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45화 (4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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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결국 탈리아와 거사를 치르는 데 실패한 나는 VR네트워크로 접속해 레드폭스와 놀기로 결심했다.

전생의 나만큼은 아니어도 벤틀리나 그녀 둘 다 만만치 않은 게임 중독자라서, 아니나 다를까 게임에 정신이 팔려 음성채팅이 겨진 것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후-!!! YEAH보셨나? 머저리들아! 이 몸께서 트리플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승급하셨다는 말씀이다. 고개를 조아리거라, 브론즈 천민 새끼들아!!]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벤틀리랑 판박이냐.’

문득, 그녀에게도 폭력성이 존재할까 궁금해졌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해?”

내 말에 조그마하고 귀여운 붉은색 여우 아바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녀가 대답해 왔다.

[아, 대장님! 바운티 독스라는 게임을 하고 있는데 한 번 해보실래요?]

참고로 계약을 한 지 조금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고용주라는 표현 대신에 대장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재밌어?”

[뭐, 그냥저냥 시간 때우기로는 할 만합니다. 원래는 메인 시나리오가 있는 싱글 게임인데 온라인 대전을 워낙 재미있게 잘 만들어놨더라고요. 덕분에 한……3456시간 정도는 즐기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시간을 때우는 수준이 아닌데?’

보통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싱글 시나리오의 게임의 플레이시간은 길어봤자 1~20시간.

정말로 짧은 건 1~20분만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도 많지만 보통은 5~6시간정도로 끝나는 것이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볼륨이라고 한다.

물론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새로운 재미가 넘쳐나는 게임은 엿가락처럼 플레이시간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보통 즐길 수 있는 걸 전부 즐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5~60시간이고 그 이상을 넘어가면 헤비하다.

유저들이 그 이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 게임은 대부분 사교활동이나 경쟁을 목적으로 하는 온라인 게임이 대부분이다.

‘아니, 그래도 3456시간이라니…….’

호기심이 생긴 나는 온라인 상점에서 바운티 독스를 구입하고는 레드폭스와 팀을 짜고 플레이에 참가해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스탑! 스탑……잠깐만요 대장님!]

“한참 즐기는 데 왜 그래?”

대전 상대를 학살하던 나는 그녀의 제지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 아니……혹시 이 게임 언제 플레이 해 보신 적 있어요?]

“오늘 처음인데?”

[그거야 계정 기록 확인해보니까 나오기는 하는데……아, 안되겠습니다. 지금 관리자가 신고 받고 출동했거든요? 죄송하지만 저는 뒤처리 좀 하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레드폭스는 분주하게 로그아웃을 해버렸고 나 또한 신고가 들어왔다는 메시지를 받으면서, 갑작스러운 계정조사를 받게 되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실력이었으니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치트를 사용했을 데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무혐의 처분. 아마도, 과거의 게임 기록들에 뭔가 조치를 취했을 거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게임을 즐기는 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쪽지와 함께 소량의 캐시 아이템이 보관함으로 들어왔지만, 다시 돌아온 그녀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

“그러면 다시 시작해볼까?”

[어……생각해봤는데 바운티 독스는 슬슬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대신에 다른 게임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바운티 독스가 제법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이쪽 세계의 다른 게임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가 추천해주는 새로운 게임을 플레이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몇 판을 플레이하기가 무섭게, 스탑을 외쳐버리는 그녀 때문에 번번이 그만두고 말았다. 하나같이 모두 재미있는 게임들이었고, 새로운 게임을 살 때마다 들어가는 돈돈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에 짜증을 참지 못한 내가 버럭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 왜 자꾸 그만두라는 건데!!”

[이게 다 대장님 때문이잖아요! 세상에 어떤 초보가 랭커들을 썰고 다녀요? 게다가 쟤들 대부분이 치트 플레이어들인데……저런 새끼들 성격 몰라요? 지들은 비겁하게 플레이해도, 남이 수상하면 관리자들한테 신고부터 하는 새끼들이라고요!! 덕분에 매번 저까지 같이 덤터기를 쓰잖아요!!]

“그, 그거야 지는 건 싫으니까……아니, 그 이전에 너도 처음에는 좋다고 꺅꺅 소리를 질렀잖아! 오빠 달리라며!!”

[그, 그거야 처음에는 물론 좋았죠. 그런데 이게 너무 쉽게 이기다보니까 점점 재미가……아무튼 적당히 좀 져주기도 하시라고요! 게임은 좀 지는 맛도 있어야…….]

