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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이번에 걸린 미니게임은 시타델이라는 보드게임.
중세시대의 다양한 직업들이 왕좌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게임. 하지만 이 게임의 목적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가장 빠르게, 많은 건물을 짓느냐가 관건인 게임이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왕도, 권력도, 군대도, 신도 아닌 돈.
강ㅊ……아니, 그냥 은행을 담당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며, 나머지 직업들은 모두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지만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몫을 챙긴다.
이 게임은 특이하게도 주사위가 아니라, 누가 왕좌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차례대로 순서대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가 있는데 1번 카드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암살자 카드다.
[착하게 구는 시간은 끝났다. 애송이들……]
이 세계의 권력 서열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카드의 순서는 1번부터 암살자, 도적, 마술사.
바꿔서 말하면 살인마, 범죄자, 사기꾼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파워가 강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렇게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플레이하는 것이야말로 시타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카드는 왕, 주교, 상인, 건축가, 전쟁군주의 순서인데 다른 플레이어의 건물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인 전쟁군주가 제일 마지막에 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 게임이 던지는 메시지는 교활해지되 멍청해지지는 말라는 것.
자기 자신의 살을 깎아먹으면서 파괴를 일삼는 전쟁군주들은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시타델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정말로 자신이 손에 쥐는 직업들이 실재로 꺼냈을 법한 말을 읊조리게 되는데, 그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대충 이런 식으로 떠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다.
이번에는 누구를 조질까? - 암살자
돈 많은 새끼를 털어야 되는데 - 도적
자 제 손을 보세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죠? 잠시 후에는 놀랍게도 카드들이 짠하고 나타나게 될 겁니다. 니 카드지만요. - 마술사.
닥치고 세금이나 내. 그리고 옥좌를 가져와라 미천한 것들. - 왕
슬슬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뜯어야 하는 때가 되었는데……그나저나 여기는 DMZ입니다. 전쟁군주님. - 주교
돈이라는 건 굴리면 굴릴수록 늘어나는 거야! 마이 프레시어스!!!!! - 상인
다들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 게임은 건물을 짓는 게임이라고! 나, 날림 공사 아니거든? 아니거든?? - 건축가
맞아. 난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전쟁군주야. 하지만 내가 전쟁을 하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니들은 내일만 살지? 그러니까 오늘만 사는 놈한테 뒤지는……아, 젠장. 조지고 싶은 놈이 하필이면 DMZ네…… - 전쟁군주
은행을 담당하는 사람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고(다르게 말하자면 왕따 당하고 있고)이 난장판에 끼어들어서 재밌게 즐기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심리전과 인간관계가 중요했다.
하지만 나는 심리전에만 집중을 한 나머지 1단계에서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상대 플레이어들을 가지고 놀았는데, 덕분에 2단계에서는 나를 싫어하게 된 대전 플레이어들이 연합을 맺으면서 나를 공격해왔다.
4단계를 플레이할 때는 내 플레이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과 각 단계에 맞는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새롭게 합류하면서 판이 커졌고, 그들 전부가 내게 덤벼오면서 난이도가 극악해지는 상황.
‘현재 생존률이 80%인데……이쯤에서 물러나야 되나?’
나 혼자라면 모를까 제시카의 목숨이 함께 걸려있다는 생각을 하니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실패하면 온갖 불행들이 디버프로 작용할테니 사망할 게 뻔한 상황.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20%의 실패 확률도 커 보이는 게 사실이다.
존의 영역에 진입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게임판 위에서 빛나고 있는 옥좌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나는 내 허리춤에 있는 찬탈자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5단계에서는 또 다른 내가 적으로 나타나면서 게임이 극악하게 어려워질 것은 자명한 사실. 그는 나머지 5명의 플레이어들을 뒤에서 조종하며 나를 가장 먼저 제거하려고 시도할 게 뻔했다.
이대로 물러나서 소기의 성과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고 왕좌를 차지할 것인가?
루치아가 비웃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결심을 다졌다.
‘다시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한 번도 난장판에 뛰어드는 걸 마다했던 적이 없지.’
