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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4: 전쟁의 신 (3)
Episode 54: 전쟁의 신 (3)
티화나 시내에서 남서쪽, 레알 델마에서 C 등급 던전을 정리하는 데는 채 3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B등급 던전은 치와와주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준기는 추이와 개리를 데리고 C 등급 던전에 들어갔다.
킬러포니아 길드의 보스, 아론 페르난데스가 앞뒤를 재지 않고 덤비는 바람에 이준기는 졸지에 길드 전체를 떠안게 되었다.
원래는 추이와 단둘이서 캘리포니아에 넘어가 소란을 일으켜 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멕시코의 거대 길드, 킬러포니아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서부 전선과 싸우는 동부 연합의 전략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로 돌아온 추이는 이준기의 명령에 따라 동부 연합에 연락을 취했다.
아이패드를 통한 화상통화.
화면에 히스패닉 여자가 나타났다.
베라 로페즈(Vera Lopez). 텍사스주 소재 산타마리아(Santa Maria) 길드 소속 구원자.
동부 연합에서 멕시코와의 연합 작전을 총괄한다고 한다.
카메라의 사각에 서서, 이준기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안녕, 베라.”
“무슨 일이죠, 이아고닉 씨?”
“뭘 그렇게 딱딱하게 불러. 추이라고 부르라고.”
“추이는 무슨··· 그나저나 안토니오 반데라스 씨는 어디 갔어요?”
“보스는 쉬고 계셔. 그리고 원래 너와의 연락 담당은 나다.”
“좋아요.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죠. 무슨 일이에요?”
“전략 변경을 요청하려고 한다.”
“전략 변경이라니요?”
“지금 이런 식으로는 서부 전선을 꺾을 수 없어. 게릴라 전으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우리도, 적도 피곤해지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전면전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왜 게릴라 전이라는 전략을 채택했는지 잊었어요?”
“조슈아 테일러는 아직 참전하지도 않았어. 이대로라면, 우리가 승기를 잡아도 조슈아 테일러에 의해 다시 뒤집힐 수 있다.”
“하하하. 조슈아 테일러가 무섭긴 무섭나 보군요? 조슈아 테일러가 미국 랭킹 1위이기는 하지만, 겨우 한 사람이 전황을 뒤집는다고요?”
“하이 랭커 구원자를 겨우 한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갑자기 왜 그래요? 언제나 자신만만한 추이 이아고닉 어디 갔어요?”
“계산을 좀 해봤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엊그제에도 부하가 하나 죽었어.”
“사람 죽는 일은 매일 일어나죠. 믿던 심복이라도 죽었어요? 왜 그렇게 기운이 처진 거예요?”
“죽은 녀석은 디에고 라몬. 37레벨이었다.”
“37레벨이면 조금 아깝긴 하겠군요. 하지만 이건 전쟁이에요. 40레벨 넘는 구원자들도 매일 죽어 나간다고요. 겨우 그걸로 생각이 바뀐 거예요? 계약 내용을 잊은 건 아니겠죠?”
“계약 내용에 작전 변경을 절대로 금지한다는 규정은 없잖아.”
베라 로페즈는 계약서 문구를 외우기라도 하는 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모든 전략은 양측이 합의하여 결정한다고 되어 있죠.”
“그래서 지금 협의를 요청하는 거야.”
“정말로 그게 문제예요? 디에고인가 하는 사람이 죽은 거?”
“한 명이었어.”
“네?”
“겨우 한 명이 우리측 정찰대를 상대했다. 죽은 건 디에고 한 명이었지만, 전부 제압당한 상황이었지.”
“디에고가··· 캘리포니아에서, 그러니까 샌디에이고에서 죽기라도 한 거예요?”
“그래, 맞아. 샌디에이고 라호야에서 죽었다. 조슈아 테일러의 동료거나, 적어도 101 길드 멤버라고 봐야 해.”
조슈아 테일러의 ‘부하’에게 죽었다고 말하라고 했건만, 추이는 이제 자기 보스가 된 이준기를 ‘부하’라고 지칭할 수 없었는지, ‘동료’라는 단어로 바꿔 말했다.
디에고를 죽인 것은 이준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동부 연합에 전략 변경을 요청하기 위해, 이준기는 추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라고 지시했다.
