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61화 (6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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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크라이프는 게시판에 새로운 외부강사를 초빙했다는 공지를 걸어놓고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녀가 제시카를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건 우연이다.

대통령의 딸이면서도 공화국 최고의 재녀로 소문난 레베카는 어린 시절부터 영재교육을 받아서 연극, 무용, 스포츠. 승마, 모델, 회화 등등. 다양한 분야에 활약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그녀가 우주군이 아니라 방위군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공화국 출신이면 연맹이 아니라, 공화국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대중들이 좋아한다는 제멋대로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타의에 의해서 시작한 일이라도,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노력가라서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해버리는가 하면, 지난 1년 동안에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한 여성잡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롤 모델로 삼는 인물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제시카다.

[다른 훌륭한 여성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았죠? 제가 알기로는 레베카양은 이미 그녀가 사관학교에서 받은 성적들을 뛰어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여자 언론인의 질문에 레베카는 주저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제 성적은 아버지가 준비한 레일을 달리면서 얻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단지 교통신호를 지켰고, 규정된 속도로 달렸을 뿐이죠. 어떤 사람이 매일 양치질을 하거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고 칭찬을 받는다면 그 사람을 어린애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전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지금은 아버님과 가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레일 위를 달리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거예요. 바로, 제가 존경하는 그 분처럼!]

제시카는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 지독하게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가온공화국에서는 레베카의 표현대로 그런 삶을 쟁취하는 여성들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그녀의 동경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인터뷰를 탐탁지 않게 여긴 바키가 곧바로 잡지사로 압력을 보내는 바람에 그 기사는 정정기사를 내면서 삭제되어버렸고, 그 이후로 레베카에게 롤 모델을 물어오는 기자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이프가 그런 인터뷰의 내용을 떠올릴 수가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시카가 이 사관학교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도 한 사람의 교관으로 장교후보생들을 직접 교육시켰기 때문에 후보생들 가운데서는 단연 두각을 드러내었던 그녀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인터뷰의 기사를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얼핏 흘려들었던 내용들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애매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들에 의존하는 내용이라서 한편으로는 레베카가 반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런 공지를 발견하자마자 학원장실로 쳐들어왔다.

‘여기가 무슨 화장실이야? 급하면 들락날락걸리게.’

심기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크라이프는 짐짓 태연한 척 자상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레베카 생도.”

“제시카 중령님이 외부강사로 오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정확하게 물었군.’

찌가 깊숙하게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한 노련한 낚시꾼의 심정으로 크라이프는 일단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낚싯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교무회의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지. 분명히 일반 장교후보생들의 마장기 훈련의 특별강사로 초빙한 것 같은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가?”

“그 분의 특강을 듣고 싶습니다!”

“으음, 그건 조금 곤란한데.”

“학교장님!”

레베카는 그렇게 외치면서 통신 단말을 꺼내 보인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단축키를 눌러버릴 기세. 대어의 저항이 격렬하다는 것을 느낀 크라이프는 뭐처럼의 손맛을 만끽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줄을 풀어나갔다.

“아, 아니 그게 말이야. 하필이면 특강이 부사관 출신의 장교후보생들의 교육시간에 겹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네. 그 교육을 빠지고 듣겠다면 상관은 없지만 자네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않는가?”

최후의 승부니 뭐니 떠들어대고서도 매 시간마다 모든 방식으로 류안과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요즘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수업을 참가하고 있었다.

“특강만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 동안 외부초청강사로 일하신다는 내용을 봤어요! 그러니까 그 기간 동안에 부사관 출신의 장교후보생들에게도 특강을 해주시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녀의 강의 스케쥴은 교무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내용이네. 이미 공문서까지 작성한 마당에 갑자기 강의를 늘려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려면 또다시 교무회의도 열고, 그녀와 다시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든 해달라는 거잖아요!”

통신 단말로 다가가는 검지를 본 크라이프가 속으로 외쳤다.

‘젠장!’

맛있는 미끼만 뜯어가려고 발버둥치는 대어의 폭거에 크라이프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내고 말았다. 제일 좋은 건 제시카를 미끼로 그녀가 일반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거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그랬다가는 정말로 다 잡은 고기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내가 아니라 자네가 직접 부탁을 해보는 건 어떻겠나?”

“제가요?”

“그래. 듣자하니 제시카 중령은 의욕이 넘치는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럽다고 그러더군. 그러니 학원장인 내가 염치없이 강의시간을 늘려버리는 것보다는, 자네가 직접 교섭을 하는 편이 아무래도 그림이 좋지 않겠나? 일단, 그녀에게 허락만 받아낼 수 있다면 세부적인 문제들은 내가 재량껏 해결해 보겠네, 어떤가? 원한다면 자리도 주선해줄 수 있는데…….”

“…….”

레베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도록 하죠!”

대어를 낚아채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헛손질이 아니라는 사실은 깨달았기 때문에 크라이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가 잘 해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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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제시카를 초청한 크라이프는 다짜고짜 고개를 숙이면서 외쳤다.

“이 말괄량이를 제발 좀 어떻게든 해 주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상당히 놀란 눈초리로 눈동자를 깜빡거리던 그녀. 이내 무언가의 사연이 있음을 눈치 채고는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진정하시고 사정부터 먼저 이야기해 주세요.”

“그러니까 말이지…….”