“내가 왜?”

[…….]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는 그녀를 향해서 전생에 팬들이 만들어 준 캐치프레이즈를 선전해 주었다.

“올마이티라는 이름 앞에서 패배란 단어는 없다!!”

[에이 씨…….]

그 말에 욕지거리를 뱉어내고야 마는 레드폭스.

아닌 게 아니라 내 실력이 궁금했는지 1대 1 대전을 신청해오는 그녀를 무참하게 때려눕혔는데, 그 중간 중간에 은근슬쩍 치트 플레이를 사용하는 모습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더욱 더 의기양양해지고 있었다.

벤틀리에 비하면 훨씬 어른스러운 태도라고는 해도 그녀도 기본적으로는 게임폐인인 만큼, 승부사의 기질과 함께 초딩의 입담을 탑재하고 있는 어른아이.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고 할 수가 있다.

사실은 나도 처음에는 도전자들의 플레이를 조금 더 여유 있게 관찰하자는 생각으로, 조금씩 져주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즐기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레드폭스가 소개해주는 게임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랭커로 활약하고 있는 게임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런 그녀가 초짜를 달고 나타났으니 이때다 싶었는지 그녀의 친구로 추측되는 랭커들이 무더기로 도전 신청을 해왔다.

그러면서 유치한 욕설을 퍼붓거나 부모님의 안부를 물어보는 도발을 일삼았기 때문에 져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면서, 문답무용으로 때려눕히기 시작한 것이 무패의 행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기세를 타기 시작하자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이쪽 세계에서 무패 전설을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현재의 상황으로 이르게 되었다는 거다.

덕분에 각종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레드폭스가 터무니없는 치트 플레이어를 데리고 왔다고 난리도 아닌 상태. 내 게임 플레이 영상들이 돌아다니면서, 전문가들에게 조작인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웃기는 건 그런 내용들의 절반은 레드폭스에 대한 욕이라는 사실.

“평소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아, 아니. 게임을 하다 보면 가끔씩은 치트를 쓰고 싶은 유혹이 들잖아요. 재수 없는 놈들을 밟아주고 싶다거나……그래도 저는 양호한 편이라고요? 게다가 요즘 인기 있는 게임들은 관리자들이 크랙킹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하는 데요! 아무리 제가 천재 미소녀 해커라고 그래도 그렇게 쉽게 뚫어버리는 건…….]

“한 마디로 실력부족이라는 소리네. 범죄를 저지르려면 좀 안 들키게 저지르던가……저게, 뭐야? 다들 레드폭스, 레드폭스.”

[으르렁.]

내 도발에 으르렁거리는 그녀.

나한테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분을 삭이면서 씩씩거리던 그녀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이 가만히 있다가 크게 결심을 했다는 듯이 다시 음성채팅으로 돌아왔다.

[좋습니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제 진짜 실력을 보여드리죠. 제가 진짜 이렇게까지는 안하려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레드 클리프라는 게임을 받아주세요. 이번에는 제가 돈을 낼 테니까…….]

“그러지 뭐.”

게임을 사준다는 말에 냉큼 수락한 나는 그녀의 인도를 따라서 검색엔진으로 레드 클리프라는 단어를 쳤다. 대분류로 게임에 한정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홈페이지들의 주소들이 주르르륵 튀어나오는 가운데, 한참 동안이나 스크롤을 내리고 난 이후에야 그녀가 말하는 게임의 홈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이트를 클릭하는 순간부터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지지지직-.

갑자기 화면이 노이즈로 뒤덮이면서 기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VR머신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뭐야 이거?”

[평범하게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렇구나. 바이러스……뭐?”

[곧바로 제거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VR머신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시야가 회복되자, 혼돈의 카오스와도 같은 기묘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여기는?”

[학교에요.]

“학교?”

조그마한 오픈 미니월드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홈페이지는 자유분방해도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모습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형태를 한 기호들과, 그래피티로 얼룩진 글씨들이 원래는 홈페이지의 공지나 게시물들이 걸려 있었다고 짐작되는 장소들을 뒤덮고 있다.

그 속에서 온갖 기괴한 아바타의 모습을 하고는 카운터에서 멍한 표정으로 죽치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레드 폭스를 발견하자, 우르르 몰려들었다.

[YEAH~!! 레드폭스 비치 누님이 돌아오셨다!!]

[꺼져 폐인 새끼들아. 지금 손님 상대하느라고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와!]

