
기대치를 하향시킨 소박한 꿈을 꾸면서 마왕의 성으로 돌입해 들어갔지만 류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꿈도 희망도 없는 5단계 난이도의 막장스러움이었다.
[하하하하하! 여기까지 오다니 제법이구나, 용사! 마왕성에서 약 일주일 동안 노가다를 하면서 내 부하들을 때려잡는 모습을 잘 지켜보았다. 허나, 그대를 처벌하기에는 여자들과 으쌰으쌰를 하느라고 도진 요통이 허락해주지 않더구나! 참고로 지금도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겠는데……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에게는 5천명의 여우같은 마누라들과 2만 명의 토끼 같은 마왕 주니어들이……]
[악즉참!!]
요통으로 자리에서도 일어나지 못하고 여자들과 주지육림의 향락을 즐기느라 정기가 빠져서 피골이 상접해있던 마왕은, 노가다로 단련한 동정용사의 일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일격에 사망해버리고 말았다.
[꺄아아악! 여보오오오오!!]
[……이런 악마 같은 놈! 영원히 저주해주마!]
[지, 진정하세요. 여성분들……우리들은 마을 사람들의 의뢰를 받고 당신들을 구하러……]
[누가 구해달라고 했어요? 마왕성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마물이며 보물 상자까지 싹 털어가 버리면 우리 애들하고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거예요? 애 아빠를 살려내세요! 이런 살인자!!]
[흑흑흑흑. 시골로 돌아가 봤자 마왕과 붙어먹은 화냥년이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할 텐데……]
고맙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완전히 인생이 변해버린 수많은 여자들과 마왕 주니어(고아)들의 원망어린 눈초리를 한 몸에 받으면서 마왕성을 퇴장.
[……]
파티 전체의 사기가 떨어져버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마왕이 되어버린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의 부러운 생활에 배알이 꼴려버린 류안은 완전한 악마 용사로 각성해서 마왕들을 쓰러트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덤벼라, 용사! 참고로 나를 쓰러트리면 500만 인간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거리로 나앉게 된다. 그것을 네 정의로운 마음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크아아아악!!]
[후후후후. 나는 환경을 사랑하고 자연을 생각하는 친환경 마왕……크아아아악!!]
[마물과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공존할 수 있어. 나는 그 방법을 찾아내서 세계에 싸움을 종식시키고 영원한 평화를……크아아아악!!]
[안녕하세요. 저는 미스 마계의 진선미입니다……어맛!!]
‘건드리지 못하는 여자에게 볼일은 없다!’
평소라면 눈이 뒤집어졌을만한 예쁜 여자 마왕을 목전에 두고서도, 이 빌어먹을 게임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끝내자는 일념으로 단숨에 끝장내버린 류안.
마침내 그의 앞에 진정한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 크흠. 처, 처음에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조금 지나치게 강해진 것 같군. 어, 어떤가? 세상의 절반……아, 아니. 전부 다 자네에게 넘겨주도록 하겠네. 자네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인간이라는 놈들은 지나치게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네가 권력을 잡고 그들을……끄아아악!]
+999강화를 마친 용사의 일격에 순식간에 팔 한쪽이 잘려나가는 라스트 보스.
[아, 알았네. 이 사실만은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사실은 내가 자네의 아버지일세. 게다가 우리들은 심장이 이어져 있어서 내가 죽으면 자네도 세상에서 소멸해버리고……끄아아악!!]
나머지 한쪽 팔마저 잘려나간 라스트 보스는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괴로워했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이런 짓을 저지른다고 자네에게 대체 무슨 이득이……]
그리고 류안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최초로 자신의 의지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난 단순하게 이 빌어먹을 게임을 끝내고 싶을 뿐이야.”
촤아아아악!
============================ 작품 후기 ============================
미니게임은 이번 편에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편에 약간의 후일담이 있습니다.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