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5 ----------------------------------------------
지상편
“왜 그러는 거야, 탈리아!”
[아, 안 돼. 싫어……나한테 다가오지 마. 누구야 너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그렇게 외치던 탈리아는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다짜고짜 대전차 라이플을 들어 올리면서 6사단의 재규어를 겨냥해 나갔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십니까?]
깜짝 놀란 상대방의 파일럿이 당황하면서 외쳤지만 혼란에 빠져버린 그녀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카티아, 탈리아를 제압해! 가능하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 알았다냥!]
투캉!
명령을 받은 카티아는 캣피쉬를 조종해서 탈리아의 레오파드 커스텀에게 뛰어들어 그녀를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크윽! 무, 무슨 짓이야? 카티아!! 저, 저 녀석을 죽여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류안이……놔, 이거 놓으라고!!]
동료를 알아볼 수 있는 인지력은 남아있는 모양이지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영락없이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
[냐앙! 날뛰지 말라냥!]
[아트리에, 카티아를 거들어 줘!]
[알겠습니다!]
그녀 혼자만으로는 불안해보였기 때문에 아트리에까지 동원하면서 양손을 제압했지만, 거칠게 날뛰는 그녀를 언제까지나 묶어놓을 수는 없었던 데다가 그 난동은 단순하게 시작에 불과했다.
[크아아아아악!!]
[아군을 죽이다니……더러운 제국의 앞잡이 놈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연대장님, 연대장님의 복수는 제가 갚도록 하겠습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괴성을 질러대면서 6사단의 병사들이 여기저기에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헌이 다급한 목소리로 류안에게 연락을 보냈다.
[바로 저들이네! 아까 전에 말했던 수증기를 뒤집어 쓴 이들이……하지만 뭔가가 이상하군. 아까 전과는 광란을 일으키는 모습이 뭔가 다른데. 젠장, 그나저나 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만……]
거의 수천에 이르는 군인들이 동시에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6사단의 병사들은 악전고투를 하면서 동료들을 제압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모습을 유심하게 살펴보던 류안은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상을 발견하고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수기水氣가 기묘한 형태로 날뛰고 있어. 오기조원을 사용한다면 진정시킬수도 있을 것 같은데…….’
리엑터 시스템을 사용하면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수천의 군대를 일시에 진정시킬 정도로 광범위하게 능력을 발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콘트라베이스는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서머벨 정거장 전체에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카가가가가가강!!
제국의 괴물 전차로 짐작되는 거대한 동체가 드릴을 회전시키면서 매몰지를 당장에라도 돌파해버릴 기세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우회로 수비군들의 절규에 가까운 통신들의 행진.
[사, 살려주십시오! 몸이, 몸이 녹고 있습니다……]
[아, 아군이 배신했습니다! 자치령군이 공격해오고……크아아악! 앞에서도, 뒤에서도……동료들까지……사방이 적입니다! 지원군을 보내주십시오. 지원군을……]
[5대대! 횡설수설하지 말고 정확한 보고를 해주기를 바란다! 5대대!!]
[대, 대장님! 레드폭스입니다! 후, 후방에서 레지스탕스의 군대가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그, 그리고……레이더로 확인해 본 결과 대장님의 전방에 위치한 제국군들이 서로를 공격해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의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령부를 포위하고 총기를 난사해대고 있으며 하우저가 감시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류안! 이쪽은 카프다. 일단은 로피아와 함께 자치령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난리는 아마도……젠장! 천장에서 적의 드릴라이더들이……꺄아아아악!!]
그야말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를 확인할 수가 없는 혼란이 서머벨 전체를 아비규환에 빠트리고 있었다.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워게임으로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
정상인 사람들마저 정신이 나가버려서 아군을 향해 총기를 난사해대는 상황에서 류안은 평범한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군. 당분간은 그녀에게 정리할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미니게임 발동!’
고유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이 정지하면서 시간이 멈췄다.
흑염룡의 능력을 흡수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미니게임
예전과는 다르게 미니게임의 장르를 결정하는 슬롯머신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에 그 기능을 대체하도록 만든 인물이 새하얀 빛줄기와 함께 마치 달의 여신과도 같은 장엄한 모습으로 등장해 왔다.
“오랜만이야. 브륜힐트.”
[류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목소리 정도는 들려줘야지?”
[노, 놀리지 말거라. 그대가 나의 첫 번째 남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연심을 품지는……]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느껴지던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딱 봐도 ‘했네, 했어.’의 반응이었지만, 류안은 일부러 모르는 척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엄청나게 보고 싶었는데.”
[!!]
“꿈속에서도 얼굴이 보이더라고……어때?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도 풀 겸……”
그렇게 말하면서 능글스럽게 접근해 나갔지만 그녀는 흠칫하면서 뒤로 물러나면서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틈은 없다는 사실을 알지 않는가? 아무리 시간이 정지했다고는 해도……그대의 능력이 오딘의 영역에 속해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이 능력은 사용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을 터인데……]
겁먹은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아하니 공범자의 관계를 맺고 난 이후로도 그놈의 착실한 성격 때문에, 아스가르드에서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겪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들키지는 않았지?”
[……그대의 말대로……되기는 했다. 오딘만이 아니라……신들조차도 우리들에 대해서 놀랍도록 무관심하더군.]
