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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던 제시카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양손을 비비고는 그 속으로 입김을 호하고 불어넣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불을 피운 게 무색해질 정도로 날씨가 사나웠기 때문에, 나 또한 양손으로 어깨를 부둥켜안으면서 위 아래로 마찰시켜 추위를 떨쳐내려고 애썼다.
일이 이 지경으로 이르게 된 원인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느라 흠뻑 젖어버린 파일럿 슈츠를 입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해가 저물자 예상대로 비는 눈으로 바뀌어 버렸고, 동굴 내부의 기온도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차가운 외풍까지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 차례 더 밖으로 나가면서 장작들을 보충해오기는 했지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내가 제안을 던졌다.
“아무래도 옷을 벗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망설이는 눈치인 그녀.
“툭 까놓고 말해서 알몸이 보고 싶습니다. 교관님.”
“……푸훗!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웃어넘기려는 그녀에게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가깝게 접근한다. 놀란 토끼눈을 하는 그녀의 얼굴 앞으로 키스를 할 것처럼 가깝게 다가가서 시선을 마주치자, 홍당무처럼 붉어진 표정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는다.
“저, 저기…….”
처음 보는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여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이 이상 주저하신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벗겨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스스로의 손으로 해결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저도, 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네,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나는 주저 없이 뒤돌아섰다.
그러면서도 본능을 억누르지는 못하고 온 몸의 신경을 두 귀로 집중시키자,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파일럿 슈츠를 벗어나가는 그녀의 움직임이 들려온다.
지퍼를 내리는 소리. 사르륵하고 옷이 벗겨지는 소리. 조신하게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작고 사소한 기척들.
그 모습이 장작불의 불빛으로 반사되며 동굴의 벽에 제시카의 실루엣이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그림자 스트립쇼를 감상하게 되면서 상상이 제멋대로 나래를 펼치면서 흑염룡을 일으켜 세운다.
‘아, 젠장. 그냥 덮쳐버릴 걸 그랬나…….’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우울해하던 탈리아의 모습도 걸렸고, 레베카까지 접수하기로 마음을 먹은 마당에 그녀에게까지 손을 대는 건 역시나 인간으로서 좀 아니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접수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나하나씩 천천히 먹어야만 탈이 안 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녀의 쇼가 끝났다.
“이제는 돌아보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류안 소위도…….”
돌아보니 제시카는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면서 조신하게 앉아있었다.
농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매력을 뿜어내는 그녀의 육체.
한 손으로 체 가려지지 않은 커다란 가슴은 둘째 치고 꾸준한 훈련으로 단련을 한 덕분인지, 들어갈 데는 들어갔고 나올 데는 확실하게 나와 있다. 피부는 구릿빛과 하얀색의 중간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건강한 색으로 물기로 젖으면서 음란하게 반들거리는 바람에, 그 사소한 움직인 하나하나가 유혹하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다.
그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바람에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돌려버리는 그녀.
“너무 빤히 쳐다보시면…….”
“죄, 죄송합니다.”
‘젠장, 이게 뭐라고 나까지 부끄럽지.’
여자의 알몸을 처음으로 보는 것도 아닌데 마치 사춘기의 소년처럼 흥분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분위기도 급격하게 어색해져버렸기 때문에 헛기침을 한 나는, 다시 한 번 뒤돌아서서 재빠르게 슈츠를 벗어버렸다.
‘그나저나 아들놈이 두 손으로 가려지지를 않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자신의 존재를 있는 힘껏 과시해오는 녀석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뻔뻔해지기로 결심하고 뒤돌아섰다.
“……어맛!”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터트리면서 눈을 가려버리는 그녀.
“죄송합니다. 어떻게 가릴 방법이 없어서…….”
“아, 알겠어요. 이해하니까 그…….”
‘왠지 지금 밀어붙이면 곧바로 h한 이벤트로 돌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젠장, 나란 놈은 왜 이렇게 절조가 없지.’
허둥지둥 대는 그녀의 모습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던 나머지 당장이라도 쓰러트리고 미친 듯이 용두질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런 생각들을 털어버린 나는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그 이후로의 슈발츠 제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예……그러니까 그게.”
