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48화 (24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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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7: 용의 둥지 (1)

Episode 57: 용의 둥지 (1)

“소··· 손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척 브랜슨은 오른손을 감싸 쥐었던 왼손을 천천히 뗐다.

“으··· 으아!”

피가 흘러내리자, 척 브랜슨은 상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둥대며 인벤토리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출렁거리는 붉은 색의 액체를 담은 유리병이 그의 손에 나타났다.

코르크 뚜껑을 입으로 물어 뽑아 뱉고 나서, 척 브랜슨은 허겁지겁 힐링 포션을 들이켰다.

고통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그는 벽에 기댔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쳐드니 하늘이 보였다.

원통 모양의 건물 꼭대기가 하늘을 향해 뚫려 있었다.

손 안에서 폭발한 총으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려고 차원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던전 초입에는 준비를 위한 공간, 오두막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현재 있는 공간은 너무나 생소했다.

서둘러 척 브랜슨은 상태창을 열어 차원문 정보를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20001. 랭크 A. ‘부화실(Incubation Room)’.

- 차원문 소멸 조건: 부화 장치의 이상 작동을 멈추어 부화실을 정상화할 것.

- 차원문 소멸 보상: 전설 등급 아이템 1개 또는 기존 아이템 강화 중 택일.

- 퇴각 페널티: 없음 (퇴각 불가).

“헉!”

설명을 찬찬히 읽어 가던 척 브랜슨은 ‘퇴각 불가’라는 표현을 보고 저도 모르게 외쳤다.

“너 혼자냐?”

공간을 꽉 채우는 중후한 목소리에 척 브랜슨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혼자라니, 실망이군.”

넓은 공간이라서 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척 브랜슨의 머릿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누··· 누구냐!”

“내 이름은 아스타리콘.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라고만 해두지.”

“도··· 도움이라면 어떤?”

“동료들은 언제 진입하는 거냐?”

“그··· 그건···”

“설마··· 차원문에 관광을 하러 들어온 것은 아니겠지?”

목소리는 위엄과 위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선의 대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척 브랜슨의 온몸을 휘어잡았다.

“고··· 곧 들어올 겁니다!”

“동료들이 빨리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뇨?”

“이곳은 부화실. 그러나 지금 정상 상태가 아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알이 깨지고, 병에 걸린 새끼들이 태어나고 있다. 그걸 고치는 것이 네 임무다. 그런데 너 혼자라면, 안 될 것이다.”

척 브랜슨은 벽에서 등을 떼며 벌떡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기대고 있던 것은, 반투명한 막으로 덮인 거대한 사물함 같은 것이었다.

그가 선 곳부터 하늘이 보이는 꼭대기까지, 수십 층에 걸쳐 그런 공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 칸 한 칸이 매우 큰, 벌집 같은 구조였다.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름을 떨쳐내며, 척 브랜슨은 벽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말하는 존재에게 외쳤다.

“이··· 이게 뭡니까!”

“말했지 않은가. 이건 우리의 부화실이다. 네가 기대고 있던 얇은 막의 뒤에는 우리 아이들, 그러니까 우리의 알들이 놓여 있다.”

“드··· 드래곤의 알!”

“그렇다.”

“드래곤이··· 차원문 바깥에서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많은 알들이 전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너희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 알들은 지금 병들어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걸 알아내고, 부화실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이 너희가 할 일이다.”

척 브랜슨의 관자놀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번 차원문의 과제는 예전에 그가 경험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예상하고 땀을 흘린 것은 아니다.

기분 나쁘게 낮은 주파수로 그의 귓가까지 기어 올라오는 소음.

쩌저적.

알껍질에 금이 가면서 깨지는 소리.

그 소리를 예감한 그의 본능이 땀방울이 되어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른 것이다.

흠칫하며 그는 소리가 나는 쪽에서 멀어지려고 뒷걸음질 쳤다.

*****

화염, 얼음, 그리고 어둠.

휘몰아치는 공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준기는 점멸을 써서 이동했다.

높은 숙련도로 인해 수십 미터를 이동할 수 있는 점멸이지만, 이준기는 벽 앞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속한 공간은 원통형의 비좁은 공간이었다.