그리고 나는 새로운 왕좌의 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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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와중에 갑자기 불어 닥친 강한 돌풍이 재규어의 추락속도를 늦춰주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착수의 충격을 버티지는 못하고 동체가 완전히 박살나버리고 말았지만, 가장 튼튼하게 설계된 조종석 내부에서는 에어백이 터지면서 우리들은 솜털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구체의 조종석은 잠시 수면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면서 둥둥 떠내려간다.
폭포의 아래쪽에는 폭포의 물이 고이면서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덕분에 물의 흐름도 급격하게 완만해지면서 뭍으로 올라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제시카의 상태가 이상했다.
“본부, 본부! 이쪽은 제시카 교관입니다. 통신이 들리면 응답해주세요!”
[치지지지직.]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조종석에 달린 통신 단말을 통해서 계속해서 구조요청을 보내는 그녀. 벌써 1시간이 넘게 그러고 있었지만, 낙수의 충격으로 제대로 고장이 난 모양인지 잡음만이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착수의 충격으로 기절한 상태로, 물가로 둥둥 떠내려 온 물고기들을 잡아서 부들같이 긴 잡풀을 뜯어 한 광주리로 엮었다.
모의전에서 조난 상황을 경험할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호신용으로 가져온 찬탈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조종석에는 비상용 상자에 메디컬 팩과 삽과 곡괭이 같은 연장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이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물건들이라 생존 게임처럼 레어템을 확보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이런 것보다는 비상식량이나 모포 같은 것을 넣어두라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간단한 야전삽과 함께 혹시라도 사용할지 모르는 응급용의 나노머신 주사를 챙긴 나는, 방위군의 무신경함을 원망하면서 비상용 상자를 닫아버렸다.
쏴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인지 세차게 쏟아져 내려오는 비.
최근에 날씨가 포근했던 영향으로 아직까지 눈으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라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지금만 해도 한 방울, 한 방울의 비가 피부에 부딪칠 때마다 살점이 아려오는 상황.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야영을 준비하지 않으면 위험할거라는 생각에 나는 제시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제시카 교관님. 가능하면 주변을 살펴서 야영할만한 장소를 찾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땔감을 좀 모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내 손에 들려진 물고기 광주리를 보면서 깜짝 놀라더니, 드디어 통신 단말을 내려놓고는 허둥지둥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제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그나저나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고기들을 잡으신 거죠?”
“어, 음. 그런 방법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거저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그녀의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폭포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비유하자면 줄 없는 번지 점프를 한 셈이라서 제시카가 충격을 받은 것도 이해는 된다. 나야 방어기제강화가 제정신을 유지시켜주니 멀쩡할 수 있었다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나이아가라 폭포를 뛰어내려 오고도 괜찮은 것이 이상한 일.
다행스럽게도 통신 단말을 내려놓을 것을 계기로 제정신을 되찾았는지 물가의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주변을 차분하게 살피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마르고 땔감이 된 만한 장작들을 주워 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류안 소위. 폭포의 뒤쪽에서 야영을 할 만한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너무 추워서 손발의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는 터라서, 나는 재빠르게 그녀가 가리키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의 내부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입구는 폭포에서 튕겨져 나오는 물로 젖어있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마르고 부드러운 흙바닥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부가 생각보다 건조한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서, 적당한 장소로 자리를 잡은 나는 장작들을 내려놓고 동굴의 벽에서 자라고 있는 마른 이끼들을 뜯어내며 부싯깃으로 삼았다.
그 다음에는 찬탈자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고열을 뿜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 조심스럽게 부싯깃으로 가져다가 대자 순식간에 불이 붙는다.
양손을 마주치면서 감탄을 터트리는 제시카.
“도대체 그런 건 어디에서 배우신거죠?”
“게임에서 배웠습니다.”
“게임에서 그런 것도 알려주나요?”
놀란 토끼눈을 뜨면서 질문해오는 그녀가 생각보다 귀여웠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을 해줬다.