제시카는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중단했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던켈과 기사단은 왕궁의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슈발츠 제국의 건국을 선언했지만 그들만으로 드넓은 유라디스 은하를 통치하기에는 정통성과 명분, 그리고 실력. 모든 면에서 부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 바이스 왕국의 국민들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들을 몰아내려고 시도했지만, 심연의 악마들조차 당해내지 못했던 그들이 슈발츠 제국을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수많은 바이스들의 세계가 그들의 손에 불타버렸고 수많은 국민들이 쇠고랑을 차며 노예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했는지 구 바이스 왕국의 군대는, 군인들에게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해서 고통 없이 자살할 수 있는 독극물 임플란트 시술을 필수적으로 받도록 명령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그들의 위세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약화되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심연의 악마들과 결합한 1세대의 기사단들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어서 개채 수는 나날이 줄어들어갔고, 그 전투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강간과 결혼을 통해서 낳은 자식들에게 인간의 피가 섞이면서 악마들의 본능도 점점 희석되어 군사력 또한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연전연패를 거듭한 구 바이스의 국민들이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도 여전히 은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슈발츠 제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다는 것.
인간성을 되찾으면서 점점 평화로워지는 동시에, 구 바이스 국민들의 증오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심연의 악마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빠져버린 슈발츠 제국은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게 된다.
“벤덴타 황제는 슈발츠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젠바이스라고 불리는 타락한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심연의 악마들이 찾아왔다는 심연의 문을 열고 그 속으로 기사단들을 집어넣어 그들과 결합시키는 [나락의 도약]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하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과정이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위험한 나머지 평범한 바이스의 사람들은 감당해 낼 수가 없었지만, 슈발츠들은 달랐죠. 악마의 사생아들이나 다름이 없는 그들은 나락의 도약에서 악마들과 쉽게 결합을 하고 전성기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슈발츠 계급에는 세 가지 부류의 국민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심연의 악마들이 가진 힘을 받아들이고 전사의 계급으로 다시 태어난 펜져스. 두 번째는 펜져스와 바이스들의 사생아들인 슈발츠. 인구비율로 보면 극소수에 불과한 이들이 황제나 왕, 공후백자남의 귀족 계급들을 독차지해버리고 바이스 계급의 국민들을 평민과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정치를 지속시켜 나갔다.
슈발츠 제국의 힘과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는 펜져스.
어둠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그들의 악명은 전 은하에서 가장 오래되고 두려운 존재들로 알려져 왔다.
[단 하나의 펜져스도 살려두지 마라.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안심하는 순간이 바로, 네가 그들이 만들어놓은 감옥에 갇히는 순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펜져스 군단을 전멸시켜서 사하스 연맹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쟁취했다고 알려진 영웅 발터가 남긴 말이다.
영웅답게 지나치게 멋진 표현이지만 그들의 잔인함과 악명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사망했지만 한 때 가온공화국에서는 희대의 악당으로 유명한 팬지 로져라고 불리는 해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600만 골드.
그는 자신이 얻은 악명과 능력을 실재 이상으로 과장되게 부풀리고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의 자랑질을 듣다가 배알이 꼴려버린 부하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렇게 잘나셨다면 대장님과 펜져스 놈들 중에서 누가 더 잔인하고 흉악합니까?]
그 말은 팬지 로져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야, 이 개 쌍놈의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나는 사람의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어디서 악마랑 붙어먹은 펜져스 새끼들이랑 비교를 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 일화가 알려주는 것처럼 그들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헨드릭 황제의 시절에 이르러서는 슈발츠 제국의 영역이 펜져스만으로는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는 바람에, 바이스 계급을 통치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들의 지위와 권리를 향상시켜 주었다.
군사적인 분야는 여전히 펜져스가 독점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분야에는 중요한 요직에 바이스의 인사들을 임명시키는 것으로, 수많은 바이스들을 귀족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친 바이스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덕분에 그들의 화도 많이 누그러져서 잠시 동안은 은하 통일이라는 명분 앞에서, 양 진영 사이에 협력과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펜져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헨드릭 황제의 존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사망하는 순간에 그런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펜져스는 다시 한 번 바이스를 탄압해나갔다.
그나마 헨드릭 황제가 남긴 것이 있다면 펜져스는 하나같이 그를 존경하고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의 유언을 따라서 바이스들의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덕분에 그전까지는 전부 한통속으로 악랄하던 펜져스가 황제에 대한 이상과 집착이 극도로 과민해지는가 하면, 급기야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갈라져 서로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같은 펜져스들끼리 피를 흘리는 내전을 아직까지도 계속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틈을 노리고 탄생한 세력이 바로 사하스 연맹.