지름은 약 25미터.

그게 뭐 비좁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던전의 전부라면 비좁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차원문에 진입하자마자 공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쓴 점멸이, 던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조슈아!”

시야에 들어온 조슈아를 향해 날아올랐으나, 블랙 드레이크 한 마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공중에서 용의 날개를 밀치고 땅으로 떨어진 이준기.

조슈아 테일러 역시 드레이크 몇 마리를 상대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 착지하는 이준기를 향해 그가 외쳤다.

“난! 이 던전을 클리어할 겁니다!”

레드 드레이크 한 마리가 조슈아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화염 공격을 바로 뒤잇는 이빨 공격.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 공격을 흘려보내며, 조슈아는 말을 이었다.

“나를 공격하든, 아니면 이 몬스터들을 공격하든! 그건 당신이 결정하세요!”

오른쪽에 레드 드레이크 한 마리.

그리고 왼쪽으로 블루 드레이크 두 마리.

파충류 괴물 세 마리에게 포위되어버린 조슈아가 벽에 등을 기대며 섰다.

촤르르르.

어느새 그의 오른손 안에 형상을 드러낸 ‘아시라나르의 사복검’.

총검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는 그 검이 방울뱀처럼 쉬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휘이이익!

챙!

뱀과 같이 구부러지며 오른쪽의 레드 드레이크를 향했던 사복검이 용의 발톱에 튕겨 되돌아왔다.

가슴 앞에서 검 손잡이로 칼날을 거둬들이는 조슈아 테일러.

런웨이의 끝에서 멋진 자세를 취하는 모델 같다.

가까이 있는 괴물, 이어 멀리에 선 이준기를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례로 응시했다.

이준기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 날아드는 블랙 드레이크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프로스트바이트.

미겔이 ‘량차오의 망치’로 부여해준 특수 효과로, 검은 파충류는 공중에서 잠깐 얼어붙었다.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이준기를 향해 부라리던 두 눈 역시 커다랗게 열려 있다.

푸드덕거리던 검은 날개는 공중에 박제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 테일러의 목소리.

“그거 멋지군요!”

세 마리나 되는 드레이크를 상대하면서 이준기의 싸움까지 관전하다니.

이준기는 애써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왼손의 카데쉬를 앞으로 내질렀다.

“꾸웨엑!”

블랙 드레이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을 구르며 난반사하는 파충류의 몸뚱이.

세 명의 인간, 아니 시체에 부딪히며 블랙 드레이크는 뒤로 한참을 구르다가 일어섰다.

조슈아 테일러와 이준기에 앞서 차원문에 들어왔던 구원자들이다.

나뒹구르는 블랙 드레이크를 배경으로, 또 한 마리의 블랙 드레이크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단검에 베인 날갯죽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날개의 부상으로 균형 감각이 이상해졌는지 휘청거리면서 다가오는 블랙 드레이크.

검은색의 파충류는 이준기로부터 5미터 정도 거리까지 다가와 정면을 보고 자세를 바로 세웠다.

“쿠와아!”

블랙 드레이크가 아가리를 벌려 단검 크기의 검은 물체를 뱉어냈다.

레드 드레이크가 화염, 블루 드레이크가 냉기를 뿜어낸다면, 블랙 드레이크는 바로 이것.

어둠의 볼트(bolt of darkness)를 뿜어낸다.

챙!

오른손의 단검을 가로로 들어 이준기는 어둠의 볼트를 쳐냈다.

뿌옇게 검은 색깔을 띤 무형의 물체가 금속성 타격음을 내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쩌적.

바로 옆에서 알껍데기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뱀이라도 본 것처럼 반사적으로 이준기는 몸을 피했다.

펄럭.

알껍질을 깨고 나온 그린 드레이크가 젖은 날개를 공중에 펼쳐 휘둘렀다.

그리고 곧바로 이준기를 향해 크게 벌린 아가리를 내밀었다.

“캬아악!”

진녹색의 점액질이 공중을 날아왔다.

이준기는 자세를 낮추고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선반에서 알 하나가 굴렀다.