“세상인심이 원래 그런 거야.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강조하는 선동가들치고 군필자는 한명도 없다니까? 정치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뭐……]
[비유가 조금 틀리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서두르고 싶다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어. 대신에……현재의 상황을 알려줄 테니 타개책과 정보를 알려줬으면 좋겠어. 성가신 놈이 적으로 나타났거든.”
[그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적이라니 흥미가 생기는군.]
잠시 후.
짤막하게 요약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브륜힐트는 천리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입술을 열었다.
[심연의 악마인가……확실히 인간들의 전쟁이라면 저것보다 성가신 능력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군. 저것은 혼돈의 연쇄라고 불리우는 고유능력이다.]
“고유능력이라고?”
[쉽게 설명하자면 그대가 사용하는 미니게임과 비슷한 종류의 능력이라고 볼 수가 있지. 차이가 있다면 그대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시간을 멈추고 단숨에 행운력을 끌어올리지만……저 남자의 경우에는 현실에서 특정한 조건들을 클리어 해야만 스테이지가 올라가면서 능력의 파급력과 패턴이 변화해가게 된다.]
“……미니게임과 비슷한 능력이라고? 아무리 봐도 저쪽이 훨씬 더 강력하게 적용되는 거 같은데……”
[능력의 파장은 더 강력할지도 모르겠지만 스테이지를 올릴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하면 그대의 능력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될 것이다. 현재, 그대들이 겪는 혼란의 절반은 그 남자의 고유능력이 지닌 여파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남자가 계획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저 남자는 스테이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이번 전투에서만 5번의 목숨을 걸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도할만한 일이 아니기도 하며……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냈으니 더욱더 놀라울 일이지.]
“……평범하게 미친놈이 아니라는 소리야?”
[미치기는 했지만 천재적으로 미쳤다. 그렇군, 미쳤다는 분야에서는 타고난 천재라고 보는 편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전부 다 사기를 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절반의 사기만 치고 있다는 사실에, 류안은 왠지 모를 다양한 패배감에 사로잡히면서 쓴맛을 느끼고 말았다.
‘강해진 다음부터는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져서 그런 건가……위험한 도박은 원래 내 전공분야였는데. 반성해야 되겠어……이번의 패배는 언젠가 반드시 되갚아 주지. 올마이티에게 두 번의 실패는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류안은 비장해진 표정으로 진지한 각오를 다지면서 브륜힐트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미니게임의 권능을 재구성해서 녀석의 스테이지를 낮출 수 있도록 만들어 줘. 난이도는 상관없어. 5단계를 5번 도전해도 상관없으니까……”
[알겠다.]
류안의 요구를 들은 브륜힐트는 곧바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서 미니게임의 스테이지를 재구성해 나갔다.
그녀는 그와 맺은 계약의 대가중 하나로 미니게임의 관리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물론, 오딘에게는 비밀로.
브륜힐트가 관리한다고 해서 미니게임 자체의 내용이 예전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텔넷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류안은 이 오딘의 권능이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작동하면서 현실에 개입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시험당하는 대상이 어려운 시련을 뛰어넘으면 뛰어넘을수록 현실에 개입시킬 수 있는 행운력의 규모도 커지지. 텔넷에서는 그 빌어먹을 상황들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오딘의 권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었지만……현실에서 미니게임의 권능을 극도로 이끌어내려면 미니게임을 재구성해서 5단계 난이도의 시험을 5번 클리어 하는 수밖에 없어.’
아무리 게임을 잘하는 사람도 잘하는 게임과 못하는 게임이 존재하듯이 SS급의 게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류안도 잘하는 장르와 못하는 장르가 존재한다.
물론, 자신의 주특기인 게임 장르에서도 5단계는 부담스러운 난이도였지만 못하는 장르에 걸려버리면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이 미니 게임의 세계.
브륜힐트의 재구성은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안전장치라고 볼 수가 있었다.
‘난이도가 약간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잃어버렸던 헝그리 정신을 되찾는 데는 좋은 시련이 될지도 몰라. 두고 보자, 콘트라베이스! 나를 여기까지 몰아세운 빚은 반드시 되갚아주마!!’
그리고 잠시 후.
어두컴컴한 대전의 한가운데로 전송되어버린 류안은 옥좌에 앉아있는 라스트보스의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의 앞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어, 아무리 5단계부터 시작한다지만 자비를……랩업 좀 하고 올게요.”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면서 라스트보스, 아니 아마도 대마왕이라고 짐작되는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그를 단숨에 구속해버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질문을 건네어 왔다.
[후후후후, 그대와 같은 인간은 처음이로군. 어떤가? 세상의 절반을 줄 테니 나의 부하가 되지 않겠는가?]
예.
아니오.
예를 대답하면 세상의 절반을 손아귀에 넣고서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다 누리다가 용사에게 살해당한다고 전해지는 선택지 A.
그리고 아니오를 선택하면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핑계로 무수한 사람들의 빵셔틀로 부려지면서 온갖 생고생을 하다가, 마왕과 동귀어진하고 죽거나 세계의 평화를 되찾은 다음에 찬밥신세로 잊혀져 버린다는 선택지 B가 그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 작품 후기 ============================
사실 요즘 바빠서 후기 쓸 정신이...ㄷㄷ
그냥 당분간 저는 없다고 생각하고 글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