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 ----------------------------------------------
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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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지게 하품을 한 발자크는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기지개를 폈다.
해는 이미 중천을 지나서 좋은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안한 시각. 바닥에는 술병들이 굴러다녔고 어젯밤에 품은 여자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다.
“제일 일찍 일어났군.”
별다른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스쳐지나가는 거울을 발견하고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약과 술에 찌들면서 초췌해진 상판데기는 다크서클이 늘어지면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도 떨어질 대로 떨어졌군.”
한 때는 우주군에서도 잘 나가던 에이스 파일럿이었지만 상관의 불합리한 명령에 항의했다가 변방으로 좌천당하고 말았다. 급기야는 테러리스트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그.
그렇다고 발자크가 이 생활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전직 우주군 파일럿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러리스트들은 그를 깍듯하게 받들어 모시면서 술이면 술, 여자면 여자, 약이면 약,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다준다.
반면에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는 테러리스트 두목의 보디가드가 전부.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있어서, 평소에 하는 일이라고는 기지를 돌아다니면서 빈둥거리거나 술이나 약을 마시고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그런 대우를 해준다고 테러리스트 두목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뿐이지.’
용기, 명예, 충성심과 긍지.
한 때는 자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들은 발자크가 타락해나갈 때마다 망령처럼 나타나면서 그를 비웃어온다.
그 웃음소리를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어서 술과 약, 그리고 여자들을 탐했지만 대부분은 순간의 도피에 불과했다.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전쟁터로 몸을 던지는 일. 적의 피가 바닥으로 흐르고 비명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망령들을 하나씩 처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덕분에 용병들 사이에서는 미치광이 발자크라는 별명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술병을 하나 들고 기지를 어슬렁거리던 그는 화물적재소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는, 근처에서 출납을 기록하고 있던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소녀는 뭐지?”
“드라코니안입니다.”
“드라코니안?”
마나구속장치에 구속당하고 있는 소녀는 마치 재앙신을 봉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단지 가녀린 팔다리를 한 인형처럼 얌전한 모습이지만, 덕분에 기괴하다고 할 정도로 끔찍한 취급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날개도 없고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데?”
“블랙어스 드래곤의 혼혈이라서 그렇습니다. 피부는 전투모드로 들어가면 변한다고 하는데, 사냥꾼들이 절대로 봉인을 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직접 확인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거 재미있군.”
발자크가 호기심을 보이자 무심코 대답을 했던 병사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떨어진 파이프를 집어든 발자크는 드라코니안 소녀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전투모드를 보려면 봉인부터 해제해야 되나?”
“저, 절대로 안 됩니다! 지도자님께서 알면 경을 치실 겁니다!”
병사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상황을 깨닫고는 우르르 달려들면서 그를 말렸다. 하지만 발자크는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꿈치를 들며 고개를 길게 빼고는, 괜히 기웃거리면서 돌입할 듯 말듯한 액션을 취했다.
“납품한 새끼들이 사기를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어디로 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확인해봐야 하는 일 아니야?”
“DNA검사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 소녀는 드라코니안이 확실합니다!”
“그 DNA검사를 속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자크는 병사를 향해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퍽!
“으아악!!”
바닥으로 뒹구는 병사를 바라보면서 마침 잘 걸렸다는 듯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발자크는, 그에게 달려들어서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퍽! 퍽!
“어디서 병사 나부랭이가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고 지랄이야?!”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온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이빨이 허공으로 튀어나오고 멍으로 부어오른 얼굴이 처참하게 변한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버리고 나서야 그는 만족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광경을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병사들을 쳐다본 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또 개기고 싶은 새끼들은 없냐?”
동료를 보며 분한 듯이 몸을 떨면서도 막상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해버리는 병사들.
‘쳇. 평소에는 숭고한 혁명이니 어쩌니 떠들어대던 놈들도 죄다 겁쟁이들이군.’
적을 향해서는 자폭테러도 서슴지를 않는 병사들이 어째서인지 그의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로 변해버린다.
