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8 ----------------------------------------------
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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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죽음]에게 대항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탈리아가 류안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며칠 전.
율리안 중장의 도움으로 바라모스를 퇴치하고 열등감으로 인해서 살짝 삐뚤어지기는 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맨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삐비비비비빅!
꼭두새벽에 갑자기 울려 퍼지는 방위군의 긴급통신에 졸린 눈을 비비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류안.
“네, 트라이엄프 중대의 류안 소위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제시카 중령님?”
[밤늦게 불쑥 죄송해요,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건강하셨죠?]
화상 통신으로 반가운 얼굴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하다가 그녀에게 발생한 변화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예. 물론입니다. 제시카 중령님이야말로……어라? 대령님으로 진급하신 겁니까? 갑자기 연락이 끊어져서 걱정했는데 어느새 그런…….”
13구역을 제압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어트 중장의 휘하에서 활약하던 그녀와는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지만, 제시카에게 갑작스럽게 비밀스러운 인사이동이 진행되는 바람에 잠시 동안 연락이 두절되어버렸다.
보통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는 일은 소위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과정만큼 어렵다는 것이 방위군의 상식인데, 아무리 개혁이 일어났다지만 소령에서 진급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그녀가 대령까지 진급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버린 그.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곧바로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규정 때문에……현재 저는 길로틴 준장의 차석 막료로 활동하면서 엔포서를 지원하고 있어요.]
“엔포서를 말입니까?”
하필이면 현재 상황에서 제일 꺼림칙한 사람의 휘하로 들어갔다는 사실에 류안의 눈살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지고 말았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는 파벌 싸움에는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던 당사자가 다름 아닌 제시카였기 때문에, 그 대목에서 그녀는 살짝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름대로 거절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뭐, 상부에서 까라면 까는 게 군인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이런 꼭두새벽에 통신을 하다니……혹시라도 제 손길이 그리워지신 겁니까? 그렇다면 곧바로 가상현실로 접속해서……후후후후.”
양 쪽의 손가락을 징그럽게 꼼지락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에게 사관학교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얼굴을 붉히는 제시카.
[크흠! 정말이지……13구역을 탈환하셨다는 말에 조금은 성숙해지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짓궂으시군요! 그, 그래도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까 기쁘기는 기쁘네요. 저도 만나고 싶……아, 마지막 말은 잊어주세요!]
크오오오오오!
수줍어하면서도 연심을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아니나 다를까 흑염룡이 기지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역시 못 참겠습니다. 제시카 대령님을 눈앞에 두고서는 가만히 인내해야 하다니……지금 당장 VR머신을 착용하십시오! 진급 축하 선물을……”
[아,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미안해요, 제가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시간을 끌었던 것 같네요. 급한 이야기니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시간이 없으니까 잘 들어주세요.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니까……]
그렇게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절실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도 장난을 중단하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세요. 어쩌면 소위님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내용을 전해들은 그는 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
“역시나 율리안 중장이군……후후후후후.”
류안에게 내려지는 조치를 확인한 길로틴은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리면서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뭔가 특별한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인사 조치로 보입니다만……”
“정상적이라……그렇지. 정상적인 조치야. 13구역을 1개 중대로 탈환했으니 대령의 자리라도 아깝지가 않지, 정신 차리게! 제시카 대령. 방위군이 언제부터 자신의 공적에 걸맞도록 진급을 진행시켰다고 그러는 건가? 세상에는 대가 없는 선의는 존재하지 않네. 율리안 중장은 말이야, 자신을 대신해서 죽을 사람으로 그를 선택한 걸세.”
“류안 소위가……죽는다는 말씀입니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에 제시카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죽고말고! 겁도 없이 죽음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남은 것은 시간문제지. 그래도 기왕에 죽을 목숨이라면 율리안 중장의 의도대로 최대한 화려하고 쓸모 있게 사라졌으면 좋겠군. 대중들에게 젊고, 안타까운 영웅으로 길이길이 기억돼야만 원정대의 다음 지원군의 규모가 커질 테니까.”
“죄송하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군요, 그 율리안 중장이 그렇게 음험한 계책을 사용하다니……”
“음험한 계책이라니? 자네는 정말로 순진하구만. 잘 듣게, 높은 사람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면 아랫사람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장기말에 지나지 않는다네. 율리안 중장은 그나마 자신을 위해서 죽어주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해주는 편이지. 죽음을 막아줄 수는 없겠지만, 그는 이번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류안이라는 장기말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일 뿐일세. 장담하지……그가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공화국의 승리를 위한 초석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걸세. 후후후후후. 하하하하하하하!!!”
***
“……그게 정말입니까?”
믿어지지 않는 대화 내용이었기 때문에 류안의 표정은 창백해지고 말았다.
[안타깝지만 사실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길로틴 준장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엔포서를 지원하면서 평범한 장교로서는 파악하지 못하던 정보들과 접촉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죽음의 존재는 사실이었어요. 지금까지 몇 명이나, 몇 명이나 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하고 말았죠. 설령 율리안 중장이라도 그들을 막아내지는 못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적어도 지상에서는……]
“그럴 수가……”
그랜드 마스터라는 명성처럼 거의 무적에 가까운 존재로 비추어지던 율리안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 암살자 집단.
