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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드림 이터라고!”
필터링을 거치고 그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는 내용들을 제외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예상대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
설마 구시대의 유물이나 다름이 없는 마법의 힘을 빌려서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악마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 악마를 소환한다는 것은 주변에서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피 냄새를 풍기는 의식이었으니까.
“호프만이 아르카리우스의 레어에서 발견한 스크롤을 사용한 모양입니다. 어쩌면 다른 무엇인가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사대를 파견해 보십시오.”
“……의외로 순순히 이야기하는군?”
예상대로 수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라서 나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대령님께서 약속하신 포상만 주시면 그만입니다. 드림 이터로 무슨 일을 꾸미던지, 정치에 관한 일이라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끼어들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계산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는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명백하게 적의를 드러냈지만 길로틴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면서 여유를 되찾는다.
“설마 여기까지 개입한 자네를 내가 놓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버려두지 않으면 어쩔 생각입니까?”
“자네는 부하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설마…….”
“범죄자 출신의 부하들이라면 조금만 뒤를 조사해도 걸리는 게 쏟아져 나오겠지. 그들에게 어떤 죄목을 뒤집어씌우더라도 내 마음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나는 분한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양 주먹을 부르르 떠는 연기를 했다.
길로틴이 타인의 우위에 서지 않으면 직성을 풀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승리한 기분을 만끽시켜주기 위해서 일부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벗어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것으로 나의 그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동맹을 유지하게 될 것이며, 루치아가 발설하지 않는 이상은 드라코니안 나이트에 대한 정보도 얻지 못하게 될 게 틀림이 없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당분간은 지금까지대로만 일하게. 이번 토벌작전으로 상당한 전과를 세웠으니 2계급 특진을 하게 될 거야. 새롭게 발령되는 부대에서 적당히 일하다가 사관학교로 입학하면, 3개월 동안 속성교육을 받고 그 부대의 중대장으로 취임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지만 그가 꺼내는 말이니 뭔가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어째서 저를 헌병대가 아니라 방위군에 내버려두는 겁니까? 이용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수중에서 굴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방위군의 개혁추진과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까?”
“역시 눈치는 빠르군.”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현재 우주군은 슈발츠 제국이 지배하는 로아트라 성계를 공격하고 있네. 적의 우주군도 저항하고는 있지만, 고립된 장소인 만큼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하지. 그리고 우리 공화국은 그 성계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알려진 팔란티오 행성을 낙찰 받는데 성공했네.”
행성 점령전!
“설마. 우주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방위군만으로 행성을 점령할 생각입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 방법밖에는 대안이 없네. 바키를 위시하는 그의 추종자들은 연맹에 어마어마한 차관을 빌려서라도 우주군의 힘을 동원하려고 하고 있지만 말이야. 장담하는데 그들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면 공화국은 파산하고 말 걸세.”
“사태가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이건 비밀이지만, 얼마 전에는 제론 성계의 천연가스 채굴권 일부를 사하스 공화국에게 팔아넘기고 말았네.”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가온공화국은 제론 성계에는 막대한 천연가스들을 생산하는 3개의 행성을 보유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채굴하는 천연가스들을 정제해서 판매하는 게 공화국을 먹여 살린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거대한 기간산업이라는 거다.
전생에서 동일한 가치를 지닌 상품을 비교하자면 중동에서는 석유, 러시아에서는 천연자원들을 합친 것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까? 일단 생산시설만 지어놓으면 단지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황금알들을 쏟아내는 거위들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한 때는 연맹의 전체 시장의 10%를 점유했을 정도로,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연맹의 상임이사국에 들어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하스 공화국이 연맹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천연가스의 가격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릴 수 없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리는 바람에, 공화국과, 사정이 비슷한 천연가스 생산국들은 심각한 경제적인 타격을 받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런 국가에게 가스채굴권을 팔아넘기는 현재의 상황을 조금 심하게 비유하자면, 자신을 칼로 찌른 상대방에게 “야! 그것보다는 칼을 비틀어 버리는 게 더 큰 피해를 줄 수가 있어!”라고 외치면서 직접 손잡이를 붙잡고 비틀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일.
이번 일로 사하스 공화국은 천연가스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게 되겠지만, 그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천연가스의 가격을 다시 올려주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전례를 보건데, 이전보다 더 거리낌 없이 가온 공화국의 재정을 압박해 올 것이 분명한 상황.
“국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언론이 통제받고 있는 마당에 그들이 무슨 정보를 얻겠나? 이번 사건으로 구조조정에 휘말리면서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과 그들을 돕고 있는 트리니티 같은 반정부 조직들만이 정부에게 항의하고 있을 뿐이야. 더 거지같은 건 우리 치안유지군은 그들이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거고.”
길로틴의 고충이 살짝 이해되기는 했다.
잘못은 정부가 하고 욕은 헌병대가 먹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바키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 게 힘들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상당한 무리를 해서 팔란티오 행성을 낙찰 받은 모양이야.”
팔란티오 행성의 최대 특산물은 광석이다.
궤도상에 존재하는 2개의 위성 중에서 하나는 다이아몬드, 하나는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성 내부에도 어마어마한 광물들이 매장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금싸라기 같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행성의 광물들이 고갈되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서 정말로 가스 채굴권을 팔아넘긴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이득을 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한 상황.
“이번 전쟁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방위군의 힘만으로 승리해야만 하네. 그게 실낱같이 목숨이 붙어있는 공화국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길로틴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까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모양이다.