샌디에이고 정찰대가 무시무시한 적을 만났다고.
추이가 말을 계속했다.
“조슈아 테일러 본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주 막강한 구원자였어. 그런 막대한 전력을··· 지금 서부 전선은 예비 전력으로 가지고 있다. 그걸 제거하지 못한다면, 동부 연합의 승리는 없어.”
“그거, 도발하는 거예요? 게릴라 전이나 하고 있으니 우리가 우습게 보여요? 조슈아 테일러를 상대할 만한 실력자는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어요. 드레 럭러스터도 있고, 스탠 파운즈 회장도 있잖아요? 존 백스터도 있어요.”
“그래서, 그들도 조슈아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래요. 파운즈 회장님도 그렇고, 지도부는 아직 현장에서 뛰지는 않고 있으니까요.”
“드레 럭러스터는 살아 있나?”
“무슨 실례의 말이에요, 그게!”
“소문이 무성하니까 묻는 거야. 드레 럭러스터가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지 않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어!”
“유튜브 채널 유지가 민심 장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 지도부가 판단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채널은 왜 그대로 열어두는 거지? 계정도 그대로 있잖아.”
“그건··· 나중에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서 놔두는 거예요. 그래요, 전쟁이 끝난 다음에··· 홍보 채널로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드레 럭러스터의 채널은 구독자가 백만이 넘어요. 그걸 없애라고요?”
“좋아. 그건 그렇다고 하지.”
“뭘 ‘그렇다고’ 해요? 사실이 그런 건데.”
“알았어. 그래서, 대답은?”
“전략 변경 말하는 거예요? 도대체 전략을 어떻게 바꾸기를 원해요?”
“모든 전력을 모아 한 곳을 친다.”
“어디를요? 계속 말해봐요.”
“서부 전선 최대의 뇌관은 캘리포니아야. 텍사스도 동부 연합에 가담한 이상, 서부에는 캘리포니아를 빼면 아무것도 없지. 그러니까, 모든 힘을 한 점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힘을요? 우리 전부 다 캘리포니아로 몰려가자는 거예요?”
“그래. 드레 럭러스터, 스탠 파운즈, 존 백스터··· 열외는 없다. 동부 연합 전원, 그리고 우리 킬러포니아 길드 전원이 한날한시에,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를 치는 거야.”
“하아···”
“다른 전력이 있다면, 그들도 모두 같은 시각에 그곳으로 집결시킨다. 퀘벡 분리주의자들, 그리고 어쩌면 테스카틀리포카도 말이야.”
“테스카틀리포카?”
“우리 라이벌 길드 말이다. 너희 동부 연합은 아마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제시한 것과 비슷한 계약을 들이밀지 않았을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멕시코 연합군 담당은 바로 저예요! 제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아니면, 베라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
“뭐예요?”
“난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냐, 베라. 나라도 그렇게 이중 계약을 하려고 했을 테니까.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는 우리 편이야,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그들과 접촉한 적도··· 없어요!”
“좋아. 당신을 믿어. 하지만 전략 변경은 필요해. 지금 중요한 것은, 조슈아 테일러를 끌어내는 거니까. 필요하다면 내가 미국으로 가서 동부 연합의 누구든 만나겠다. 파운즈 회장이든, 드레 럭러스터든.”
“아··· 알았어요! 이건 내가 단독으로 결정할 게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 지도부에 연락해 보고 다시 연락할게요.”
*****
미국 측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이준기는 다른 일도 체크했다.
라이벌 길드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한 첩보.
그걸 아론 페르난데스가 직접 하지는 않았을 테니, 길드의 누군가는 그 일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보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추이는 첩보망에 대한 지휘권이 이제 자신에게 있으니 당장 인수인계 보고를 받아야겠다고 각 지부에 통보했다.
갑자기 보스가 사망했다는 뉴스에, 각 지부장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뭡니까? 보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뇨!”
“미국 놈들 짓입니까? 아니면 테스카틀리포카?”
멕시코 시티 지부장만은 다른 질문을 했다.
“이아고닉 님, 보스는 당신을 만나겠다고 가셨는데요? 암살이라도 당하셨다는 겁니까?”