나름대로 재밌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를 기대했던 발자크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며, 대신에 자신의 손에 들어온 새로운 장난감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인형처럼 생겼군.”
발자크의 만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드라코니안 소녀지만 표정에는 미동도 없다. 주변의 변화에는 애초부터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그저 허공만을 응시하는 눈동자.
“얘들은 네가 드라코니안이라고 하던데, 사실이냐?”
묵묵부답.
그 태도가 거슬린 발자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파이프를 휘둘러서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퍽!
“괴물은 괴물이네. 크크큭.”
피부가 벗겨지는 커다란 자상이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면서 순식간에 아물어 나간다. 그 순간에 노기를 뛰면서, 마치 맹수와도 같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발자크를 노려보는 드라코니안 소녀.
그는 양손을 들면서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이거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아서는 어째야 될까?”
“너, 이름이 뭐지?”
“발자크 이젠이라고 한다. 꼬마 아가씨.”
“……결정했다.”
다음 순간에 드라코니안 소녀는 조금 전까지의 사나운 모습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향해서 죽음의 선고를 내렸다.
“내가 다음으로 사냥하는 건 네가 될 거다. 발자크 이젠.”
“……풋, 크하하하하!!”
묶여져 있으면서도 당당한 그 태도가 발자크의 마음에 쏙 들었다.
‘풀어줘 볼까?’
어쩌면 과거의 망령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전투를 벌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그동안 갈고닦은 생존본능이라는 녀석이 요란하게 경고를 보내면서 제동을 걸었다.
그 소녀는 위험하다.
‘진짜로 드라코니안인가 보군.’
마장기를 끌고 전쟁터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모를까 맨몸으로 드라코니안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발자크다.
그건 호승심의 문제가 아니라 자살행위니까.
하지만 어쩌면 이 드라코니안 소녀가 자신에게 안식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진심을 담아서 행운을 빌어주었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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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제국에서 호구짓을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면 500골드를 낭비하지 않았으면 불량품콤비보다 가성비가 좋은 용병들을 몇 명이나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수중에는 아직도 괜찮은 용병 한두 명을 고용할 수 있는 돈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 사건으로 정신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바람에 여유자금을 남겨두기로 했다.
‘셀리나와 불량품콤비한테는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옆에서 지름신을 자극하던 셀리나와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페어리자매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저절로 이가 갈린다.
‘니들은 이제부터 영원히 불량품콤비다.’
사고사로 죽은 바스코를 제외하면 총 9명의 병사들을 지휘하게 된 나는, 불량품콤비를 영입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병사 하나를 다른 소대로 보내버렸다.
중대장은 뜬금없이 페어리들이 전입신고를 하는 바람에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내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신문을 펼치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그러니까 왜 금수저가 이런데서 돈지랄을 하는 거야?”라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소대와 처음으로 정식 인사를 나누는 날.
누구보다 일찍 집합한 탈리아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오면서, 뒷짐을 지고 있는 내 손으로 종이쪽지를 살그머니 건넸다.
[좋아하는 요리가 뭐야?]
‘귀여운 것.’
귓속말로 대답하려고 슬그머니 입을 가져다가 대자, 화들짝 놀라면서 기겁을 하면서 거리를 벌린다.
“뭐, 뭐하는 거야. 변태 자식아!”
“좋아하는 음식 말해달라며.”
“그냥 알려주면 되지. 왜 남세스럽게 그런 짓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깊은 짜증이 올라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탈리아와 거사를 치르는데 실패한 이후로 그녀는 3일 동안이나 방안에 틀어박혀버렸다. 그리고는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싶더니만, 다가가면 도망치고 가만히 있으면 슬금슬금 다가왔다가, 조금 접근하면 도망치는 걸 반복하고 있다.
‘중학생이냐!’
[요즘 암캐가 왜 저런데?]
[3소대 대장한테 완전히 꽂혔나본데.]
[암캐가 저러는 걸 보니까 어지간히도 끝내주나 보지?]
