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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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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안의 우려와는 다르게 스피아는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하고도 크게 좌절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것은 한동안 중단했던 스파이 행위를 다시 재개했다.
그것도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도촬해봤자 나오는 건 없는데……”
“도촬이 아니라 단순하게 취미로 찍는 홈 비디오입니다.”
“너는 홈 비디오를 남자 화장실에서 찍니?”
“원래 이런 영상물은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울수록 좋은 장면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공기라고 생각하면서 볼일 보십시오.”
“공기가 라마즈 호흡하는 소리하고 있네……에휴, 앓느니 죽지. 마음대로 해라.”
임무도 임무였겠지만 그녀가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는 분명히 류안이 갑작스럽게 강해진 이유가 궁금해서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알아내지도 못할 테고, 알아낸다고 해도 따라하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괜히 말렸다가는 더 은밀하고 껄끄러운 방식으로 스토킹을 당할 우려가 높았기 때문에, 그냥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촤아아악!
볼일을 보고 난 손을 개수대에서 씻으면서 거울을 통해서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드래곤 헬름을 매만지는 류안.
“가면은 도대체 언제까지 착용하실 생각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인생의 마스크를 찾아서 방황하는 중이니까 기다려 봐. 흐음, 이 정도면 드래코니안 나이트의 포스가……크흠, 그나저나 스피아. 너는 내가 가면을 쓰고 다니면 어떤 별명으로 불리면 좋겠다고 생각해? 가면의 귀공자? 턱시도 가면? 핸섬 마스크?”
패션의 완성인 머리카락과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드래곤 헬름이었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어떤 별명도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스피아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으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브이(V)가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브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떠오른 이름이니까 그냥 잊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스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자신과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발언을 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류안은 곧바로 프로파일링을 사용해서 V라는 단어가 관련되어 있는 조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온공확국이나 연맹에 V라는 단어가 관련되어 있는 조직이라면……으음, 대부분은 IT관련된 조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군. 혹시 산업 스파이인가? 아니야, 이쪽 방면이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모자라. 교장이 개입했다고 보기에도 시기가 미묘하니까……으음, 그나저나 V라고 하니까 왜 갑자기 전생의 영화가 떠오르는 건지? 이것도 전부 다 영화광인 잭 때문인가.’
아무런 생각 없이 썰고 죽이고 잔인하고 야하면서 스펙터클한 영화를 좋아하는 류안이지만 잭의 경우에는 약간은 낡았더라도, 계몽적이면서도 풍자적이고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는 독자적인 철학과 사상이 담겨진 영화들을 좋아했다.
나름대로의 철학과 사상을 담아내는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는 찰리 채플린이었지만 영화적으로 더 좋아하는 것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과묵한 편이었던 그가 한 번 계기를 잡자 설명충으로 빙의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주던 영화가 있었다.
V와 가면.
두 개의 키워드로 떠올리게 되는 영화.
[야, 네가 자꾸 떠들어대니까 괜히 보고 싶잖아. 젠장, 반전까지 전부 떠들어대고 말이야. 이런 스포일러 개자식……]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쪽 세계에서는 자체제작하지 않는 이상은 구하지도 못하는 작품입니다. 단념하시고 들으십시오. 스포일러! 스포일러! 스포일러!]
덕분에 그 회상을 떠올려버린 류안은 기분이 나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스피아.”
“네.”
“속옷은 조금 더 여러 가지를 입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아무리 자신을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다지만 그래도 검정색 면 팬티에 깔맞춤의 스포츠 브라밖에 없다니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그가 자신의 팬티를 검지에 끼우고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스피아는 화들짝 놀라면서 외쳤다.
“꺅! 도, 도대체 어느 틈에 가져가신 겁니까?!”
“계속해서 따라다니면 계속해서 빼앗을 거니까 각오하라고. 아, 참고로 내가 추천하는 물건은 월화수목금토, 오행 + 음양 스페셜 요일별 속옷세트를 추천한다. 그렇게 세트 아이템을 모으는 게 콜렉터의 입장에서는 모으는 보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고 돌려주세요! 이이익!”
후우우웅!
스피아가 재빠르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류안은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두 발을 땅바닥에 붙인 상태에서 쏜살같이 화장실의 밖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 어이없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닭 쫓던 개의 심정으로 고민에 빠져버리는 스피아.
‘발을 바닥에 붙이고 이동하다니 제운종 같은 보법인 건가? 아니야, 제운종도 저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는 없어. 게다가 저런 속도라니……도대체 무슨 능력을 사용하는 거지? 저것도 게임의 고유능력이라는 녀석인가?’
평범한 방법으로는 알고 있을 리가 없는 정보를 떠올리면서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화장실을 30분 정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었다.
참고로 화장실 밖에서는 클라크가 들어가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
연맹력 8월 1일.
류안은 달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마그누스 자치령의 연합군 군사고문으로 공식적인 직함을 받게 되었다.
정부수반인 모건은 그에게 ‘해방자’라는 칭호와 함께 명예제국훈장을 수여했다.
거기까지라면 조그를 무찌르고 13구역을 해방시킨 그에게는 정당한 대우라고 볼 수가 있었지만, 문제는 이어지는 카스티야의 조치에 있었다.
[……이와 같이 현재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유연한 대처가 필수라고 생각하여, 연합군의 류안 제르너에게 군사적인 총사령관의 임무를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삼군의 지휘권을 보장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조치란 말인가!]
