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26화 (26/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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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잠재능력의 각성으로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발자크는 한 쪽 눈에 상처를 입고 거리 감각에 문제가 생겼다.

벤틀리는 타이거에 뭔가 조작을 해놓은 눈치고 마장기 조종술 스킬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자신감이 충족되었다. 바스코와의 전투에서 얻은 교훈으로 승산이 불확실한 전투는 가능하면 피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렇게까지 조건들이 갖추어지니 욕심이 생긴다.

‘방아쇠를 멈춘 목소리도 신경 쓰이고 말이야’

어쩌면 그 목소리의 주인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체가 수호천사일지 신일지, 아니면 악마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시카 소령님. 지금 전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게 확실합니까?”

[……타이거가 경무장을 하고 있다고 그래도 드론의 철갑탄이나 쟈칼의 보조무장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가 없을 거예요. 물론, 주 무장인 빔캐논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는 있겠지만 마나소모가 워낙 심해서 일반 병사들의 능력으로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번에도 역시 마나량이 발목을 잡는다. 덕분에 새로운 궁금증이 떠오른 나는 추가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발자크도 선봉대와 싸우면서 상당히 지쳤을 텐데. 마나량도 상당히 줄어들지 않았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기는 어려워요. 저자는 자신을 우주군이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최소한 2천 이상, 아무리 적어도 3천에 가까운 마나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예요.]

터무니없는 마나량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 마디로 장기전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다시 한 번 충고 드리지만 지금 죽이는 게 최선입니다. 정 소대원을 포기할 수 없으면 하다 못해서 방위군이 집결하고 있는 2차 저지선으로 퇴각하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군요. 중사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제시카도 내가 패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계속해서 말리는 걸 보면 예상보다 어려운 전투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생겨버려서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신들이 포기해도 나는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

지금까지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원하는 게 뭔지를 확인해봐야만 한다.

“저에게 딱 10분의 기회를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소대 전체의 통신을 켜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작전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현재의 상황에서 최고의 클리어 조건은 벤틀리가 타이거의 조종석을 잠가버리는 거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기본 전제로 삼으면서 발자크를 잡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이야기를 마치자 약간의 뜸을 들이면서 입을 여는 제시카.

[……세상에서 제일 긴 10분이 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대부분이 이해한 눈치였기에 작전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탈리아가 개인회선으로 은밀한 통신을 해 왔다.

[저기, 류안.]

“왜 그래?”

[아니 그게…….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봐. 우리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우,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래? 어쨌든 조, 조심이냐 해! 멍청아!]

서둘러서 말하느라고 발음이 귀엽게 꼬여버리는 걸 보니, 이번 전투만 끝나면 조속하게 처녀를 회수(?)해야겠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솟구쳐 올랐다. “돌아가면…….”으로 시작하는 대사를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어쩐지 사망플래그가 될 것 같아서 굳이 입으로 담아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장난감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신 모양인데. 슬슬 인질교환을 시작해야지? 너무 오랫동안 나이프를 들이대고 있으니까 팔에서 쥐가 날 것 같아서 말이야. 무심코 찔러버릴 것 같거든…….”

“좋아.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발자크가 타이거의 패널을 조작하자 조종석으로 이어지는 승강용 와이어가 내려온다. 지지대에 발을 올리면서 천천히 조종석으로 올라가는 녀석.

“보병들은 6시 방향의 대인통로를 향해서 이동하도록.”

[알겠습니다.]

클라크, 리틀보이, 닥돌형제 한명이 허겁지겁 통로를 향해서 달려갔다. 그들을 보호해줄 수단이 없는 이상은 마장기 전투에서 보병들의 존재는 걸림돌이나 마찬가지, 전투에 휘말려서 죽어나갈 가능성도 높고 괜히 새로운 인질을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임무를 줬다.

“뒤돌아서라고 꼬마. 조종석을 닫을 때까지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 조종석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

불량품콤비가 언제든지 조종석을 날려버릴 수 있도록 하늘을 날면서 조준하고 있으니 벤틀리를 쏜다거나 하는 허튼 수작은 부리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수작을 부릴 수 있지.’

“뛰어내려 벤틀리!!”

내 외침을 들은 벤틀리가 주저 없이 허공으로 뛰어내린다.

“이 새끼가!”

탕! 탕! 탕!

