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30화 (3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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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어쩌다가 내가 그런 정보들을 손에 넣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다시 한 번 되돌려야만 한다.

벤틀리를 구하고 발자크를 처리하는데 성공했지만 타이거와 쟈칼 1기를 잃어버린 나는 다소 맥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이걸로 끝일까?’

10만 6천골드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고 그 대가로 얻은 건 벤틀리의 목숨이 전부다.

사람의 생명을 구했으니 돈만으로 계산하는 건 매정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그가 설치해놓은 바이러스가 작동하지 않았던 사실이 의심스럽다.

‘만약에 바이러스라는 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해킹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보니 뭐라고 단정을 내리기는 어려웠지만, 만약에 그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 녀석의 배신으로 잃어버리지 않아도 될 쟈칼 1기를 날려버리고 죽을 고비까지 넘긴 셈이다.

게다가 내 생환을 솔직하게 기뻐해주는 다른 소대원들과는 다르게 벤틀리만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시종일과 겁먹은 표정이었다.

덕분에 의심은 거의 확신으로 바뀐 상황이라서 녀석의 배신이 더욱더 괘씸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에 나를 배신한 게 사실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청소년을 위한 아주 건전하고도 유익한 방법으로 말이야…….’

어떤 법에도 저촉되지 않는 무시무시한(?)복수를 다짐한 나는, 시야를 전환해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돌입부대가 잠시 후에는 3차 저지선으로 도착할거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합류하자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퇴각할 준비를 마친 우리들은 마나에 여유가 있는 제시카를 제외하고 쟈칼의 파일럿들을 교체시켰다. 탈리아, 닥돌 1, 2가 내리고 리틀보이, 클라크, 닥돌3이 탑승한다.

[저 소녀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데리고 가기는 해야겠지.”

상당히 수상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엔포서가 방치하고 떠난 것을 보니까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삼엄한 구속 장치들을 볼 때는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연맹법으로 유사인종에 대한 차별은 금지되어 있는 상황으로서 군인으로서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여보세요?”

“…….”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져봤지만 대답이 없다.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는 상태. 어쩌면 다른 테러리스트들처럼 세뇌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시카가 판단을 보류한 것도 무리는 아니군.’

구속을 풀어주는 순간에 달려들기라도 하면 부상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일단 마나구속장치들은 내버려두고 쇠사슬만 풀고 데려가자고.”

철컹철컹

쟈칼을 동원해서 쇠사슬을 풀어나가니 다소 꺼림칙한 소리를 내면서도 손쉽게 해체된다.

다리는 움직일 수 있지만 양손은 여전히 커다란 마나구속장치로 묶여진 상태. 그 모습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소녀의 의식을 확인해 봤다.

“여보세요! 듣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말 몰라요, 헬로우?”

“아까부터 시끄러운 반쪽이군.”

‘제대로 말할 수 있잖아!’

열심히 주의를 끌자 정신이 돌아온 소녀가 입을 연다. 무안해지는 바람에 붉어지는 얼굴을 방어기제강화로 진정시키면서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이름이 뭔지 알려줄래? 이래보여도 오빠가 테러리스트들을 무찌른 사람이거든.”

“아아. 보고 있었다. 내 사냥감을 멋대로 가로채다니 지독한 반쪽이가 아닌가? 덕분에 모처럼 되찾은 제정신이 날아가 버릴 뻔 했다. 뭐, 그래도 반쪽이 덕분에 다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만…….”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얘 혹시 4차원인가?’

“빵상?”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반쪽이가.”

외계인을 만나면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

전략적인 후퇴를 결정한 나는 사람을 제멋대로 반쪽이라고 부르는 소녀에게 다시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시도해 봤다.

“어쨌든 밖으로 내보내 줄 테니까 좀 협력해주지 않을래? 기왕이면 쟈칼의 손에 탑승해 줬으면 좋겠는데.”

“좋을 대로 하거라.”

별로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는 태연한 모습이라서 마나구속장치를 풀어주는 계획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클라크를 향해서 손짓을 한 나는 내려오는 마장기의 손바닥을 타고 그 위로 소녀와 함께 올라섰다. 문제는 탈리아가 재빠르게 내 옆으로 뛰어오르면서,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팔짱을 끼고는 소녀를 노려보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사실이지만…….