[손님이라는 게 누군데. 혹시 저번처럼 제자라도 들인 거야? 어, 방위군이네…….]

[야, 내가 처음 보는 사람 신상 터는 습관 고치라고 했지! 콱, 성적표 조작한 거 아주머니한테 불어버린다!!]

[아, 알았어. 알았어. 그날인가 왜 이렇게 까칠해…….]

그녀의 기세에 밀린 아바타들이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면서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인가 봐?”

[지긋지긋한 인연들이죠. 뭐, 해커라는 애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도대체 여기는 뭐하는 데야?”

[원래는 레드 클리프라는 게임의 홈페이지인데……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회사 자체는 망해버렸고 서버만 남겨져서 유지하고 있는 장소라고 보시면 되요. 관리는 쟤들이 하고 있고요. 주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사람은 우리들이 교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워낙에 괴짜 같은 사람이라서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해커들의 커뮤니티인가?’

단순한 커뮤니티라고 보기에는 스케일이 조금 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면 쟤들은 전부 해커인 거야?”

[해커라고는 그래도 새까만 햇병아리들이죠. 학생이라고……저런 식으로 서버를 관리하면서 공부를 하는 애들이에요. 한 때는 벤틀리도 저 자리에 앉아있었죠.]

썩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녀석의 표정이 떠오르는 바람에 실소를 하고 말았다.

“알았어. 한 마디로 여기가 네 집이라는 거지? 그나저나, 이래서야 게임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잡혀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이래보여도 정식으로 사업자등록까지 한 회사라고요. 비록, 신규유저의 진입장벽이 지나치게 높은 게 탈이기는 하지만……그리고,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 집단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정부라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치는 장소라고요!]

그녀의 호언장담에서 나는 전생에 존재하던 초법적인 해커집단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나니머스.

익명이라는 뜻을 가진 그들은 온갖 크랙킹 기술들을 사용해서 전 세계의 다양한 집단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다녔는데, 실재로 온갖 기관들에게 디도스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일망타진되었던 적이 없다고 알려진 이들이다.

이 학교라고 불리는 장소는 어나니머스에 비교하면 규모는 작았지만 상당수의 해커들이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혀져있고, 공화국 최고의 화이트해커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장소라는 것이 레드폭스의 설명이다.

‘나중에 쓸 데가 있겠는데?’

좋은 정보를 알게 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나저나 실력을 보여준다면서 언제 보여줄 거야?”

[흥! 잠깐만 기다리세요. 잘난척하는 것도 지금뿐이니까요…….]

콧방귀를 뀐 그녀는 귀여운 붉은 여우 아바타의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카운터로 걸어가더니, 무엇인가를 분주하게 조작하면서 오브젝트를 뒤덮고 있는 이상한 문자들을 광속으로 걷어내었다.

[3.5초라……나도 아직은 죽지 않았네.]

“뭐하는 건데?”

[일종의 퍼즐을 푸는 거예요. 실수하면 VR머신이 박살나요.]

“…….”

왜 게임을 다운받는 장소에 그런 걸 설치 하냐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라는 생각에 깊이 개입하는 건 피하기로 했다.

잠시 후.

그녀의 인도에 따라서 게임을 설치하자 타이틀 그대로의 광활한 모래사장과 파도, 남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는 필드가 눈앞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내 눈앞으로 걸어오는 수영복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

“레드폭스?”

[휴, 여기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네……그나저나 왜 그렇게 멀뚱히 쳐다보는……꺄악! 이게 뭐야? 내 아바타가 왜……교장!!!!]

비키니 차림으로 맨살이 드러나는 자신의 몸을 허둥지둥 가리면서(평소의 차림과 별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그녀는 허공을 향해서 분노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들려오는 대답.

[오랜만이야. 레드 폭스! 학창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니까 기분이 어때? 몸도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젊거든요! 별꼴이야, 정말! 아오 진짜. 이래서 덕후들이랑은 인연을 맺으면 안 되는 건데…….]

“누구십니까?”

[아,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손님. 그냥 집 나간 딸내미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남자를 데리고 왔다고 그러니까 궁금해서요.]

“부모님?”

남자인지 여성인지를 알 수가 없게 변조된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했더니, 레드폭스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반박해왔다.

[아니거든요! 예전에 저를 가르쳐 준 마스터인데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가끔씩은 꼭 저런 식으로 노망을 떨어요. 이제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남세스러워서 정말…….]

[이거 서운한데. 내가 우리 귀요미의 어부바를 해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교장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만세를 외쳤다.

'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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