“요즘 서바이벌 게임은 수준이 높습니다. 사실, 저는 게임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진보한 문화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게임은 영화나 문학, 음악, 연극, 예술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르와 분야를 종합해서 표현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지식들이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그래도 하나도 놀랄 이유가 없죠.”
그 말에 제시카는 뭔가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면 게임이라는 장르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능력들이 녹아들었다고 그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로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죠. 물론, 상상력이 가장 큰 기반을 차지하는 장르인 만큼 그런 지식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면 어디까지가 현실의 영역이고, 가상의 영역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면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추워보이시는데 일단은 몸부터 녹이죠. 겸사겸사 물고기를 구워서 요기도 좀 하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조금 전에 제시카가 꺼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물고기를 태워버리고 말았다.
[게임이라는 장르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능력이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겠군요.]
‘아니, 그렇지만……설마…….’
“……소위! 류안 소위!”
“네?”
“물고기가 시커멓게 타버렸어요.”
“아…….”
그제야 들고 있는 물고기가 숯검댕이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새로운 물고기를 집어서 나뭇가지로 끼워 불가로 가져다가 대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에 빠지면서 넋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제시카는 보다 못해서 들고 있는 물고기를 빼앗으면서 자신이 구운 물고기를 내밀어 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배부터 든든하게 채워주세요. 구조대를 보내라고는 했지만, 얼마나 떠내려 왔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며칠을 기다려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제시카는 내가 알던 침착함과 어른스러움이 묻어나는 평소의 그녀였기 때문에, 문득 통신 단말기를 잡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녀의 행동이 더욱 더 궁금해지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부분으로 생각이 미쳤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사과를 하는 그녀.
“저야말로 죄송하죠. 아까 전에는……제 자신을 잃어버려서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건……죄송하지만 말씀드릴만한 게 아니에요.”
그 대답으로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워졌기 때문에,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잔머리를 굴리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최악이라고 할 만큼 눈치 없는 소리를 뱉어내고야 말았다.
“클라크는 왜 찼습니까?”
“…….”
“아, 죄송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네요. 죽여주세요. 아니, 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겠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훗, 후하하하하하!!”
쪽팔려서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려버리는 그녀. 한동안 웃어대다가는 이내,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배를 붙잡고 허리를 숙여버렸다.
“아니,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후후후. 그런 걸 물어보려는 생각을 하나요? 후후훗. 정말이지 류안 소위는, 멋지게 보이다가도 엉뚱하기 이를 데 없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네요. 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뭐, 좋아요. 무겁다면 무거운 이야기지만 사실은 별 것도 아닌 이야기니까요. 클라크 일병과의 일이야 뭐, 그 분의 체면을 지켜드리기 위해서라도 자세히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단지, 그 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만 알려드릴게요.”
부담스럽다는 말에서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가끔씩은 나도 그 녀석을 죽여 버리는 게 좋지는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게 되니까.
처음 만났을 때의 소심함은 많이 사라졌고 잭의 훈련을 받으면서 부쩍 남자다워지기는 했지만, 부대 근처의 농가를 습격하는 멧돼지조차 사냥하지 못하면서 불쌍하다고, 놓아주자고 말하는 녀석이다.
어떻게 보면 군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인도주의자라고 볼 수가 있는 클라크.
오죽하면 면도날 잭의 훈련방식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웬만해서는 평정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잭이 흥분해서 그를 내다꽂아버렸을 정도다.
경위야 어쨌든 잭이 잘못을 저지른 게 맞았기 때문에 병문안을 하라고 보내자 들었다는 말이…….
[잭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훈련방식이 지나치게 가혹해서 나서기는 했지만 전부 필요해서 그랬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그러니까 잘못은 예전에 행보관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대안도 없이 끼어들은 제가 잘못한 겁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잭이 수십 년 동안 고집해 온 자신의 훈련법을 몇날며칠동안 고민하면서 보다 인도적으로 고쳤을 정도니, 자수성가를 위해서 많은 부조리와 타협해 온 제시카의 입장으로는 그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남자였는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만 했다.