[아무리 군사적인 역량이 뛰어나다지만 외국인에게, 그것도 일개 중령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하다니 미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카스티야는 제국민의 자존심을 버리고 연맹의 개가 되기로 작정했다는 소리인가? 의회는 뭐하고 있는가, 당장 탄핵을 추진해야만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마그누스 자치령의 곳곳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물론이고 군벌 세력들도 일제히 침묵을 지키면서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류안이 사전공작을 통해서 미리 포섭한 사람들의 의향이 반영되었던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대의명분은 사실 [죽음]에 대한 정보를 그들에게 알려준 덕분이기도 했다.
[죽음은 십중팔구 저나 카스티야 총사령관님의 목숨을 노릴 겁니다. 외부인인 저의 목숨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겠지만……만약에 카스티야 총사령관님 사망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군벌 세력들이 분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혼란을 틈타서 제국이나 공화국에서 개입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우리들을 위해서 총사령관의 대역을 자처하겠다는 소리인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로 그렇습니다. 물론, 죽음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약간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의원들이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조그가 가지고 있던 강화몬스터 군단의 마스터 코드에 대한 해석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불안감도 존재했는데, 일단 마스터 코드의 제어권을 확보하고 서브 컨트롤러를 통해서 전술적인 분할 통제에는 성공했지만 조그처럼 단 하나의 마스터 코드와 조종장치로 모든 군단을 제어하는 작업에는 난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서브 컨트롤러를 가지고 있는 군벌 세력의 지휘관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이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심리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암중에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 류안.
“후후후후. 도열하고 있는 병사들이 마치 쓰레기 같군.”
“나중에 뒷감당을 어쩌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밀리안 대학교에 상주시킨 5천 제국군의 사열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의 발언을 기록하고 있던 클라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쓰레기라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발끈하지 않네?”
“저도 이제 농담하고 진담 정도는 구분하면서 삽니다. 그나저나 왜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시면서 자치령에 영향력을 발휘하신 겁니까. 덕분에 자치령 내부의 여론만이 아니라, 제국군과 원정대의 상부까지 대장님을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흥, 일부러 그렇게 바라보라고 취한 조치인데 당연히 그렇게들 나오셔야지.”
“……진심입니까?”
“물론, 진심이다.”
일개 중령이 가지기에는 과분한 권한을 대놓고 차지했으니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적의 주목도가 오르는 것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원정대의 상부에서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류안이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불쾌감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런 수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치령에 총독부를 설치하는 일이나, 마스터 코드를 확보하는데 아무런 협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관련한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고스란히 그를 후원하고 있는 율리안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원정대가 제국에게 대패를 모면할 수 있는 이유는 전부 다 그가 원정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상식이라는 단어가 결여되어 있는 대다수의 장군들에게는 그런 대처가 언제까지 통할 리는 없는 법.
그렇다고 그가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상당한 고초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류안은, 사악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득의양양했다.
‘후후후후. 너도 한 번 진흙탕에서 뒹굴어 봐라, 율리안. 이성이나 상식, 논리가 통하지 않는 꼰대들에게 한 번 대차게 까여봐야 전쟁터에서 적군보다 아군이 무섭다는 진리를 깨닫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잘하려면 끝까지 잘했어야지……크흠.’
통쾌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칭찬받을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류안은 살짝 무안해진 나머지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마그누스 자치령을 정리하셨으니 다음에는 어디로 향하실 생각입니까? 이렇게까지 판을 키우셨다면 분명히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맞아! 후후, 생각보다 많이 똑똑해졌네, 클라크. 그동안 전략과 전술서를 공부시킨 보람이 있는 것 같아?”
“책보다는 대장님이 생각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적응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어느 지역을 공략할지도 한 번 추리를 해 봐.”
시험하는 것 같은 류안의 말에 클라크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순순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해 나갔다.
“마그누스 자치령에 인접한 세력은 총 5곳입니다. 11,12,14,15,16구역이죠. 이 중에서 12구역과 14구역은 자치령과 마찬가지로 밀림지역이고, 전략적인 가치가 없는 중립지역이죠. 지배하는 세력은 일단 슈발츠 계급의 군벌 세력이지만 별다른 병력들이 없으니 강화몬스터 군단을 동원하면 쉽게 제압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맞아. 두 곳을 제압하면 보급선과 전선이 쓸데없이 넓어지게 되지. 빼앗으면 뭐해? 지킬 수 있는 병사들과 병기가 없는데. 식량이야 남아도는데 더 늘려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잖아?”
현재 마그누스 자치령의 가장 심각한 문제도 그것이었다.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생명 공학자들이고 고도의 농업기술을 갖추고 있으니 식량이야 넘쳐난다지만, 정작 군대를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가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
대체수단으로 강화몬스터 군단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들이라고 무턱대고 수량을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었으며, 대부분이 유전적인 조작으로 인한 구조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장거리 원정에는 특히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지역은 대세가 기울어지면 자연스럽게 자치령으로 항복하게 될 거야.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 군대가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강력한 병기로 무장하면서 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니까……”
류안의 말에 클라크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군요. 현재의 전황에서 가장 강력한 병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을 선택하라면……”
“그래, 15구역의 언더 월드(under world)가 제격이지.”
============================ 작품 후기 ============================
그래서 다음 편부터 언더 월드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