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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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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기 전에 홀슈타인씨와 부대 식자재 납품에 대한 계약을 체결한 나는 군용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전자 신문을 펼쳤다.
“그래서 벤틀리를 팔아넘기고 왔다는 거야?”
벤치프레스의 바벨을 내려놓으면서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는 탈리아. 그녀는 현재 붉은색의 스포츠브라와 힙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정색 타이즈 바지를 입고 있다.
“팔아넘긴 거 아니야. 3년 동안 인성교육을 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돈 받았다며?”
“그게 다 벤틀리한테 묶여져있는 돈이야. 내가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나중에 사용한 돈에서 추가로 내 생돈을 위약금으로 얹어서 주는 게 계약서에 써져 있어.”
만나자마자 노예라느니 어쩌니 농담을 하기는 했지만 조사해 본 결과에 따르면 홀슈타인씨는 정말로 믿을만한 한우, 아니 워낭족이다.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한 탈리아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이번에는 샌드백으로 다가가서 격투기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경호원으로 쓴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내 옆에 있으라는 의사 표시에 불과했는데, 탈리아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그 임무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는지 선글라스에 검은색의 방탄 슈츠까지 구입해버렸다.
‘조만간 경호원 차림으로 즐기는 것도 괜찮겠군.’
미리 알았으면 루비아이 부티크에 의뢰해서 조그마한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해 놨을 텐데, 그 날 호되게 당한 이후부터는 내가 건드린 옷에 대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 그녀다.
젠장.
쿵! 쿵! 쿵! 쿵!
샌드백에 발차기를 날리는 탈리아의 몸매를 슬쩍슬쩍 감상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전자 신문을 펼치면서 주목할 만한 사건의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현재 날짜는 연맹력 532년. 11월 20일.
크로이츠 법국의 이단추심으로 걸프당 의원 6명이 호프만에게 세뇌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길로틴은 헌병대원들을 이끌고 이들의 신병을 구속하는 한편, 자택과 사무실을 급습하면서 정재계의 고위인사들이 각종 청탁과 비리에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비밀장부를 손에 넣는다.
세간에서는 샛별회 게이트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비리에 관련되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게 되지만, 정작 헌병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장부의 명단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치인들과 거래를 주고받은 게 아니냐는 비난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다.
정적들을 아예 손도 쓰지 못하게 끝내버릴 수 있는 무기를 가졌다면 모를까, 그들이 루퍼트 의원을 끝장낼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혹시라도 정적들이 너 죽고 나 죽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오면 그것이야말로 낭패가 따로 없는 일.
그래서 적절한 수준에서 공격을 멈춘 길로틴은 나머지 명단의 이름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바키와 그 일파들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거다.
그 결과, 루퍼트는 새로운 걸프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방위군도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하게 되었다.
각종 방산비리와 군납비리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 전력운용의 유연화를 위한 계급간 이동의 간편화, 군 전력 강화와 낙후된 병기의 현대화, 월급 책정에 관한 문제 전반, 등등.
지금까지의 방위군이 동네 양아치들 수준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웬만큼 싸울 수 있는 수준의 군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낸 셈이다.
이번 개혁으로 방위군에게 투자한 자금은 1.2플렌티온
골드로 환산하면 120억 골드고 전생의 기준으로 보면 1경 2천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자된 셈이다. 참고로 플렌티온이라는 표기는 평범한 행성 하나의 가치를 표현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썩어도 준치라고 빚더미에 시달리는 나라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자금동원력이군.’
약 2천만에 이르는 방위군 전체를 한 번에 개혁하려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견적이 나오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군대가 얼마나 많은 돈을 잡아먹는 괴물인지를 실감하게 만드는 액수였지만, 동시에 저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해오는 우주군의 뻔뻔함에는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부러운 놈들.’
훅! 훅! 훅! 훅! 치익, 칙!
탈리아는 이제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서 쉐도우 복싱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마지막 소리는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손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유념해야만 한다. 안 그러고 왜 입에서 소리를 내냐고 물어보면 혼난다.
트레이닝복은 점점 더 젖어 들어가고 음란함도 점점 더 가중되어 갔지만, 트레이닝을 방해하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기 때문에 지금은 건드리면 안 된다.
기다려야 한다.
‘스테이, 흑염룡, 스테이.’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기사의 내용은 방위군 최강의 기사, 율리안 소장이 이번 행성점령전에서 마장기 부대의 총지휘를 맡는 돌격대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다.
방위군의 자존심이자 최후의 보루라고까지 불리는 그.
겨우 20대 중반에 불과한 백발의 미청년인 율리안은 높은 지위와 미혼이라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공화국 여성들의 구애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이돌 같은 존재다. 문제는 루치아가 워커홀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무적이고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서, 아직까지도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숫총각이라는 것.
덕분에 시크한 매력이 있다느니 얼음왕자라느니 하는 변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단지 외모를 낭비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불쌍한 녀석.’
어떤 부류의 비공식적인 팬클럽에는 100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가입하고 있다고 안다.
문제는 그녀들 대부분이 부녀자라서 그를 자신들의 창작물 속에서는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마성의 게이로 표현하고 있다고 사실.
참고로 유명한 커플링은 길로리안 = 길로틴과 율리안 커플이라고 한다. 가끔씩은 리버스도 된다고…….
‘후덜덜.’