그녀는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슈발츠 제국에서 도망쳐 온 난민 출신이에요.”
“…….”
갑작스러운 충격고백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그런 내 반응이 익숙했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
“슈발츠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사관학교에서 자주 들으셨을 거예요. 악마의 나라라느니, 낡아빠진 신분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라느니 비인도적인 노예제도라느니……하지만 실상은 그런 허울 좋은 이야기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잔인하죠. 그 나라에 살았던 건 기억하기도 어린 시절의 일이었지만 아직도 가끔 그 시절의 일을 악몽으로 떠올리고, 그 때 어머니에게 매일 물어보던 말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아무도 안 죽어?]
제시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슈발츠 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제페토 왕자와 일레느의 이야기에 나오는 수백 년 동안 아무런 다툼이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웠던 시절.
그 시절에 유라디스 은하를 지배한 건 바이스라고 불리는 다종족 연합왕국이다.
사람들은 그 시절의 바이스를 동화속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비록 기약 없이 평화로운 시대는 끝나버렸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과 기질들이 모든 종족들의 몸 구석구석과 관습으로 정착해 온 바이스 왕국은, 한동안 커다란 분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비교적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심연의 악마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공격해오기 전까지는…….
“심연의 악마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학살하고 다시 사라졌다고 해요. 그래서 바이스의 국민들은 빛을 숭배하고 어둠을 두려워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들은 빛을 꺼트리면서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로 숨어도 피할 수가 없다고 전해져요.”
바이스의 국왕은 기사단을 보내서 심연의 악마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누군가를 다치게 해 본 적이라고는 없는 나약하고 상냥한 기사단은, 단지 용기와 명예를 외치면서 대책없이 돌진하다가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바이스의 국왕은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기사단장 던켈을 불러서 은밀하게 지령을 내렸다.
[단장. 지금의 우리들은 도저히 적들을 당해낼 수가 없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밖에는 없어. 바로 저들을 연구하고 저들처럼 행동하면서 저들이 싸우는 방식을 학습해서 저들을 무찔러야만 하네.]
[하지만 저들의 방식은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승리를 위해서라지만 우리들이 그들처럼 변해야 한다면, 피 흘려서 평화를 쟁취한다고 그래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처럼 신의와 명예를 아는 사람들만이 이 일을 해줄 수 있다고 믿네. 우리가 과분하게 행복하던 시절을 보내기 이전, 미움과 증오가 가득하던 시대에는 이런 말이 존재했다고 그러지 않는가. Si vis pacem, para bellum.(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우리들은 지금 그 마음가짐을 배워야만 하네.]
국왕의 명령을 받은 던켈은 어쩔 수 없이 심연의 악마들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애썼다.
던켈은 기사단을 훈련시켜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심연의 악마들에게 맞서 싸우면서 전투를 벌였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기사단의 시체만 늘어나갈 뿐이었다.
그래서 그 패배의 원인을 곰곰이 분석한 결과 그는 국왕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는 없다. 바로, 그들과 결합하면서 우리들이 그들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던켈은 마법사들을 불러서 수많은 희생과 맞바꿔서 생포하는데 성공한 심연의 악마들과 기사단을 결합시키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새롭게 탄생한 전사들은 던켈의 의도대로 양심이 없었고, 누구보다도 잔인했으며, 용서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이었다.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 던켈과 기사단은 심연의 악마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전 유라디스 은하를 누비면서 세상의 끝까지 그들을 추격해 들어갔고, 그들이 원래 나타난 장소로 밀어 넣으면서 입구를 봉인하는데 성공했다.
바이스의 국왕과 국민들은 위풍당당하게 개선식을 거행하는 던켈과 기사단들을 성대한 환영식으로 맞이했지만, 돌아온 것은 찬탈과 학살이라는 배신의 칼날이었다.
수비대를 몰살시키고 국왕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 던켈은 차갑게 식어버린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Si vis pacem, para bellum.]
바이스 왕국의 시대가 끝나고 슈발츠 제국이 탄생하게 된 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