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36화 (23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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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4: 전쟁의 신 (5)

Episode 54: 전쟁의 신 (5)

오후 10시가 한참 넘어서야 동부 연합의 답변이 도착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존 백스터.

금발 머리는 길게 길러 목덜미까지 내려오고, 콧수염은 윗입술을 덮고 있다.

밀짚모자라도 쓰면 19세기에서 날아왔다고 해도 믿을 만한 비주얼이다.

애틀랜타에서 세계 최초의 길드 ‘남부의 힘’을 창립한 교육자 출신의 구원자.

객장 같은 느낌으로 미국 내전에서 동부 연합에 가담하고 있다.

미국 남부를 어우르는 별도의 세력을 가진 만큼, 동부 연합 내에서는 총사령관 스탠 파운즈의 바로 다음 위치다.

추이가 화면에 나타난 그를 보고 놀라서 말했다.

“존 백스터!”

“안녕하신가?”

“존, 왜 당신이 직접 연락을 하는 거지?”

“중요한 건이니까 그렇지 않겠소? 우리 미국 쪽이 이 정도로 예의를 갖추었으면, 그쪽도 마찬가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얘기요?”

“아론 페르난데스와 직접 이야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보··· 보스는 지금 여기에 없소.”

“멕시코 시티가 아니라는 겁니까?”

“난 지금 티화나에 있소. 캘리포니아 공략 중인 것, 아시잖소?”

“그렇다면 멕시코 시티로 연락을 해야 합니까? 전략을 완전히 바꾸는 건인 만큼, 내가 보스와 직접 이야기를 하겠소.”

“보스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소. 연락을 받을 수 없을 거요.”

“예상대로군요, 추이 이아고닉. 거짓말을 하려면 좀 연습을 하고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 무슨 말입니까!”

존 백스터도 제법이었지만, 사실은 추이 이아고닉 쪽이 한 수 위였다.

서툴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당황한 척하는 것도 다 이준기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존 백스터는 카메라 방향으로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그쪽에 뭔가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군요. 보스가 살해당하기라도 한 겁니까?”

“그··· 그게 아니오! 보스가 다친 것은 맞지만··· 며칠 치료받으면 되는 수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그쪽 최고 결정권자는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죠?”

“그렇소. 내게 말씀하시오. 보스가 내게 전권을 넘겨줬으니까.”

“보스가 부상을 당한 비상 상황이라면, 평소대로 하는 게 정답 아닙니까? 보스에게 변고가 생겼는데 길드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를 변경하려고 한다는 게 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보··· 보스의 지시입니다!”

“그렇다면 보스가 내게 직접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잠깐 통화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보스는 지금 잠들어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을 하면 되겠군요?”

“아니, 그런 일은 우리가 거부하겠소. 그래서, 대답을 하시오.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전략을 변경해줄 수 있소?”

“그건 내 마음에 달려 있소. 하지만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러니까, 거절한다는 거요?”

“그렇소. 아론 페르난데스가 직접 내게 설명한다면, 고려는 해보겠소만.”

“정말로 거절한다는 겁니까? 대가를 치르고라도?”

“대가? 용병 계약을 깨는 것 외에,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바로 그거요. 우리 제안을 거부한다면 당장 철군하겠소.”

“하하하! 추이 이아고닉, 당신은 정말 속이 뻔히 보이는 남자군.”

“내일 아침 9시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스탠 파운즈와 잘 상의한 다음에 대답을 해라.”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다. 대답은 마찬가지야. 당신들 제안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계약 파기다.”

“그래? 내일부터는 히스패닉 사냥이군.”

“뭐라고?”

“네놈들··· 반이나 살아서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우릴··· 동맹군을 공격하겠다고?”

“동맹? 너희들은 용병이다. 대가를 받고 싸우는 자들이지. 국제법적으로 범죄자들이란 말이다. 하긴, 원래 범죄자들이지.”

“존 백스터!”

