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31화 (3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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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다행스럽게도 루치아에 맞서 싸워야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타이거 vs 드라코니안의 괴물 대결전에서 승리한 그녀는 예고한대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미친 듯이 우리 소대를 뒤쫓아 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발자크를 무찌르는 게 쉽지만은 않았는지 상당한 부상을 입고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소대로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괴물이라서 다른 세력의 도움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길로틴이다.

나는 영상기록장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반드시 살아있는 상태로 생포해 주십시오.”

[……그녀가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뭔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돌입부대에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답이 왔다. 예상대로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듯 한 태도. 덕분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설들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얻은 내가 재빠르게 대답을 했다.

“그녀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밖에 없다.

‘방아쇠를 멈춘 목소리의 주인이 내가 루치아와 만나는 걸 의도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

처음에는 벤틀리를 구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타이거에 심은 바이러스가 가짜라는 확신을 얻고 나서는 그 이유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이 전개되면서 깨달은 사실은 루치아의 정체가 심상치 않다는 것.

‘드라코니안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하프라는 것도 그렇고, 폭주한 타이거를 혼자서 상대하는 괴력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돌입부대의 힘을 빌리면 루치아를 처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은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그녀를 생포해야만 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둔다.

내 말을 들은 길로킨은 즉시 엔포서를 파견해서 루치아를 사로잡으면서 그가 테러리스트의 본부에서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게다가 그녀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는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는지, 이렇게 나를 묶어놓고 닦달하는 것으로 그가 상당한 궁지에 몰려버렸다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백해오고 있다.

“그녀를 생포하는 과정에서 엔포서의 정예요원 5명을 잃어버렸네. 샛별회를 일망타진하면서도 한 명도 손실을 입지 않은 대원들이 5명이나 죽어나갔다는 말이야. 나와, 피를 나누고 생사를 함께하기로 이들이 말이야.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그의 분노보다는 그 괴물을 상대로 겨우 5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소름끼친다.

보아하니 엄청 애지중지하는 대원들을 잃어버리고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이 이상 대립각을 세웠다가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알겠습니다. 대령님께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나도 세뇌기술의 정체 따위는 모른다.

길로틴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도 알아내지 못한 기술의 정체를 내가 무슨 수로 알아낼 수 있겠는가? 다만 호프만과 루치아를 향해서 자백제, 고문, 협박, 회유,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고도 실패를 했으니 나에게로 차례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솔직히 호프만이 어떤 방법으로 길로틴의 심문을 피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

“루치아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녀는 지금 남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저와는 대화할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내 자신만만한 태도에 길로틴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답답한 구속장치들이 벗겨지고 헌병대 병사들의 인솔을 따라서 루치아가 감금되어 있는 새하얀 방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를 피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그냥 하게.”

“그러면 협조 안 합니다. 세뇌기술의 정체가 궁금하면 직접 해결해 보시죠?”

“끄응…….”

강하게 나가자 분했는지 길로틴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지만 배째라는 태도로 나갔더니 결국에는 물러서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전과도 있기 때문에 오감이 뛰어난 루치아를 향해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혹시 이 근처에 도청장치가 있어?”

“왼쪽 옷깃에 하나 달려있군.”

나는 그녀의 조언에 따라서 발견한 도청장치를 집어 들면서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보는 길로틴에게 보여주고는 웃으면서 으스러트려 버렸다.

덕분에 화가 잔뜩 난 모습이지만 루치아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증명했으니 칼자루는 내가 쥐게 되는 셈이다.

‘사냥감의 존재가 자신을 제정신으로 유지시켜준다는 말은 사실이었군.’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반쪽이여. 혹시 나와 싸워주려고 찾아온 건가?”

흥분된다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아쉽지만 아니야. 그냥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이유가 혹시 세뇌를 당하고 있어서 그런지 물어보려고 왔어.”

“그걸 도대체 누구한테 들었지?”

“대부분은 저 양반 덕분에 알아냈지. 확신하게 된 건 방금 전에 네가 말해준 덕분이고. 하지만 여기까지 오니까 정말로 궁금해지는데 도대체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데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야?”

루치아는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것처럼 입맛을 다시더니 세뇌기술의 비밀에 대한 베일을 벗겼다.

“기술이 아니다. 드림 이터라는 악질적인 사역마를 사용하는 거지.”

“사역마라니, 호프만이 마법사였다는 건가?”

먼 옛날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존재들을 언급해 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증오스러운 남자는 어쩌다가 아르카리우스님의 레어에서 흘러나온 매직 스크롤을 한 장 손에 넣었을 뿐이다. 그 사역마를 제외하면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송사리 중에서도 송사리 같은 남자라고 할 수가 있지.”

드래곤에 이어서 마법이라니 또 황당한 영역의 이야기가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 드림 이터라는 녀석의 정체가 뭔데?”

“말 그대로 꿈속으로 들어오는 몽마 같은 녀석이다. 사람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서 급기야는 깨어있는 순간에도 귓속으로 독을 흘려 넣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리지. 원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만 행동을 하던 고위급의 악마였지만 아르카리우스님께서 녀석을 완벽하게 사역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셨다는 거다.”

