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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5: 재기드 얼라이언스 (5)
Episode 55: 재기드 얼라이언스 (5)
차원문 바깥으로 나오니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건지, 공격대원들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차원문을 정리한 건 처음이야.”
“오랜만에 몬스터들과 싸우니 옛날 생각나네.”
“정말이야.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검인데, 타격감이 반갑더라고.”
텅 빈 동물원.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이준기는 도밍고에게 물었다.
“봐놨다는 텍스-멕스 식당 말야. 지금까지 열려 있지는 않겠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도밍고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에르난이 대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11시까지 영업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그렇다면 24시간 팬케이크 가게라도 갈까?”
추이가 이준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녁도 못 드셔서 시장하실 텐데, 미리 못 챙겨서 죄송합니다, 보스.”
“아냐. 저녁 못 먹은 건 다들 마찬가지지.”
그렇게 말하고, 이준기는 빅토리아를 향해 물었다.
“이봐, 빅토리아. 저녁 먹었어? 24시간 팬케이크 가게라도 갈까 하는데.”
불과 두 시간 전에는 서로 총을 겨누던 상대다.
야근을 함께한 직장 동료라도 되는 것처럼, 같이 야참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묻는 이준기를 보고 빅토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글렌 리가 대신 대답했다.
“오늘 밤은 휴전인 거죠?”
“물론이죠. 던전 클리어 기념 뒤풀이라도 하자는 겁니다.”
“좋습니다. 빅토리아, 율라··· 존, 멜빈···! 다 같이 가자.”
*****
글렌 리.
이름으로 보아 한국계일 가능성이 높다.
Lee인지 Li인지 물어보기만 해도 99% 알아낼 수 있는데.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
같은 한국분이라서 반갑네요, 이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잖아.
“오늘 밤은 제가 쏩니다. 뭐든지 마음껏 시켜주세요.”
글렌 리의 제안에, 이준기가 물었다.
“괜찮아요? 저는 좀 많이 먹는 편인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사드릴 수 있어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주문하겠습니다.”
이준기는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이것저것 주문하는 이준기를 다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개리 헌팅턴이 할 말 많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어제저녁, 이준기의 식사를 준비했던 그다.
저녁은 가볍게 먹겠다고 했던 이준기.
처음에는 과연 가벼운 저녁 식사라고 할 만했다.
나초 한 접시에 과카몰리 한 스쿱으로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치즈를 네 종류나 넣은 퀘사디아 세 장, 토르티야 피자 한 판 전부에 엔칠라다 한 접시까지 비운 다음에야 끝이 났다.
과카몰리는 몇 번이나 다시 가져와야 했다.
입가심으로 엔칠라다를 먹겠다는 사람을 본 것도 처음이다.
글렌 리는 커피만, 개리 헌팅턴은 맥주만 시켰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먹을거리를 주문했다.
달걀 프라이 두 개에, 베이컨, 소시지, 해시 브라운까지 듬뿍 곁들인 팬케이크 모둠 요리가 이준기의 앞에 놓였다.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고, 이준기는 눈앞의 음식을 마구 해치웠다.
실내, 그것도 밤에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식사를 하는 이준기.
그를 흘끗흘끗 훔쳐보던 율라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명한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씀 듣지 않으세요?”
이준기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대꾸했다.
“에? 누구 말하시는 건지?”
“이준기요.”
“이준기? 그게 누굽니까?”
“아, 모르시는군요.”
추이를 비롯한 킬러포니아 멤버들이 긴장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율라 패트릭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등받이 쪽으로 몸을 기댔다.
킬러포니아 길드 멤버들은 이준기의 정체를 안다.
하나하나 묘기를 보여주며 기를 꺾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 이름을 말해 버렸다.
때마침 CNN에서 이준기에 관한 뉴스를 내보내자, 상황이 쉽게 정리되었다.
여기에서도, 어디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일이 더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주객전도다.
이준기의 목표는 조슈아 테일러.
한국의 이준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이 꼬여버릴 것이다.
도대체 왜, 본 적도 없는 한국 구원자가 자신을 노린단 말인가.
어제 아침, 킬러포니아의 전 보스, 아론 페르난데스를 기다리며 이준기는 머리를 염색했다.
인상이 달라 보여야 하니 짙은 갈색 정도로 대강 하는 염색은 소용없다.
불타는 붉은 색.