소문도 벌써 다 퍼져버렸다.
자기 나름대로는 들키지 않도록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유도 없이 내 방문을 서성거린다거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배시시 웃음을 터트린다거나 하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다닌다는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쌓아올린 이미지로 처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런 상태로 내버려두는 건 위험하다.
그녀의 그런 무방비한 모습은 여자라면 환장을 하고 있는 수컷들에게는, 말 그대로 침이 꿀꺽 삼켜지는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지금이야 내 눈치를 보느라고 자중하는 눈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언제 어디에서 터져버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ntr만은 안 된다. ntr만은!’
탈리아가 거친 남자들에게 능욕당하는 끔찍한 장면들을 떠올린 나는 오한을 느끼면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일이 그 지경으로 변하기 전에 확실하게 못을 박아놔야 한다.
일단 지금은 차근차근 플래그를 밟기로 했다.
“다 좋아.”
“뭐?”
“탈리아가 해주는 요리라면 뭐든지 좋다고.”
“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바보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지 모자로 또 얼굴을 가려버렸다.
‘어깨를 안아주고 싶다. 지금도 안아주고 싶지만 더 격렬하게 안아주고 싶다!’
오히려 공격을 한 내 쪽이 더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다.
본능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을 생각해보면 도망칠 가능성이 99프로. 1프로의 가능성에 도전하기에는 지금부터 할 일에 탈리아가 빠져버리면 안 되었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밉다.’
잠시 후.
소대원들이 하나둘씩 연병장으로 집결해 왔다.
탈리아도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암캐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심을 한 나는 분대장인 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병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일단 안면이 있는 불량품콤비와 클라크, 탈리아는 제외.
오른쪽 눈에는 안대를 차고 왼쪽 손에는 갈고리를 단 병사가 처음으로 내 앞에 섰다.
“이 새끼는 리틀보이야. 계급은 상병이고 전직은 폭파범이지. 급조폭발물을 만드는 데는 도가 튼 녀석인데, 구제할 수 없는 병신이라서 택시에 폭발물을 두고 내렸다가 딱 걸리고 말았지 뭐야?”
“필승, 나, 소대장에게, 선물, 준다.”
가래가 끊어지는 것 같은 탁하고 어눌한 목소리로 단어들을 끊어서 말하는 리틀보이. 그가 건네는 선물이라는 말에 일단은 받기는 했지만, 굳이 자명종을 준 이유를 몰라서 어리둥절해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지?”
“그거, 바스코가, 부탁, 소대장, 퍼엉!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대장, 귀찮은, 바스코, 죽여줬다, 기쁘다, 그래서, 선물.”
요약하자면 나를 죽이려고 만든 폭탄을 선물로 주겠다는 소리다.
“시계초침, 소리가, 타이머, 소리를, 없애준다, 알람, 맞추고, 싫어하는, 상대에게, 선물, 펑!, 소대장, 마음도, 펑!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폭탄이 터지는 상상으로 황홀해졌는지 해맑은 미소를 짓는 리틀보이의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등짝을 두드리면서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는 탈리아.
“이야, 리틀보이가 어지간한 사람한테는 자기가 만든 폭탄을 선물로 주는 경우는 없는데. 완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잘됐네, 류안!!”
“그, 그래.”
부끄러워하는 리틀보이와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탈리아의 모습을 보면 정신이 대략 멍해진다.
‘그러고 보니까 얘들 이런 녀석들이지?’
탈리아와 연애놀음에 빠져서 깜빡하고 말았지만, 이놈의 정신 나간 부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장난을 치는가 싶으면 어느 샌가 정색하면서 총을 빼 들어서 서로에게 난사를 퍼붓고, 또 어느 샌가 화해를 해서는 피 웅덩이 위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는 녀석들.
북유럽 신화에서 흔하게 회자되는 발할라의 전사들 그대로의 모습이다.
‘익숙해지자.’
그렇게 생각을 한 나는 그 능력만을 기억하기로 하면서 다음 병사들과 인사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