“왜 미성년자한테 질투를 하고 그래?”

“누, 누가 질투했다고 그래? 누가!”

“반쪽이여,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다만?”

“뭐?”

“정말이야?”

탈리아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올해로 방년 120세의 꽃다운(?) 나이다. 내 선조인 드래곤의 기준으로 따진다고 해도 헤츨링은 지난 나이지.”

겉보기로는 아직 미성숙해 보이는 소녀였지만 알고 보니 제일 어른이다. 하지만 놀란 건 나이 때문이 아니다.

“드, 드라코니안이라고?”

평범한 소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드라코니안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체 일부가 비늘로 뒤덮여 있다거나 뿔, 날개와 같은 특유의 외형적인 특징들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랙어스 드래곤 출신의 드라코니안은 겉모습이 모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특별한 고양상태가 아니라면 드래곤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건 아닐까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

클라크가 처음으로 자신의 특기 분야에서 조언을 해줬다. 다소 놀라운 사건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버린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앨리시움 출신이야?”

사하스 연맹의 5대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로 어떤 종족보다도 자존심이 강하다고 알려진 앨리시움. 특히 드라코니안 특유의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백병전이나 마장기 전투에서 보여주는 움직임이 압도적으로 강력해서 헨드릭 황제도 그 능력을 탐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군대에게 밀려 마지막 행성이 함락당한 이후로도 최후의 최후까지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바람에,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대신에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방식으로 협상을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헨드릭 황제가 죽고 나서는 그런 형식적인 계약을 단숨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연맹의 가맹국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슈발츠 제국을 향해서 반기를 들었다고 알려진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밖에는 모르는 오만한 드래곤과는 다르게 단일종족으로 이루어진 자국민들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대단해서, 누군가가 자국의 국민을 학대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보는 성미를 가지고 있다.

가온 공화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연맹의 가맹국이라서 그녀가 앨리시움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녀가 받은 학대를 빌미로 앨리시움의 정치가들이 심각한 외교 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법이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모든 덤터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구출한 당사자들에게 돌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스럽게도 루치아는 앨리시움의 국민은 아니었다.

“동족들이 그런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나는 하프라서 말이야.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신 로드 아르카리우스 레어에 거주하고 있었지.”

“그것 참 다행이군. 자, 잠깐, 레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나는 그녀의 발언에 깜짝 놀라며 외쳤다.

레어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기연과 금은보화들이 넘쳐나는 꿈의 장소가 아닌가!

“탐욕스러운 표정이다. 반쪽이여.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레어는 옛날 옛적에 도굴범들이 거덜을 내고 말았지. 애초에 드래곤들이 살고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낸다면 모를까, 인간들의 탐욕이 최후의 드래곤까지 씨를 말려버렸다는 건 유명한 상식이 아닌가?”

[상식입니다. 소대장님.]

묘하게 죽이 잘 맞는 클라크와 소녀를 보고 있으려니 괜히 속이 뒤틀린다. 아무래도 벤틀리만 아니라 녀석에게도 소대장님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단어를 뼛속 깊숙하게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어 보이는 상황.

“야! 그냥 한 번 기대해 볼 수도 있는 거지. 자꾸 우리 류안한테 건방지게 굴래? 그까짓 상식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내 편을 들어주는 탈리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크흑, 이 차가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역시 여자 친구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지막 드래곤이 사냥을 당한 건 5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가디언들은 보통 드래곤과 함께 싸우면서 최후까지 생사를 함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르카리우스는 수명이 다해서 죽은 자연사였던 데다가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10살.

레어에서 살기는 했지만 아르카리우스에 대한 충성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그나저나 로드 드래곤의 하프라니 갈수록 범상치가 않아 보이는군.’

어쩌면 길로틴이 터무니없는 걸 놓쳐버린 건 아닐까하는 기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까 아직 통성명도 하지 못했는데 이름이 뭐야?”

“루치아 아르카리우스다. 그냥 루치아……잠깐, 멈춰!!”

깜짝 놀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다.

