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62화 (6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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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최후의 승부 당일.

류안은 대전 상대로 선정된 팀을 제시카가 지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당했군.’

애들 싸움에 어른이 개입했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

아니나 다를까, 초청 강사가 적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팀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젠장, 치사하게 방위군의 에이스가…….”

“레베카도 감당하기 힘든데 이건 아니잖아!”

여기저기서 불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순진한 후보생들은 이어지는 그녀의 해명을 들으면서 봄날의 눈 녹듯이 기분을 풀어버렸다.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던 데다가, 젠틀한 미녀 강사로 인기가 높은 제시카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호감도가 워낙에 높았던 탓이다.

“이번 모의전은 성적에 반영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친선전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들에게는 제가 개인적으로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규군의 실전 방식을 가르쳐드리기 위한 수업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각자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승패에 연연하지 말라는 건 말 그대로 지는 게 당연하니까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소리.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긴, 성적에 반영되지 않으면 꼭 이기려고 애쓸 필요는 없잖아?”

그 말을 들은 팀원들은 이기는 걸 포기하고 지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납득하고 넘어갔지만, 류안은 그녀가 자신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본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대통령의 딸을 건드리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 식으로 경고를 날린 셈.

치사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류안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인정한다는 소리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사전에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전략적인 포석을 마련하는 거다.

순수하게 개인의 기량으로만 보면 제시카와 레베카 두 사람이 전부 덤벼온다고 해도 자신이 있는 류안이지만, 이런 식으로 팀원들의 사기가 꺾여버리면 아무리 그라도 고생을 할 게 뻔하다.

게다가 여러 가지 제한을 걸 수 있는 모의전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쉽게 봤다가는 큰코다치겠군.’

제시카의 조종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테러리스트 토벌전에서 돌입부대를 지휘하던 실력을 떠올려보면, 전술만으로는 자신과 호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레베카는 그보다 살짝 떨어지기는 하지만 역시나 만만치가 않은 건 마찬가지.

어떤 분야에서는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녀였기 때문에, 그동안 미니게임 몇 개를 낭비했는지도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레베카가 어쩌다가 이런 개입을 받아들이게 된 거지?’

표정을 보아하니 약간은 뚱한 눈치면서도 제시카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라서, 궁금증을 참지 못한 류안이 그녀에게로 다가가면서 질문을 던졌다.

“승부는 포기한 건가?”

“설마……단순하게 제시카 교관님의 말씀을 듣고 내 입장을 깨달았을 뿐이야. 만약에 이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해도 좋아. 나도 이런 식으로 승리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역시나 그녀가 손을 썼군.’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고집스럽던 레베카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제시카가 뛰어난 건 단순하게 전투능력만이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승부를 뒤로 미룰까하는 고민을 했던 류안이지만 그녀의 심경 변화를 생각해보면 최악의 경우에는 내기 자체가 유야무야 없었던 일로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그럴 수는 없지.’

일단 공략하기로 마음을 먹은 다음부터는 온갖 수단으로 그녀를 도발한 신후다.

성격만 보면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고 간이나 쓸개 구분 없이 모두 내줄 것 같은 그녀였지만, 겉멋으로만 똑똑한 게 아니었는지 넘어올 것 같으면서도 쉽사리 밸런스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신문 동아리의 폭주와 악성 찌라시의 살포, 성교 능력으로 매수한 여성들을 이용하는 악질적인 뒷 담화의 형성, 음험한 소문들과 댓글 조작, 시도 때도 없이 도발을 일삼는 것은 물론이며 사람이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인 일상의 짜증을 교묘하게 유도하면서, 온갖 비열한 수단으로 그녀의 감정을 조종해 온 류안이다.

그 노력과 집념은 이미 단순한 괴롭힘을 넘어서는 스토커의 수준.

아니, 스토커다.

‘내 레베카쨩을 이런 일로 포기할 수는 없다능. 하악하악.’

범죄자의 눈으로 레베카의 전신을 핥는 것처럼 위아래로 훑어본 신후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적시고는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의욕을 팀원들에게도 전달해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면 뒤진다.”

“!!”

“내 성격 알지? 방위군의 에이스건 나발이건 무슨 상관이야. 혹시라도 질 생각으로 대충 하는 새끼들은 두고두고 손봐줄 테니까 알아서들 해.”

“아, 알겠습니다!”

세상에는 법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보다는 가까운 몽둥이가 더 무서운 경우들이 많다.

이미, 악랄하기로 이름이 높은 범죄자출신의 병사들조차 설설 기어버리는 그의 장악력과 포스라는 것은 웬만한 범죄조직의 보스들을 뛰어넘는 것.

동기들과 친해지기는 이미 틀린 것 같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이 구역의 미친놈이라는 걸 보여주자는 식으로, 사관학교를 평정해버린 류안이기 때문에 생도들은 그를 호랑이 교관들보다도 더 두려워하면서 복종하고 있었다.

이미, 그런 호랑이 교관들조차 꼬리를 내려버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뭐 좋아. 제시카,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서 맞서주겠어. 안 그래도 레베카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 클라크도 차였겠다, 이참에 당신도 내 여자로 만들어버리겠어. 후후후후후.’

사악한 웃음을 터트리는 류안의 모습은 마치 마경의 마왕이 사관학교로 강림한 것 같은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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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불만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죠?]

[제시카 교관님이 해주신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레베카는 며칠 전에 특강의 청탁을 위해서 그녀를 만났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특강을 해주시는 대신에 제 승부에 개입하겠다는 말씀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거절하겠어요. 이건 제 자존심이 걸린 일생일대의 승부라고요! 아무리 제가 교관님을 존경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마세요!!”