무서운 상상을 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털어버리고는 다시 한 번 율리안이라는 인물의 평가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그는 오직 4가지 패턴의 말로만 대화를 한다.
첫째.
“이것을 실행해야만 하는 이유를 보고서로 작성해 주게.”
둘째.
“검토해보겠네.”
셋째. 보고서를 받아들일 경우.
“합리적으로 보이는군. 실행하도록 하지.”
넷째. 보고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실행하기에는 문제가 있군. 다시 써오게.”
농담으로 보이겠지만 율리안이 하는 말의 패턴은 정말로 이게 전부다. 사담은 일절 허락하지하고, 상관이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반드시 그 이유와 목적을 육하원칙에 의거하는 정확한 명령문을 작성해줘야만 비로소 몸을 움직인다.
식사를 하러 가자고 권유해도 무슨 음식을 먹으러 갈 건지 보고서로 제출하라고 말하고,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어봐도 어떻게 지냈으면 좋겠는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받아들인 보고서는 대략 5~6번 정도 왼쪽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순식간에 사악 하면서 훑어보는데, 속독으로 내용의 요점들을 파악하고 재검토하는 그만의 방식이라고 한다.
시시각각 전황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도 누군가 작전을 바꿔야 한다고 제안하면, 그 이유를 반드시 어느 정도의 형식을 갖추는 보고서로 보여줘야만 했다.
그래서 시스템 개발자들은 아예 그 휘하의 부하들이 조종하는 마장기로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빠르게 문장을 구성할 수 있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해 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이 전쟁터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그만큼 무시무시한 전투능력과, 작전에 대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작전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루치아도 그런 전투능력에 혹해서 율리안을 찾아갔지만 관사 앞에서 헌병들에게 가로막히면서, “찾아온 목적과 이유를 작성해서 제출하셔야 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도 “발정기를 가라앉히고 싶은데 절 좀 쓰러트려서 기절시키고 강간해주면 안 될까요?”를 방문 목적으로 써서 제출했더니 한 줄도 안 되는 답신이 도착했다고 한다.
[시간낭비로 보이는군. 다시 써오게.]
‘이런 미친년놈들.’
오는 여자를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걷어차는 율리안도 율리안이지만, 루치아도 만만치 않게 미친년이다. 더 가관인 건 두 사람의 러브레터 같지 않은 러브레터 전쟁이 한동안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는 것.
그런 막무가내의 요청을 계속해서 상대해주는 율리안도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는 원칙주의자였다.
결국 먼저 지쳐서 떨어져나간 사람은 루치아.
막무가내로 돌입해 들어갔다가는 가온공화국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릴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라서, 아무리 싸움에 미친 루치아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한없이 무뚝뚝하고 인간미가 없는 기계처럼 행동하는 게 율리안이라는 인물이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상의 왼쪽 주머니에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개구리 인형 키홀더가 매달려 있다.
그 물건은 어느 날 그가 방위군 홍보의 일환으로 농아들이 모인 고아원에 방문했을 때 한 소녀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원장님의 손을 붙잡고 나타난 그 소녀는 언어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스케치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율리안 아저씨, 이 키홀더를 달고 다녀주시면 안 될까요?]
방위군의 고아원 방문을 촬영하던 기자들은 그 모습이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평범한 정치인들이라면 이 경우에 주변의 눈치를 봐서라도 키홀더를 받아들이면서 고맙다는 대답을 해야 정상이지만, 율리안은 철저하게 자신의 패턴을 지켰다.
“내가 이걸 달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뭐지?”
소녀는 대답 대신에 스케치북을 넘겼다.
[표정이 너무 딱딱해서 무서워요. 로티를 데리고 다니신다면 훨씬 귀여워지실 거예요.]
방위군 관계자들은 율리안이 육하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그 요청을 거절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자들의 취재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가 꺼낸 말은 정 반대.
“합리적으로 보이는군. 즉시 실행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이후로는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키홀더를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공식석상에 참가할 때나 사적인 외출을 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철저한 원칙주의 밑바탕에는 휴머니스트적인 면모가 숨어있다는 걸까.’
그 사건으로 율리안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오른다. 몇몇 정치인들이 그를 흉내 내기 위해서 같은 개구리 인형을 차고 다니다가 오히려 빈축을 샀고, 그에 비해서 율리안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그와 만나는 순간에만 같은 인형을 달고 나오는 사람들의 지지도는 올라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타산적으로 보이지 않는 미담에 열광한다는 걸 증명해 낸 셈이다.
길로틴이나 루퍼트, 바키와 그 일당 누구를 본다고 해도 율리안만큼 청렴결백한 원칙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공명정대하고 청렴했기 때문에 만약에 그가 군대가 아니라 정치에 입문했으면 청운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방위군이라고 그런 사람이 살아남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뛰어난 전사이자 철저한 계산가라서 어떤 험난한 임무를 떠맡아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는 초고속 승진을 반복해온 특이 케이스라고 한다.
덕분에 우주군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공화국을 위해서 일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면서 터무니없이 좋은 제안을 걷어차 버렸을 정도라고 한다.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로틴과 바키 양쪽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상하는 도중에 발견할 인재. 물론, 원사 나부랭이가 소장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겠다니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장차 은하를 지배해나가는 입장으로는 그를 부하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통과점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둘! 하나, 둘!”
문지방 위쪽에 간이철봉을 설치한 탈리아는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서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건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흑염룡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