머리를 감고, 거울을 본 이준기는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인상이 많이 달라 보인다.
언제나 범생이 같아 보인다는 말을 듣고 살던 이준기.
머리 색깔만 바꿨는데 양아치 느낌이다.
그런데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눈썰미가 남다른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의외로 쉽게 포기해서 다행이다.
이준기는 본론을 꺼내기 위해 빅토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3월 10일이군요.”
3월 10일. 많은 일이 일어나는 날.
그러나 그런 의미로 말을 꺼낸 건 아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시를 지나고 있었을 뿐.
이준기는 말을 이었다.
“이제 눈을 잠깐 붙이고, 길드 사무실로 찾아뵙겠습니다. 아차, 길드 사무실이 있기는 한가요?”
빅토리아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차··· 찾아온다고요?”
“산타마리아 길마, 마빈 브리검(Marvin Brigham)에게 제안할 게 있습니다.”
“마··· 마빈에게? 그게 뭔가요?”
“빅토리아가 대신 전하는 것도 좋겠군요. 시간이 없기는 하지만.”
“혀··· 협박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린 게릴라 전 수행 중이에요. 아지트의 위치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그렇다면 보스··· 아니 길마에게 전해주세요. 원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원하는··· 거라고요?”
“산타마리아 길드의 목표는 101 길드를 뛰어넘는 것 아닙니까?”
빅토리아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101 길드에 대한, 경쟁심이라기보다는 적대감이라고 해야 할 그 감정은 산타마리아 길드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길드 내부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지, 외부에 공표한 적이 없다.
조슈아 테일러에 의해 길드가 괴멸당한 다음 알려지게 되는 사실이니까, 아직은 아니다.
미래를 보고 온 이준기가 아는 것은 당연하지만, 빅토리아는 놀랄 수밖에.
“무··· 무슨 말이에요, 그게.”
빅토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자, 이준기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산타마리아가 동부 연합에 가담한 것만 봐도, 짐작이 되잖아요. 미국 전체에서 수위를 다투는 길드들 사이의 알력. 그런 건 어디에나 있죠. 멕시코에도 있고요.”
“메··· 멕시코라면 테스카틀리포카와 킬러포니아··· 얘기하시는 건가요?”
“네. 잘 아시네요. 산타마리아라면, 스탠 파운즈의 브루클린 길드, 그리고 키건 하워즈의 101 길드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길드 중 하나잖아요. 그런데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캘리포니아의 101 길드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뉴욕의 브루클린 길드와 함께 동부 연합을 만들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 그렇게 되나요···”
“빅토리아는 어때요? 101 길드가 싫어요?”
머뭇거리는 빅토리아 대신, 글렌 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캘리포니아 놈들··· 재수 없죠.”
글렌 리를 향해 이준기가 웃어 보였다.
“바로 그겁니다. 우리 킬러포니아 길드도, 캘리포니아가 싫어요. 길드 이름만 봐도 아시겠죠?”
*****
숙소를 찾아 잠을 푹 자고, 이준기는 추이, 개리와 함께 산타마리아 길드 사람들과 만났다.
분주한 아침 시간, 휴스턴 시내 한복판의 스타벅스는 붐볐다.
줄을 서는 대신 사이렌 오더로 커피를 주문하고, 사람들은 테이블 주위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둘러앉았다.
어차피 들고 가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자리는 충분했다.
이렇게 북적거리는 곳에서 구원자들이 전쟁 모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타마리아 길드 쪽에서는 약속대로 세 명이 나왔다.
길마 마빈 브리검과 함께 어제 테러 팀의 두 명, 빅토리아 라슨과 글렌 리가 나왔다.
마빈 브리검은 금발 콧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5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는 킬러포니아 멤버들을 한번 죽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멕시코 분들이라면서, 이 붉은 머리의 동양인은 누굽니까?”
추이가 곧바로 발끈했다.
“보스에게 불경하게 대하는 건 참지 못한다!”
빅토리아도 끼어들었다.
“길마님, 이 사람이 킬러포니아의 보스입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었음에도, 마빈 브리검은 점잖은 체했다.
“아, 그래? 이거, 실례했소. 나는 산타마리아의 수장, 마빈 브리검이오. 그쪽은?”
“나는 킬러포니아의 새 길마, 스즈키라고 합니다.”
“스즈키? 일본인인가?”