상황을 눈치 챈 발자크가 권총을 발사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치면서 무사했다. 그와 교차하듯이 주저 없이 조종석으로 개틀링과 철갑탄을 발사해대는 불량품콤비.

투타타타타!

쾅!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조종석의 문이 닫히는 것이 먼저였다.

‘역시 늦었군.’

직격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마장기를 구성하는 장갑 중에서도 제일 단단하다는 조종석 방어벽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떨어지는 벤틀리를 받아내면서 동시에 부하들을 향해서 명령을 내렸다.

“왼쪽 다리의 관절부를 향해 일제사격 개시!”

투쾅!

쟈칼 4기의 빔 캐논이 타이거의 왼쪽 다리를 직격한다.

마나가 충전되지 않은 마장기는 방어력도 기본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발자크가 아직 시동을 걸지 않은 타이밍을 노린 공격이라서 예상대로 큰 타격을 입은 타이거의 왼쪽 다리는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이런 비겁한 새끼들이!!]

상당히 분노했는지 외부스피커로 자신의 기분을 여과 없이 발산해 낸 발자크가 광학위장을 사용하면서 몸을 숨긴다.

[전 대원 적외선 관측모드로 시야를 전환하고 기습에 대비한다!]

제시카가 내 대신에 소대원들을 지휘하는 사이에 나는 벤틀리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타이거에 장치를 해놓은 게 뭐야?”

“그게 그러니까. 해킹을 하면서 일종의 바이러스를 심었거든요. 문제는 이게 백신을 작동해버리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게다가 마장기 내부 시스템들은 가드도 단단한 편이라서 노려본다면 한 군데밖에는, 그런데 그게 또…….”

“횡설수설하지 말고 결론만 말해!”

“딱 한번 자세제어시스템을 무너트릴 수가 있습니다!”

“좋아!”

나는 벤틀리를 6시 방향의 대인출구 앞으로 내려놓으면서 곧바로 전투에 합류했다.

역시 기동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는 발자크. 그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숨어서 병사들의 마나가 떨어질 때까지만 기다려도 승리를 차지할 수가 있으니까 무리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이쪽은 미니게임마저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 시간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테러리스트의 기지가 폭발해버릴지도 모르는 일.

나는 다음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발자크!”

대답은 없지만 다시 한 번 허공으로 외친다.

“1대 1전투를 제안한다. 네놈도 사내새끼라면 숨어있지만 말고 튀어나와서 정정당당하게 한 번 붙어보자!”

받아들이지 않으면 범죄자들에게 배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도발을 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녀석은 반응을 보인다.

[……진심이냐?]

“물론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소대원들이 뒤로 물러서도록 신호를 보내자 녀석도 광학위장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온다.

[살다 살다가 이런 황당한 제안은 처음 듣는군. 5기의 쟈칼과 전투드론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승산이 희박할 텐데. 제정신이냐?]

“너처럼 허약한 녀석을 처리하는데 5명이나 달려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으로 알았군.”

[허약하다고?]

“그래, 허약하고말고! 부하들이 없으면 싸우는 게 너무 무서워서 광학위장으로 숨는 것 밖에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크하하하하하!!!]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발자크의 타이거가 바닥을 쿵! 하고 밟으면서 앞으로 나왔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야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지!!]

나는 대답 대신에 쟈칼의 중장비를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어차피 타이거한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는 강화장갑, 무반동포, 개틀링을 버리고 오직 빔 캐논과 초진동 나이프만을 들고서는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쟈칼.

기동력과 파괴력에 특화되어있는 랩터와는 다르게 범용타입의 보급형 마장기로서 D급 마장기 중에서는 가장 안정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게 좋게 포장해서는 안정성이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능력치 때문에 마장기들 사이에서는 보병(보통병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다양한 무장으로 커스터마이즈를 할 수 있다는 정도.

반면에 타이거는 쟈칼과 같은 인간 형태지만 기본 출력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덩치만 2배 큰 게 아니라 추가적인 마나증폭장치와 다양한 내부 장치들의 성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파워면 파워, 내구도면 내구도, 속도면 속도. 모든 면에서 우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비슷한 성능을 꼽으라면 그나마 다리에 타격을 준 덕분에 기동력이 비슷해졌다는 것.

‘하지만 로봇전의 승부는 기체의 성능으로만 판가름되는 건 아니지.’

희심의 미소를 지은 내가 승부를 시작했다.

“이 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신호로 하지.”

[좋다.]