현재에 이르러서는 헨드릭 황제의 피를 잇는 구트 황제가 명분상으로는 옥좌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황제에게 실망한 7명의 군단장들이 거대한 슈발츠 제국을 갈라먹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다.
‘연맹이 아무리 우주군으로 잘난 척을 한다고 그래도 진실은 이렇지. 펜져스를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지금쯤 연맹은…….’
연맹은 연맹 나름대로 가맹국들의 사상의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바람에 힘이 사분오열되었다고 한탄하고 있지만, 현실은 슈발츠 제국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서는 감히 우주군을 지원하지 못하는 세력들이 없으니 이것이 현재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모든 힘을 끌어 모으고도 고작 2명의 군단장과 백중세를 이루면서 전선을 유지하는 수준인 현실.
“펜져스들은 슈발츠들 속에 잠들어있는 악마의 피를 깨우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정기적으로 바이스의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어요. 그들은 그걸 솎아내기라고 불렀죠.”
바이스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숫자를 조절하는 가축 같은 존재들로 여기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날씨가 더욱 추워지는 것 같다.
“자국민을 학살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군대라니……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요.”
“그래서 부모님도 슈발츠 제국을 탈출하기로 결심했어요. 단 하루를 살아도, 그들이 없는 곳에서 숨을 쉬고 싶다는 갈망 하나만으로……물론, 그 과정들이 쉽지는 않았지만.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바이스 귀족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떻게든 밀항선으로 몸을 실을 수가 있었어요. 그 때가 제 나이 8살 때의 일이예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문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나이에 나는 뭘 하고 있었지?’
현생의 일이야 류안의 기억이니까 남의 일이라고 쳐도, 전생의 나는 그 시절 유소년 게임대회를 참가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보다 게임실력이 뛰어난 꼬맹이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게 인생의 모든 고민이었던 태평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그녀는…….
“……처음에는 순조롭다고 여겼던 항해였지만 어느 순간에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과의 공동생활이 문제였는지, 열악한 환경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는 어른들이 먼저 쓰러져 버렸고, 다음에는 아이들까지 쓰러지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승무원들까지……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멀쩡한 사람은 저 하나밖에는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망명을 할 수가 있었던 겁니까?”
“다행스럽게도 자동운항장치는 멀쩡했거든요. 하지만 연맹의 국경에 도착했을 때 브로커들과 통신을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죠. 그때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승무원이 다가와서, 제게 통신 단말의 사용법을 가르쳐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누군가 통신을 보낼 때까지 계속해서 지켜보라고……슈발츠 제국이면 무조건 항복할테니 살려달라고 빌고 연맹이면 도와달라고 말하라고…….”
“그럴 수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8살짜리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연맹의 함선들과 무사히 접촉을 하면서 공화국에 안주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때까지 그녀는 무덤처럼 변해버린 밀항선에서 오직 홀로 통신 단말을 바라보면서 일주일 동안 외로움 싸움을 계속했다고 한다.
드넓은 우주에서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으로, 언제 자신들을 죽이러 올지 모르는 펜져스의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그녀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PTSD(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치료를 받으면서 전부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나 봐요. 설마 고작 그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잃어버리다니, 역시 저에게는 군인의 자격이……으읍!”
갑작스러운 키스를 받으면서 놀라며 눈을 부릅뜨는 그녀.
잠시 양손을 들면서 밀어내려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내 두 눈을 감으면서 내 행위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가자, 붉어진 표정으로도 고개를 흔들어대는 그녀.
“이러면 안 돼요. 류안 소위에게는 탈리아님이…….”
“그녀가 그러는데 4명까지는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네?”
“다리 위에서 제게 하신 말씀 잊어버리셨습니까?”
[혹시라도……그 약속을 제가 대신 들어드리는 건 안 될까요? 그게 부족하다면 저는 어떤 요구라도…….]
같은 내용을 떠올렸는지 제시카의 표정이 붉어진다.
“약속대로 레베카를 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대신에,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춥군요. 이대로 가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은데 몸을 좀 따듯하게 녹여야 되겠습니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빈 말은 아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있어서 파일럿 슈츠를 벗고 난 이후로도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론이고 그녀의 안색도 파리해져서 더 이상은 눈뜨고 볼 수가 없는 상태. 이런 상황에서 체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한정되어 있다.
비록 이번 일로 그녀가 나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떨고 있는 여성은 이제는 더 이상 어른스럽고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연상이 아니라, 내 품에 안고 싶은 한 명의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항하려면 저항하세요.”
“…….”
그리고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