녹색 점액질에 맞은 두꺼운 알껍질에 금이 갔다.

이준기는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면서 벽을 바라보았다.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벽이 선반으로 가득했다.

선반에는 거대한 알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협동해야 할 것 같죠?”

*****

“휴우···”

사복검의 칼날을 거둬들이며, 조슈아 테일러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 셋, 그리고 이준기의 앞에도 셋.

다양한 색깔의 드레이크가 죽어 누워 있었다.

“후우···”

이준기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차원문 바깥에서 아마 한 시간은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또 싸웠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앉아 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심정을 눈치라도 챈 것일까.

조슈아 테일러는 벽에 기대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다리도 길게 뻗으며 그는 말했다.

“좀 쉴까요? 각자 앉은 자리에서 좀 쉬죠.”

지붕 없는 원통형 건물의 양쪽 끝에 그들은 자리해 있었다.

원을 가로지르는 지름의 양쪽 끝.

이 던전 내에서 둘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위치.

그래봤자 25미터 정도의 거리다.

지금이라면.

이준기는 생각했다.

조슈아 테일러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는 것 아닐까.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이 오고 갔다.

그 상념들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또는 이번에 그의 곁을 지켜준 동료들.

헬렌 카자크, 길수연, 김창수, 문아린, 박충기, 전용택.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바실리사 엘리셰프, 미겔 산체스, 추이 이아고닉, 마빈 브리검.

그의 편에 섰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장혁수, 소현배, 주석, 고성하, 이도협.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보리스 라비노비치, 알렉세이 믈라디노프, 아브람 쉬넨코, 하시바 세이이치로, 구라모토 신스케.

그리고, 이상덕.

이상덕이 한상태로 바뀌었으나, 역사는 갈 길을 갔다.

이상덕이 일본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대신,

한상태가 일본군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간 것이 달랐을 뿐.

문아린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조금의 의심도 주저함도 없이, 이준기는 이렇게 말했었다.

시스템이 문제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모든 문제에 대해 똑같이 그럴까?

히틀러가 없었어도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물가 폭등에 이은 파시즘의 등장, 그리고 타인과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를 땔감 삼아 정권의 엔진을 돌리려는 모리배들.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었어도, 인간 본성의 밑바닥 찌꺼기를 휘감아 올려 하켄크로이츠를 만들 사람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레닌과 스탈린이 없었어도 냉전은 일어났겠지.

케네디가 아니었어도, 핵전쟁 직전까지라도 상황을 몰아 자신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협잡꾼들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마가렛 쌔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아니었어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싸구려 본능을 멋진 단어로 포장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든지 오래전에 시작되었을 역사의 한 조각이다.

마찬가지로, 조슈아 테일러가 없어도···

최후의 전쟁이 시작될까?

차원문을 방치해서 이득을 보려는 마피아와 야쿠자의 존재는 이미 조슈아 테일러를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주어진 상황에서 비용 대비 최고의 효용을 얻어내려는 것이 경제 동물인 인간의 정체성 아니었던가.

유행병의 징조를 눈치채고 생필품을 싹쓸이하는, 그런 대단히 합리적인 선택.

조슈아 테일러의 선택이라고 뭐가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구원자는 이미 특권층이다.

이미 존재하는 흑백차별을 제도화했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조슈아의 ‘샌프란시스코 선언’이 뭐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조슈아 테일러가 아니더라도, 이상덕, 구라모토 신스케, 아브람 쉬넨코···

아니, 한상태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인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뭐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표출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 곧바로 그를 처단하는 것?

그 누구를 상대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

그래서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일까?

하지만.

조슈아 테일러에게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핑계따위 대지 않고, 당당하게 지배층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

2022년 5월.

조슈아 테일러가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센터 2층 로비의 그 연단 앞에 서기 전까지, 누가 그런 상상을 했겠는가?

‘카인의 징표.’

바로 그거다.

네놈이 직접 고른 바로 그 성흔.

그것이야말로 네가 악의 씨라는 증거다.

실제로는 0.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수많은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준기는 결론을 얻었다.

이준기는 똑바로 섰다.

그리고 조슈아 테일러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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