바닥에서 주운 돌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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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지금 이 장소에서 타이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류안의 선언에 소대원들이 술렁거린다.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이지만 그중에서도 한 명은 그가 말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의견을 더했다.

[……제 상태를 눈치 채고 있었습니까?]

[상식적으로 판단한 겁니다.]

비록, 나노머신의 도움으로 레드존에서 벗어난 제시카지만 계속되는 윤간과 구타의 후유증으로 도저히 전투를 수행할 수가 없는 상태다. 지금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태연한 척을 하고 있는 게 고작인 상태.

[숨길 생각은 아니었어요.]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다른 소대원들도 오늘 처음으로 마장기에 탑승한데다가 마나까지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싸우면 전부 개죽음을 당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중사 혼자서는 무모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보여도 저는 이 분야에서만큼은 한 번도 호락호락하게 패배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마장기에 대한 교습을 받던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류안이 막무가내로 우기는 바람에 소대원들은 마지못해서 물러나지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자신들을 구하려고 하는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보였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도 미어지게 되었다.

‘크로스 중위와 같은 꼴을 당하게 만들 수는 없어.’

자신을 위해서 죽은 바보 같은 남자를 떠올린 그녀가 각오를 다졌다.

여차하면 적을 끌어안고 모든 마나를 폭발시키는 자폭공격을 감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발목을 잡을 생각이다. 생에 대한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한 번은 구해진 목숨을 은인을 위해서 쓴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다.

툭.

돌멩이가 떨어지는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나간 쟈칼이 타이거의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당황한 타이거가 급하게 체인소드를 휘둘러 왔지만, 사각으로 급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바람에 그 동작이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후웅!

[춤이라도 추자고?]

그 어설픔을 비웃으면서 종이 한 장의 차이로 피하면서 파고들어간 류안의 쟈칼이 왼쪽 다리의 관절부를 빔 캐논으로 겨냥하면서 제로거리의 포격을 날린다.

투쾅!

[크아아악!]

그 충격으로 타이거가 비틀거린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 새끼가!!]

발자크가 다시 체인소드를 휘둘렀지만 빙글 돌아서면서 타이거의 뒤로 돌아가는 쟈칼이 오금을 걷어차면서 타이거를 주저앉혀 버린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돌출되어 있는 요철들을 발판으로 삼으며 등 뒤로 뛰어올라 가더니 공중제비를 돌며 타이거의 머리를 향해서 빔 캐논을 연사해 들어간다.

투쾅! 투쾅! 투쾅!

[크아악!]

그 충격으로 타이거가 허물어진다.

오오오오!!

완벽하게 농락당하는 타이거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대원들이 감탄을 터트린다. 마장기전을 잘 모르는 그들을 그 정도의 감탄이지만 제시카는 충격으로 말까지 더듬어버리고 말았다.

“도, 도대체 저 남자는 정체가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장기 조종법을 배우던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치, 걷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뛰는, 아니 아예 날아다니는 것 같은 터무니없는 광경.

‘타고났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나잖아! 아, 아니. 이건 뛰어난 수준이 아니라…….’

완벽하다.

기본적으로는 신체를 움직이는 감각으로 움직이는 마장기 조종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자신의 몸처럼 움직이는 건 아무리 훈련을 쌓아도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마장기의 등급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시스템의 보조도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우수한 파일럿이라도 낮은 등급의 마장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 가끔씩 훈련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실습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불편한 움직임을 감수하면서 훈련용 마장기를 조종하는 경우는 있지만 보통은 자신의 실력에 맞는 마장기를 보유하기 마련이다.

‘기체의 성능을 완벽하게 끌어내고 있어. 방위군 중에서 저렇게까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기억을 뒤져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그가 자신을 속이고 마장기를 처음으로 탑승한 척을 했다고 하기에는 왜?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제시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발자크를 유린해나가던 류안은 살짝 거리를 벌리면서 빔 캐논을 냉각시키며 자신들을 향해서 외치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마나 떨어집니다. 작전시작 안하고 뭐하십니까?]

그 말에 그녀가 정신을 차린다.

[미, 미안합니다. 중사! 바로 시작할게요.]

자신도 모르게 사과해버린 제시카는 허겁지겁 소대원들을 이끌고 전선을 이탈해 나갔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생각하는 걸 그만둬버린 그녀는 어느새 자신이 여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암울하던 상황이 어쩐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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