죽음.
이름도 정체도 파악이 불가능한 그들의 존재는 소문만이 무성했고 지금까지 전쟁터의 괴담처럼 떠돌고 있었는데, 제시카의 정보에 따르면 원정대의 상층부는 그들의 존재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법이나 정체가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아요. 하지만……아직까지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들은……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변수를 발생시키는 이들은 모조리 제거시켜 왔어요. 바로, 소위님 같은……]
“젠장……”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시작한 전쟁이기는 했지만 류안이 지금까지 발버둥을 친 이유는 전부 다 살아남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제시카가 알려준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활약한 것이 오히려 스스로의 목줄을 천장에다가 매달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
그나마 원정대 내부에서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율리안 중장마저도, 자신을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일개 장기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희망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덕분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13구역의 혼란을 방치하고 부하들을 괴롭히면서 폐인처럼 생활하던 류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재기시켜 준 사람은 탈리아.
그녀의 프로포즈 퍼포먼스와 신데렐라 퀘스트를 부여받은 류안은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맞아. 어차피 이대로 주저앉아봤자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차라리 13구역을 안정시키고 이 장소에 틀어박혀서 죽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율리안 중장이 아무리 내 이름을 선전한다고 그래도 여기에서 중단한다면 그들도 내게서 시선을 돌리겠지……이 지역만, 이 지역만 평정하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런 희망은 낙양의 추적자를 무너트리고 자신에게 정신지배를 시도하던 유리 브라스를 역으로 생포하면서 다시 타오르게 되었지만, 그녀의 정체가 죽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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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는 내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뿌리부터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타입이니까……반골……그런 기질이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탈리아와 모건의 요구대로 12시까지 그녀를 굴복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신데렐라 퀘스트의 종료를 불과 몇 시간 남겨놓고 거기에서 진도가 막혀버린 류안은 타개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유리 브라스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가 죽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터무니없이 강력한 MC능력자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어. 내 경우에는 막아냈지만 카스티야에게는 통할지도 몰라!’
펜져스인 그녀가 자신의 계획에 협조해줄 가능성은 낮았지만 적어도 카스티야보다는 교섭하는 게 쉬울 거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잠깐이라도 좋아. 카스티야가 잠깐이라도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수준의 최면을 발동시켜준다면……그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그녀를 조교시키겠어.’
아무리 MC능력자라도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으니 섣부르게 수작질을 한다면 곧바로 처리해버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리 브라스를 찾아가서 구개기와 눈가리개를 풀어주고 대화를 시도하는 류안이었지만, 다음 순간에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악하악!”
“……왓 더…….”
“음란한 암캐를 처벌하러 오신 건가요? 때려주세요, 범해주세요, 능욕해주세요! 제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 주인님의 유전자를 쏟아넣어……”
“자, 잠깐만 기다려. 이렇게 좋은 전개가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잖아.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속셈이라니 무슨 소리인가요? 저는 단순하게 주인님을 세뇌하려다가 정신방어에 가로막히고 제 기술에 제가 당해버렸을 뿐인데요? 디멘드 서번트라는 기술인데, 어지간한 영웅들은 한 방에 날려버리는 특수 능력이죠……도대체 어떻게 막아내신 건가요? 덕분에 주인님의 노예가 되어버렸잖아요!”
“뭐?”
터무니없는 내용이라서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협조해조는 기색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도움을 빌리면서 카스티야를 세뇌시켰고, 추후에 다양한 조사들을 통해서 그녀의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알고 보니 디멘드 서번트라는 기술은 대상이 죽을 때까지 노예로 만드는 1회용의 스킬이라는 모양.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부작용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제 기술에 제가 당하다니 나도 참 덜렁이라니까? 데헷! 참고로 이 기술을 다시 사용하려면 제가 죽어야만 하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평생 동안 육노예 확정이네요!”
“그, 그래…….”
스스로가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카오스하게 긍정적인 유리의 반응에 식은땀을 흘리는 그.
어쨌든 그녀의 합류가 여러 가지로 다급했던 류안에게는 한 줄기 구명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딱 하나, 현재의 상태에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기는 해요.”
“그게 뭐지?”
“나락의 도약을 통해서 펜져스로 거듭나는 거예요. 그리고 제국에게 투항하면 죽음도 주인님을 공격하지는 않겠죠.”
심연의 악마에게 자신을 내주라는 소리였기 때문에 류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말고는 없어?”
“죄송하지만 그것 외에는 저도 방법을 몰라요. 아쉽기는 하지만 저와 조그를 쓰러트렸으니……조만간 그들이 찾아오게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건 사실이에요! 죽음은 명령에 복종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주인님 같은 젊은 영웅들의 피를 아주, 아주 좋아하거든요!”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없어? 정말로?”
“우주로 도망친다면 모를까 지상에서는 힘들 거예요. 아무리 그들이라도 우주에서까지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죽을 때는 함께 네요, 주인님!”
“빌어먹을……”
류안의 초조함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 작품 후기 ============================
4월 4일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소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