“아닙니다. 풀 네임은 스즈키 알료샤. 일본계 러시아인입니다.”
“러··· 러시아?”
“왜요? 러시아라서 싫으십니까?”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놀랐소. 멕시코 길드의 수장이 러시아 사람이라고요?”
“실력으로 서열이 결정되는 게 우리 세계 아닙니까. 도전자에 패하면 타이틀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죠.”
추이가 침을 삼키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빈이 물었다.
“그러니까··· 러시아에서 온 그대가 킬러포니아의 두목을 쓰러뜨렸다는 겁니까?”
이준기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대단하시군요. 러시아에는 실력자가 많은가 봅니다. 킬러포니아의 두목은 실력이 대단한 자라고 들었는데.”
“브리검 씨도 대단하군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구원자 판에서 그렇게 높은 레벨과 지위를 유지하시다니.”
“구원자한테 나이가 무슨 상관이오.”
“나이와 마찬가지로, 국적도 상관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흠. 그런가···”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101을 치자는 것 말이오?”
“네.”
“과연 솔깃한 제안이오. 하지만 우리가 그걸 원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어제, 아니 몇 시간 전에 빅토리아에게 얘기했는데요. 미국 길드 판을 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우린 명시적으로 101을 적대한 적이 없소. 동부 연합에 가담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동부 연합에 가담한 걸로 스탠스를 분명히 한 것 아닙니까? 101을 밀어내고 나면, 미국 전체를 먹는 것은 스탠 파운즈의 브루클린 길드, 아니면 브리검 씨의 산타마리아 길드, 둘 중의 하나가 되겠죠.”
“그렇게 되겠지. 그게 언제냐가 문제지만.”
“서부 전선 대 동부 연합. 그렇게 에둘러 갈 이유가 없습니다. 원하는 목표를 직격하세요.”
“글쎄, 그게 쉬울까?”
“브루클린 길드에 다른 길드들까지 줄줄이 가세했는데도 서부 전선에 밀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서부 전선에 별 이상한 떨거지들이 다 가담했기 때문이지. 미네소타, 일리노이, 게다가 버지니아라니!”
“웨스트 버지니아는 동부 연합 쪽이잖습니까?”
“그따위 촌 동네 떨거지들은 필요 없소. 머릿수도 얼마 안 되고.”
“뭐, 제대로 보셨습니다. 시카고와 미네아폴리스가 가담한 게 크죠. 101 길드 자체만 봐도 규모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포인트가 뭐요?”
“우리는 뭉치고 적들은 분열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다대다로 연합해서 싸우는 거라면 일대일 매치에 비해서 좋을 것도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연합에서 탈퇴해서 101을 직접 치라는 거요?”
“왜, 안 됩니까?”
“캘리포니아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있소. 텍사스도 겨우 지키는 판국에 뭘 어쩌란 말요?”
“그러니까 기습이 더욱 유리하죠. 참호전도 아니고 전선이 무슨 소용입니까? 산타마리아에서 10명, 우리가 10명 정도 동원해서 차 타고 캘리포니아로 들어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마빈 브리검은 콧수염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킬러포니아는 왜 101을 치려 하는 거요?”
“캘리포니아는 원래 우리 땅이니까요.”
“뭐요?”
브리검이 언성을 높이자, 카페 안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멋쩍게 웃으며, 브리검은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흩어지자, 브리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요? 캘리포니아를 떼어달라는 건 아니겠지?”
“왜요? 브리검 씨는 텍사스주 분리주의자 아닙니까?”
“아··· 아니, 그건 또 어디에서···”
“언론 인터뷰에서 많이 얘기하셨던데요.”
“그··· 그건 맞지만, 캘리포니아를 외국에··· 그것도 멕시코에 넘기는 거라면 그건 다른 차원의 얘기요.”
“어떻게 그렇게 되죠? 텍사스가 별도의 국가가 되면, 캘리포니아는 외국 땅에 불과합니다. 그게 어느 나라로 가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 그게···”
“멕시코라서 싫다는 겁니까?”
“아··· 아니! 그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시오.”
“그렇게 인종주의적으로 나온다면, 동맹 제안은 철회하겠습니다.”
“아··· 아니, 잠깐!”
당황하는 브리검.
이준기는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일어섰다.
브리검이 서둘러 말했다.
“제안을 수락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