연맹은행에 빌린 차관을 갚을 수가 없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국가들의 최후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국가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파산한 국가의 모든 정책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는 총독을 파견해 온다. 그는 제일 먼저 모든 은행의 자금을 동결해 버리고 외국 기업들을 철수시키는데, 덕분에 자금융통이 되지 않는 국내기업들은 꼼짝없이 도산하게 되면서 은행예금과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국가공무원들은 대대적으로 해고해 버리고 그 빈자리를 친 연맹파의 꼭두각시로 채워버리면서, 동시에 이민과 입국까지 막아버리는 등의 정책으로 손발을 묶어버리고는 괴뢰국을 만들어 나간다.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거대한 인력시장을 형성하면 연맹을 등에 업은 기업들이 찾아오면서, 그들에게 터무니없이 열약한 노동환경을 제공하면서 죽을 때까지 부려먹으면서 입맛대로 쓰고 버리는 노예로 착취하게 된다.
경쟁이라는 단어가 없는, 오직 연맹에게 철저하게 쥐어 짜일 수밖에 없는 시장구조를 가지는 디스토피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에서 고안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잔인한 방법이지만, 슈발츠 제국이라는 거대한 적은 그런 비인도적인 조치들을 묵인하게 만들어 버렸다.
‘차라리 이 나라를 떠나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지만 아직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런 사정이라면 저도 군인인 이상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거면 되는 걸세.”
“대신에 중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10만 골드의 자금과 A급의 마나연공법을 하나 지원해 주십시오.”
“……욕심이 과하군.”
“전 은하에서 제일 강력한 지상군을 보유하고 있는 슈발츠 제국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제가 드린 정보의 대가로 이 정도의 지원도 해줄 수가 없다면, 어차피 방위군만으로 승리한다는 것도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죠.”
길로틴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도, 영상기록장치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마당에 내 전투능력이 예사롭지는 않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을 터. 고민은 길었지만 결론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2만 골드와 재규어 5대를 지원해 주겠네. 대신에 A급 마나연공법은 불가능하니 B급 마나연공법인 라테르나 마기카를 주도록 하지. 엔포서들이 수련하는 것과 같은 물건이네.”
돈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지닌 현물을 주겠다고 하는 걸 보니까, 길로틴의 자금사정도 여유로운 편은 아닌 모양이다. 어차피 A급 마나연공법은 그냥 한 번 찔러본 이야기였으니 이 정도만 받아도 감지덕지라고 할 수 있는 일.
“좋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루치아에게 부탁받은 내용이라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드림 이터는 가능하면 그녀가 제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호프만에게 세뇌당한 위원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 생각이네.”
“그 이후로도 계속 부탁드린다는 말씀입니다.”
길로틴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건 좀 번거로운 부탁이군.”
언제 미쳐서 날뛰게 될지도 모르는 맹수를 끌어안고 있어야하니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그 순간에“그러면 제가 관리하는 건…….”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수상하게 여길 게 뻔해서 일부러 관심 없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뭐 어차피 개인적인 부탁이었으니 그냥 무시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일단 생각은 해보겠네.”
이 정도면 적당한 타협이다. 루치아는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천족이 드림 이터를 제거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왜냐면 길로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주저 없이 나를 사냥하려고 찾아올 테니까.
찾아온 루치아에게 정정당당하게 1대1대결을 제안하고, 피로를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침대 위로 유인하기만 하면 드라코니안 나이트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게다가 내게 주어진 과제가 하나 더 생겼다.
‘성교 능력을 강화해야 되겠어.’
지금까지는 살아남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루치아를 공략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거지만 잘만 쓰면 세상의 절반을 지배할 수도 있는 강력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탈리아의 처녀를 접수하는 게 선결과제겠지만 이 고유능력을 강화시키려면 그녀 하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일.
‘이런 능력을 단련시키려면 역시 전문가(?)들을 찾아가야 되겠지.’
어느 때보다 확고한 다짐을 한 나는 길로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헌병대의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는 도중에 엔포서들이 루치아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되찾았다는 찬탈자를 챙겨서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마침 헌병대의 본부로 들어오고 있는 제시카와 마주치게 되었다.
“필승!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필승, 생각보다 금방 다시 만났군요. 류안 중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녀는 상관이자 내통자였던 랄프 대령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 헌병대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번에 중령으로 진급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번 사건으로 연루된 지휘관들의 자리가 비는 바람에 임시방편으로 진급한 거죠. 저보다는 류안 중사님이 2계급 특진하신 걸 축하드려요. 정말 대단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리에 밝고 예의바른 그녀와 나누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버렸다. 이 세계에서 그렇게 정상적인 대화를 나눈 게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갈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소대에서는 클라크가 제일 정상인에 가까웠지만, 소심하고 까다로운 녀석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바람에 상대하는 게 피곤했다.
‘역시 제시카를 그 녀석한테 넘겨주는 건 아까운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알고 있어요?”
“네?”
“2등급 아래의 마장기로 타이거를 상대하셨잖아요. 과거에도 그런 일이 딱 한 번 일어난 적이 있는데, 바로 헨드릭 황제의 일화죠. 연맹 사람들은 그게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면서 믿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동경과도 같은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저는 전설을 직접 목격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유혹하는 걸까?’
잠깐은 고민했지만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생각해 봤을 때, 여기에서 밀어붙였다가는 기껏 쌓아놓은 호감도까지 깎아버릴지도 모르는 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후훗, 그렇게 말씀하시면 믿어드릴게요.”
겸손한 척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조종 실력으로 압도한 건 사실이지만 타이거가 제 성능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었으면 1대 1은 결국 패배했을 터. 게다가 조루인 마나량을 생각해 보면 어차피 이길 수 없었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참, 이번에 배치된다는 중대에서 맡게 되는 직책이 뭐라고 했죠?”
그 질문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해 줬다.
“행보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