추이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고, 상대방은 통화를 종료했다.

추이가 이준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스가 말씀하신 대로 됐습니다. 미국에 가 있는 부하들에게 미리 철군 명령을 내리기 잘했군요.”

“그래 봐야 겨우 3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피해는 만만치 않을 거야.”

“그래도··· 보스 덕분입니다. 얻을 것도 없는 전쟁에 끼어들어 피해만 볼 뻔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빠지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감사의 말은 아직 일러. 잘 자고 내일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보스. 안녕히 주무십시오. 급하게 마련하느라, 잠자리가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이준기는 주위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이 정도면 훌륭해. 리무진은 처음 타보는 것 같은데.”

맨 뒷자리에 앉아, 이준기는 좌석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휴스턴까지는 21시간.

이제 18시간이 남았다.

*****

“아린 씨?”

길수연이 문아린을 향해 인사했다.

“수연 씨!”

대답하는 문아린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짙게 묻어났다.

“수연 씨! 어떻게 여기에··· 언제 러시아에 온 거예요?”

“신입 회원, 인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길수연은 점퍼 왼쪽에 달린 SSF 배지를 가리켰다.

“SSF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럼, 길드는요?”

“길드도 협회도 탈퇴했어요. 그리고 구원자도 은퇴했고요. 아린 씨가 했던 대로 똑같이 따라 했어요.”

“이런 곳에서 뵈니 반갑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요? 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글쎄요? 제가 한 행동뿐이 아니라, 그 이유도 아린 씨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 저는···”

문아린은 생각했다.

구원자를 은퇴하게 된 것은 한상태의 공작에 의한 대통령 긴급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구원자 활동을 완전히 정지한 상태였다.

그냥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길수연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그 길수연이 이제는 문아린을 따라 SSF에 가입하고 러시아에 온 것이다.

길수연이 물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는 아린 씨 관할이라고 하던데요. 전 뭘 해야 하는 거죠?”

“정식으로 이곳에 배치를 받으신 거예요?”

“네. 놀래켜 드리려고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요.”

“잘 오셨어요. SSF가 러시아에서 하는 일은, 범죄자들을 통제하는 겁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러시아 범죄 조직은 구원자를 고용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아니타에게 들었어요. 아 참, 준기 씨는··· 만난 거죠?”

“네.”

“거 봐요, 준기 씨는 살아 있을 거라고 제가 그랬잖아요.”

*****

아침 해가 밝아오자, 이준기는 잠에서 깼다.

리무진이라고는 해도, 차 안에서 잠을 자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준기는 허리를 펴고 양팔을 벌려 기지개를 켰다.

“깨셨습니까, 보스.”

“좋은 아침입니다. 보스.”

이준기와 함께 이동하는 것은 추이 이아고닉, 그리고 개리 헌팅턴이다.

휴스턴까지 차로 가려면 결국 미국 고속도로를 달려야 한다.

티화나에 비해 검문이 허술한 메히칼리에서 국경을 넘었다.

개리 헌팅턴의 마법 아이템, LAPD 배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몇 시지?”

“7시 11분입니다, 보스.”

“어디쯤이야?”

“텍사스에 진입했습니다. 조금 전에 엘 파소(El Paso)를 지났습니다.”

“시간으로는 얼마나 온 거지?”

“어제 티화나를 출발한 것이 저녁 8시경이었으니까요, 10시간 정도 달렸습니다.”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은?”

“10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내비에 22시간 걸린다고 나오지 않았었나?”

“좀 밟았습니다. 밤이라 차도 없고 해서.”

“운전 실력이 대단하군. 속도를 낸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

운전사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보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티화나를 출발한 것이 저녁 8시경.

10시간 남짓을 달렸으니 캘리포니아 시간대로는 아직 6시 11분이다.

시차로 인해 7시 11분이 되었다.

“10시간 뒤에 휴스턴에 도착한다면, 여기 시간으로는 오후 5시 11분이군.”