크라이프는 신세한탄을 하는 사람처럼 주저리주저리 최근에 있었던 사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통령의 딸이 승부에 눈이 멀어서 터무니없는 내기를 하게 되었고, 덕분에 자신이 어떤 추궁을 당할지 모른다는 소리다.

그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내용이었지만 팬티를 걸었다는 내기는 사춘기의 아이들이 사랑싸움을 하면서나 나올 법한 유치한 것이라서, 제시카는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푸풋, 큽. 그, 그렇군요. 류안 소위가 그런……확실히 그라면 공화국 최고의 재녀라도 당해내기 어렵겠죠..”

“류안 생도를 알고 있나?”

“예전에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시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테러리스트를 토벌할 때 류안이 보여주었던 활약에 대해서 짤막하게 설명을 했다.

“쟈칼로……타이거를 격파했다고?”

“네. 저와 함께 소대의 병사들이 만든 함정으로 마무리를 짓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 혼자서 해낸 일이나 마찬가지에요. 그것도 전직 우주군 출신의 용병을 상대로 그렇게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죠. 방위군 상부에서는 갑작스럽게 개혁이다 뭐가 그러면서 인사개편을 하느라 제대로 평가를 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렸지만, 사실은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주고 매스컴에서 난리를 쳐야 정상인 사건이었어요. 어쨌든 그 헨드릭 황제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럴 수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류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인구가 늘어나고 기억하기도 힘든 수많은 영웅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라고 해도, 뛰어난 업적을 이뤄낸 사람의 이름은 반드시 회자되게 되는 법.

유라디스 은하에서는 가장 유명한 헨드릭 황제의 일화만 살펴보더라도 그가 역사상 처음으로 은하를 통일할 뻔 했다는 업적을 제외하고도, 그가 수립한 수많은 기록들은 끊임없이 회자되면서 평가의 잣대로 사용되어 왔다.

그 기록들이 하나같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비범하기 때문에, 제국에서는 물론이고 연맹에서도 그를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

하물며 독립을 쟁취하기 전까지는 제국에게 굴욕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온 연맹의 사람들에게는 헨드릭 황제가 세운 기록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회적인 콤플렉스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그가 세운 기록에 근접하거나 갱신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연맹 전체가 신성의 등장이니 영웅의 탄생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어대는 게 일반적인 일.

도가 지나쳐서 일부러 꾸며낸 기록을 만들어서 자신을 선전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 류안처럼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 유명해지지 못한 건 상층부의 누군가가 그 정보가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덕분에 크라이프의 표정도 한층 심각해지고 말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큰일이군.”

“왜 그러시죠?”

“두 사람의 마지막 승부가 다름 아닌 마장기 모의전이네. 그것도 실재 재규어를 타고 5대 5로 팀전을 하는 방식이지. 지금까지는 두 사람의 기록이 크게 차이가 없어서 팀원만 잘 선별해도 레베카 생도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게 되는군요.”

제시카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확인해 본 레베카 소위의 실력이라면 교관으로서 가르쳐 줄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류안 소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면……100번 싸워도 100번 다 일방적으로 패배할지도 몰라요. 단순히 마장기전만이 아니라, 어쩌면 용병술로 싸운다고 해도 말이죠.”

“그 정도인가?”

크라이프는 경악하고 말았다.

사관학교시절부터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제시카의 용병술.

좋게 말하면 기본에 충실한 교과서적인 전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틀에 박힌 방식이지만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단단함으로, 그녀만이 가능하다고 전해지는 재빠른 상황판단과 정확한 대처능력으로 온갖 기교들을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용병술을 발휘하면서 용맹을 떨쳤다.

덕분에 그녀가 리더를 맡은 팀이 다른 생도들이 구성한 팀에게 패배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교관들로만 이루어진 팀조차 그녀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고생을 겪어야 했다.

오죽하면 그녀가 패배한 이유가 용병술의 문제가 아니라 적게는 몇 년에서 수십 년에 이르는 연륜과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팀원 개개인들의 기량이 밀린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급기야 그녀가 졸업하기 전에는 교관들조차 함부로 대전신청을 하지 못했고, 생도들은 그녀의 용병술에 반박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기책을 연구하기 위해서 실시한다는 토론장에서조차“기본에 충실한 교과서적인 전술운용만이 모든 기책을 제압해나간다.”라는 틀에 박힌 결론으로 토론을 마무리하는, 말 그대로 제시카 한 사람의 용병술에 사관학교 전체가 주눅 들어버리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다.

학생 시절에만 해도 그런 수준이었는데 수많은 실전을 통해서 섬세하게 다듬어진 지금의 수준은 과연 어떨까, 교관 시절에도 그녀를 두려워하던 크라이프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일개 생도를 상대로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하다니…….

“레베카 생도를 설득해 주십시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어보였다.

“고개를 들어주세요. 은사님께서 옛 제자에게 그렇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씀도 놓아주세요.”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아무리 저라도 그녀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저 또한 그녀가 저를 롤 모델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녀가 제 말을 듣고 자존심을 꺾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그렇다면 정말로 방법이 없다는 건가?”

“아니요. 딱 하나. 어쩌면 실낱같은 가능성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대통령의 영애께서 창피를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뭔가?!”

해결 방법이 있다는 말에 크라이프는 눈동자를 빛내면서 물었다.

제시카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잠시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그녀가 힘을 합쳐서 함께 류안을 쓰러트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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