제시카가 예상대로 그녀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그 반응에 조용히 차를 음미하면서 침착하게 입을 여는 그녀.

“그게 당신 혼자만의 인생이라면 이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뭐라고요?”

“레베카 생도! 당신이 한 인터뷰는 저도 읽어보고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정해진 레일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다는, 멋진 포부라고 생각하지만 그 레일조차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라는 말씀입니다.”

“…….”

레베카는 그 순간에 그녀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권력자의 인생이라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공화국 종신대통령의 딸이라는 위치에 계신 분께서, 한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면서 그런 터무니없는 약속을 하시다니요. 그 무슨 어린애 같은 행동입니까? 그 경솔한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봉변을 당할지를 생각해보신 적은 있습니까?”

“그건…….”

솔직하게 말하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라도 머리에 피가 몰리는 바람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다. 그렇다고는 해도 변명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레베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린애로 취급을 받고 싶지 않다면 먼저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세요! 당신의 행동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면서 그에 맞춰서 웃고, 우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세요. 그게 권력의 중심에 서는 사람이 취해야 하는 마음가짐이고 자세입니다. 그걸 단순하게 이를 닦거나 일찍 자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겁니다!”

“…….”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히는 말이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말을 이어나가는 제시카.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저 또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휘말린 사람들 중에 하나니까요. 저와 함께 팀을 짜시고,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고 대하는지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 정론에 완벽하게 할 말을 잃고 침몰해버린 레베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저는 승부를…….”

“아직까지 류안 생도와 하는 승부에 미련이 남으신 거라면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뭔가요?”

“만약 당신의 라이벌이 류안 생도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헨드릭 황제였다고 그래도 지금처럼 승부에 집착하실 건가요?”

헨드릭 황제.

슈발츠 제국의 소년병 출신으로 수많은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키워진 전쟁이 창조해 낸 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자력으로 좁디좁은 출세의 바늘구멍을 몇 번이나 양손으로 찢어발기면서 열어젖혔던 시대 전체의 혁명이나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단어에 한정해서는 그에게 아무리 많은 찬사를 보낸다고 해도 모자랄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 분야에서는 그를 뛰어넘을 수 있어도 종합적으로는 아무도 그를 넘어설 수 없었다고 알려진 인물.

“헨드릭 황제가 상대라면 저도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그는 헨드릭 황제가 아니잖아요!”

“만약에 그가 헨드릭 황제와 비견할만한 인물이라면 어떻습니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가…….”

“정말로 그렇게 장담하시나요?”

“…….”

이미 한 차례의 침몰을 경험한 이후였기 때문에 확신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제시카는 자신이 경험한 테러리스트 토벌전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그럴 수가…….”

크라이프와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그는 자신보다 2등급이나 높은 마장기, 그것도 우주군 출신의 파일럿을 농락하면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런 그가, 같은 등급을 가지고 있는 마장기전에서 만에 하나라도 당신에게 패배할거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는 지금까지 장난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지 않습니까? 그가 왜 그런……서, 설마!”

입장을 자각하라는 이야기의 맥락으로 봤을 때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었다.

권력다툼.

“바로 그 설마입니다, 레베카 생도. 그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당신을 노리고 있는 게 틀림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의 후견인인 길로틴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로 흥분했던 레베카는 그 충격적인 사실에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 말이 이런 의미였던가.

그녀 또한 자신의 아버지인 바키가 길로틴 일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여파가 다가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류안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철저하게 농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현실.

사실은 순전히 성욕으로 비롯된 사건이고 오해였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런 이해관계가 깔려져 있다고 오해를 사도 어쩔 수가 없는 절묘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셨으면 지금부터라도 모의전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협조해주세요.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싶으면 가장 먼저,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

자신이 꺼냈던 말이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상황이라서 레베카는 고개를 떨어트리면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제시카 교관님!]

[기대하고 있어요.]

며칠 사이에 친자매처럼 완전히 의기투합한 두 여성은 공공의 적 류안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힘을 합치게 되었다. 그의 앞에서는 다소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것은 팀내에 불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그의 방심을 유도해내기 위한 연기.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필승의 전략을 고안해 낸 두 여성은 힙을 합쳐서 그를 쓰러트리자고 양손을 굳게 마주잡았다.

‘두고 보자, 류안! 지금까지 겪은 수모는 제시카 교관님과 함께 이번 모의전에서 반드시 갚아 주고야 말겠어. 감히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아버님까지 건드리려고 해? 이번 기회에 이 레베카 펠리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알려주고야 말겠어!’

‘류안 소위. 당신이 어떤 세력에 가담한다고 그래도 저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 모의전은 제가 당신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자그마한 보답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고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바키 대통령의 딸을 건드린다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저는, 그런 비열한 음모에 휘말려서 당신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류안 역시 자신의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제시카와 레베카의 투카스 덮밥이라……으음, 두 사람을 동시에 건드렸다는 걸 탈리아가 알면 사단이 날 텐데.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레드 폭스랑 애니를 건드린 걸 눈치를 챈 것 같다는 말이야. 영상통화를 할 때의 반응이 유난히 차가웠는데 혹시 무슨 일 있나……그나저나 얼마 전에 꼬신 여자 생도는 탄력이 끝내줬는데 말이야. 시합 시작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한 판 정도는 뛰어도 괜찮을 것…….’

물론, 누구나가 다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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