보병들의 안전을 위해서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아직은 화물적재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루치아는 돌연 허공을 바라보면서 마치 환희에 빠진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광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꺄하하하하하!!! 아무래도 내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구나!!”

“……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루치아의 모습이 상당히 섬뜩했기 때문에 겁먹은 탈리아가 내 팔을 움켜잡는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에 한기를 느끼면서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등 뒤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투쿵! 투쿵! 투쿵!

수십 톤에 이르는 바위덩어리가 들썩거린다.

“설마…….”

투쾅!

누군가가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바위를 박살내면서 밖으로 뛰쳐나오는 한 기의 마장기.

“발, 발자크라고?”

[전원 사격!!]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제시카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부하들이 일제히 타이거를 조준하면서 빔 캐논을 발사했다.

푸슝!

기대하는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흡수되는 것처럼 타이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흡수되어버리는 공격들.

[크, 큰일이에요. 중사! 리미트 브레이크 현상입니다!]

“그게 뭡니까?”

[극소수의 마장기 파일럿들만이 일으킨다는 정체불명의 마나폭주 현상입니다. 내버려두면 결국 얼마 못가서 쓰러지기는 하지만 그 전까지는 생전의 능력을 몇 배나 뛰어넘는 괴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괴물.

타이거는 그 표현 그대로의 모습이다.

전신에서는 마나로 짐작되는 푸른색의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면서 산산이 조각난 파편들이 마장기의 형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달라붙고 있다. 하지만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리조각의 파편들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모자이크로 더덕더덕 붙어있는 형태.

그중에는 내가 탑승하고 있던 쟈칼의 파편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져 있어서 조종석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 기반이 타이거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빔 캐논을 흡수했던 광경을 떠올리면서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아직 희망은 남아있어.’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단 한 명은 마치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모습으로 기뻐서 날뛰고 있었다.

“반쪽이여. 아무래도 저놈을 처리하는 건 힘들어 보이는데 부디 마나구속장치들을 풀어주지 않겠나? 풀어주지 않겠나? 이 양손으로 저 사냥감을 찢어 죽이는 기쁨을 맛보고 싶구나!!”

‘풀어줘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에 발자크와 타이거가 동시에 울부짖는다.

[크아아아아! 용서할 수 없다. 네놈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고오오오!

‘아, 젠장. 부활한 이유가 나였냐?’

원한이 향하는 방향이 나라를 사실을 깨닫고 얌전하게 그녀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풀어줄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만 남자가 한을 품어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루치아를 묶고 있는 마나구속장치를 풀어내고 그녀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쟈칼에 탑승하고 싶다면…….”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 없다. 반쪽이여, 그대가 가지고 있는 그 흥미로운 물건을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

“흥미로운 물건?”

루치아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허리춤에 묶여져 있는 찬탈자를 강탈해 버렸다.

‘아직 한 번도 안 쓴 무기인데.’

마치 NTR을 당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아까워하기보다는 일단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좋아하는 그녀를 보는 게 가슴이 살짝 아프다.

“혹시 지원이 필요하면…….”

“지원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내 자유를 되찾아 준 대가로 충고를 하나 해주도록 하지. 잘 들어라. 반쪽이여, 혹시 내가 사냥을 마치고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무조건 도망치도록 해라. 아니, 지금부터 미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녀석을 사냥을 마친 다음에는 분명히 반쪽이를 쫓아서 달려갈 테니까…….”

황당한 말에 나도 모르게 되물어보고 말았다.

“……뭐라고요?”

“크흠, 숙녀한테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들다니 고약한 반쪽이로군. 하지만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었으니 이번에는 특별히 가르쳐주도록 하겠다.”

루치아의 검지가 나를 가리킨다.

“내가, 그대를, 마킹했다는 소리다.”

푸슝!

사랑을 고백하는 처녀처럼 수줍게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거센 풍압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다음 순간에 목격한 것은 블랙 어스 드래곤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폭주한 발자크를 향해서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드라코니안 전사의 모습이다.

“꺄하하하하하! 다음 사냥도 기대되는구나!!”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찬탈자로 타이거의 오른쪽 팔을 단숨에 절단해버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OTL의 자세로 또다시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호랑이를 피했더니 용이 덤비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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