“그래, 네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당연하다. 나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암살자가 티화나 사무실로 찾아왔다. 보스는 일대일 대결을 받아들였다가 패배해서 돌아가셨다.”
“뭐라고요? 보스 성격이라면 그런 도발에 넘어가실 만도 합니다만··· 이아고닉 님은 그걸 보고만 계신 겁니까?”
“보스가 그렇게 다짐을 받았다. 일대일 대결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보복하지 말라고.”
“그··· 그런! 상대는 미국 놈입니까?”
“그래.”
“이름은요?”
“그건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동양계였다.”
“동양계? 캘리포니아 놈이라는 겁니까?”
“그래.”
이준기의 시나리오대로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멕시코 시티 지부장에게 대답하느라 추이는 전화를 든 채 진땀을 흘렸다.
전화를 마치고, 추이는 이준기에게 말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런 식으로 조직 관리가 가능할까요? 그냥 보스가 아론을 죽이고 조직을 통째로 빼앗았다고 하시는 것이···”
“한국에서 온 구원자가 멕시코 갱을 털었다. 그렇게 말하라고?”
“개··· 갱들은 힘에 굴복하는 법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야. 그들을 굴복시키려면, 나는 다시 쇼를 해야 한다고. 내가 무슨 유랑 마술단도 아니고, 언제 그걸 하고 있어?”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죠. 아무도 보스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없어. 그리고···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한 정보는 사실 몰라도 상관없다.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어.”
“짐작 가는 곳이라면?”
“굳이 너까지 알고 고민할 필요는 없는 정보다. 이 정도만 얘기해두지. 테스카틀리포카는 다른 형태로 미국 공격을 준비 중일지도 몰라. 아론의 첩자가 내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를 가지고 온다면,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
“다른··· 형태로 미국을 공격한다고요?”
“추이. 러시아 전쟁이나 중국 내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뉴스에 매일 나오니 모를 수가 없죠.”
“그런 전쟁들은 왜 일어나는 걸까?”
“그··· 글쎄요.”
“너는, 아론은 왜 동부 연합에 가담하려고 한 거지?”
“그야··· 이권 때문에···”
“아니, 단순히 그런 문제는 아니지. 너희 길드 이름, 킬러포니아잖아. 유치한 작명이지만, 나름 의미심장한 작명이기도 하지.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땅이 아닌데, 왜 너희 길드 이름은 캘리포니아를 변형한 거지?”
“그··· 그건···”
“그건 너희들이 캘리포니아를 빼앗긴 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네··· 그렇습니다.”
“미국에 땅을 빼앗긴 걸로는 멕시코와 비교할 나라가 없지. 하지만 땅이 아니더라도 미국에 뭘 뺏긴 나라는 남미에 넘치지 않아?”
“그··· 말씀은···”
“전쟁은 국가 규모에서 표출되는 증오다. 원한은 증오 중에서도 뿌리 깊은 종류의 것이지.”
“그렇다면, 테스카틀리포카는 미국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겁니까?”
“적이 분열되었을 때, 그 한편을 들어 공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지. 너희 길드가 지금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대의명분이라든가, 전쟁 이후의 여론 따위를 생각하면 그냥 우직하게 정면에서 공격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효과만 보면, 진주만 기습은 훌륭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선전포고를 생략한 그 공격을 비난했지. 마찬가지 얘기야.”
“테스카틀리포카가 정말로 미국에 대한 단독 공격을 준비 중이라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단독 공격이 아닐 수도 있어.”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추이에게, 개리 헌팅턴이 다가와서 말했다.
“차··· 찾았습니다. 아론 페르난데스의 스파이···”
“뭐라고?”
“저··· 전화가 와 있습니다.”
“이리 줘봐.”
추이는 허겁지겁 개리에게서 전화를 빼앗았다.
“여보세요?”
“보··· 보스가 죽었다고요? 그렇다면 제 가족은요?”
“무슨 소리냐? 너는 누구야?”
“제 이름은 알레한드로 후아레스(Alejandro Juarez)입니다. 테스카틀리포카 조직원입니다.”
“뭐, 뭐야?”
“제 가족이 아론 페르난데스에게 인질로 잡혀 있어요! 그래서 그동안 스파이 역할을 한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론이 죽었다고요! 제 가족의 위치를 아십니까? 아론이 그걸 말하고 죽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