‘그런 부러운……아니, 무서운 능력 같으니라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니 호프만은 자신의 꿈속에서 드림이터에게 명령을 내리고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 드림 이터가 지금은 루치아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냥 꿈속에 나타나는 수준이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여지없이 나타나서 개수작을 부리더라고. 그래서 아예 녀석이 도망칠 수 있는 구멍을 막아버리고 끝장을 보기로 했지. 덕분에 지금은 자나 깨나 녀석과 싸우고 있어.”

잠깐은 무슨 이야기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중2병의 상상력을 동원하니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입해 들어온 드림 이터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둬버린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길로틴은 운이 좋았다. 만약에 호프만이 아직도 드림 이터를 자유자재로 사역하고 있었다면 그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을 테니까.

“혹시 그 사역마라는 게 주인의 정신을 보호해주는 능력도 있어?”

호프만이 길로틴의 심문을 피해냈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런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 남자는 사역마의 정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려했으니, 어쩌면 심문을 받는 순간에 사역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도록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어버렸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럴듯한 방법이기는 한데 약간 쩨쩨한 기분도 드는군.’

민간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위급의 인사들을 노렸으면 훨씬 더 손쉽게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호프만이 마음대로 활개 치지 못하고 다녔던 이유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악마의 범죄라는 건 현대기술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종류의 위협들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수한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크로이츠 법국.

악마나 마족이라면 치를 떠는 이 집단이 사하스 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상은, 드림 이터를 사역한다는 건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다. 천족들에게 들키는 순간에 그 어떤 변명을 할 수도 없게 되니까.

‘결국 길로틴의 야망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는 소리군.’

그들의 이단추심이 시작되면 사역마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 그가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드림 이터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보가 길로틴에게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정적들 중에서 드림 이터에 세뇌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크로이츠 법국의 힘을 빌려서 정적들을 제거할 수 있겠지. 좋아. 이 정도의 정보라면 그도 어느 정도 만족을 할 수 있을거야…….’

알아낼만한 정보는 충분히 알아냈지만 방아쇠를 멈춘 목소리의 인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일단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로 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드림이터랑 싸워온 거야?”

“한 반년쯤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테러리스트 본부에서 탈출에 성공한 적도 있었는데 정신줄을 놓고 있는 사이에 사냥꾼들한테 붙잡히는 바람에 다시 끌려들어가고 말았지. 그 사이에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 하나 굴러 들어온 덕분에 사냥의식으로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말이야. 그 다음에는 네가 나타나 줬고.”

대단한 정신력이라는 말밖에는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다.

평소에 멍하니 있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사냥감을 어떻게 잡아서 죽일지 고민하면서 의식을 유지하는 자신만의 방법이라고 한다. 사냥감이 없을 때는 지금까지 싸운 강적들과의 전투를 떠올리면서 의식을 고양시키지만, 사냥감이 죽어서 허탈해지는 순간이나 상상만 하는 게 지루해지면 드림 이터와 신체의 주도권을 두고 결전을 벌이느라 미쳐서 날뛰게 된다고 한다.

루치아가 나를 보면서 정신을 차리는 이유는 한 가지.

“사냥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도대체 얼마나 싸움을 좋아하는 거냐!’

싸움을 위해서 태어난 전투민족은 드라코니안들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물론, 루치아는 그들 중에서도 조금 더 심하게 특이한 케이스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호프만도 지금쯤이면 그녀에게 세뇌를 시도한 것을 땅을 치면서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드림 이터를 잃어버렸으니까.

‘아니, 잠깐.’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호프만이 너한테 세뇌를 시도한 이유가 뭐야?”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생각하면 부하로 두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따져보면 몇 번이나 드림 이터를 보내는 집착이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녀를 원했던 거지?’

“미안하지만 그건 대답해 줄 수가 없다.”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에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진다.

‘이거다.’

지금까지는 어떤 말에도 대답을 해주던 루치아가 처음으로 답변을 거절했다. 나는 마침내 목소리가 인도해 낸 비밀에 처음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지금 상태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대답을 해 줄 리가 없으니 다소 돌아가도 스무고개를 하기로 결심했다.

“뭐, 좋아. 크로이츠 법국의 관계자에게 연락해서 네 속에 있는 드림 이터를 제거해도 되겠지? 그러면 네가 나를 노릴 필요도 없어질 테고 말이야.”

“자, 잠깐! 그 재수 없는 녀석들에게 신세를 지는 건 사양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기다려주지 않겠나. 반쪽이여?”

크로이츠 법국이라는 말에 질색을 하던 그녀가 제안을 해왔다.

“얼마나?”

“3년이다. 3년만 기다려주면 반드시…….”

“연락할게.”

“으아아아! 제발 그만두거라 반쪽이여,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그게 뭔데?”

“아니 그게…….”

스무고개 성공!

어쩐지 스무고개가 아니라 단순하게 협박을 한 기분이 들었지만 자세한 것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다른 방법이라는 것도 호프만이 루치아를 노린 이유와 연결되어 있는 모양.

동시에 별다른 연관점이 보이지 않는 두 가지의 사실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더욱 더 궁금해졌다.

“대답하지 않으면 크로이츠 법국에 도움을 요청할 거야.”

“아, 알겠다. 이것 참 지독한 반쪽이로군…….”

드워프와 엘프가 서로를 경원시하는 것처럼 드라코니안과 천족도 서로를 경원시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싫어한다는 것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잠시 후, 루치아는 믿을 수 없는 단어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혹시 드래곤 라이더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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