“휴스턴 시간으로는 6시 11분입니다.”

“운전, 조금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침 드실 장소 찾아볼까요?”

“아니, 아침은 먹지 않아. 조금 더 가서 점심을 먹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지도를 찾아본 것인지, 개리의 대답은 곧바로 이어졌다.

“4시간 정도 가면 셰필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식당을 하나 봐두었습니다. 텍스-멕스 식당입니다. 괜찮으십니까?”

“4시간 뒤라면, 11시 정도? 아침 겸 점심으로 괜찮겠군. 좋아.”

*****

문아린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서, 길수연은 말했다.

“자세한 설명, 고마워요. 우리나라만 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었군요. 4대 마피아, 푸가초프에 우크라이나, 유럽연합군, 게다가 한일 연합군까지··· 머리가 뱅뱅 돌 지경이에요.”

“괜히 설명 드렸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SSF가 하는 일은 결국 치안 유지 정도니까, 굳이 이곳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셔도 상관없는데.”

“아녜요.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준기 씨처럼 과감하게 결정하는 게 가능한 것 아닐까요?”

“그건 그렇겠죠.”

푸가초프라는 조직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 조직의 핵심이 이준기의 동료라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

김창수가 푸가초프에 입회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었다.

김창수는 한일 연합군 2차 원정대에서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입이 무거운 길수연이기는 하지만, 김창수의 동의 없이 그의 존재를 발설할 수는 없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군요? 마피아 잔당과 정체불명의 외국 침략자들 사이의 전투, 4대 마피아 잔당 사이에서의 알력 다툼, 그리고 푸가초프.”

“그래요.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도대체 러시아 사람들은 언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도 협회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와 비교하면 천국이네요.”

“외세가 개입하는 한, 자정은 어렵다고 생각해요. 푸가초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러시아에도 자정 노력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4대 마피아 중 하나인 극동 마피아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으니까, 더 나아질 겁니다.”

“아니타 기억하시죠?”

“그럼요. 잘 지내죠?”

“잘 지내더군요. 아린 씨 보고 싶다고 하던데요. 아린 씨 덕분에 승진했다고.”

“그건 좀 과장된 거예요. 아니타가 다른 사람들 칭찬을 많이 하니까요.”

“승진도 하고 제네바로 옮기기는 했는데, 일은 더 힘들어졌나봐요. 자기는 소도시 체질이라면서 제네바같이 큰 도시는 별로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제네바 인구를 찾아봤죠. 20만 정도 되던데요? 우리나라로 치면 시골이잖아요?”

“저도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베른에서는 며칠 안 있었지만.”

베른 이야기가 나오니, 구르텐에서 마셨던 사발 커피가 생각났다.

이준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인데, 커피를 다시 마시게 만들었던 바로 그 커피.

길수연은 아니타 이야기를 계속했다.

“SSF의 주요 활동 무대가 유럽이다 보니까, 유럽 정세가 복잡해진 게 힘든가 봐요. 폴란드 최대 길드 ‘솔리대리티’는 반으로 갈라졌고, 국경 지방에는 자꾸 독일인 구원자들이 출몰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니타가 오스트리아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신경 쓰이나 봐요. 아가타 사태로 독일, 오스트리아에 반폴란드 정서가 팽배한데, 그에 발맞추어 네오 나치들이 준동한다는 거죠.”

“그건 정말 최악인데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게요.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구원자들을 선동하면 정말 큰일 아녜요?”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타국에 나와 살아도, 아무래도 고국 생각이 많이 나나 봐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수연 씨는 어때요?”

“저는 한국 떠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으니까요.”

“수연 씨, 점심 아직이죠?”

“아, 점심시간이네요. 어디 좋은 식당이라도 있어요?”

“러시아식 정찬은 저녁때 드시고, 점심은 간단하게 어때요? 러시아에 오셨으니, 이걸 드셔야죠.”

궁금해하는 길수연의 앞에, 문아린이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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