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33화 (23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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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4: 전쟁의 신 (2)

Episode 54: 전쟁의 신 (2)

와장창!

창문이 깨졌다.

이준기의 텔레키네시스는 아론 페르난데스의 몸을 거칠게 잡아당겨 창문을 깨고, 피투성이가 된 그 몸을 공중에 매달고 있었다.

고통에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아론은 곧 눈을 뜨고 20미터 상공에 매달린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염력에 허리가 붙잡힌 채,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아론 페르난데스.

유리창 파편이 비처럼 내리는 게 보였다.

총알은 어떻게 됐지?

기관총은 어디로 갔지?

손으로 꽉 붙잡고 있었는데.

궁금했지만, 허리 한 곳에만 매달려 공중에 늘어뜨려진 몸을 그는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어려운 걸 보면, 아마 목을 다친 모양이다.

영화도 아니고, 고급 사무실 건물의 단단한 유리창을 몸으로 깼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아론!”

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바로 옆의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인데, 아주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몸이 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공포 때문인지, 청각도 이상한 것 같다.

반쯤은 음 소거가 된 느낌으로, 반쯤은 신디사이저로 에코를 잔뜩 넣은 느낌으로, 추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아론!”

벌떼가 아론의 주위를 맴돈다.

가만히 보니, 자신이 발사했던 기관총 총탄들이다.

벌처럼 군체를 이뤄, 공중에 떠 있는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텔레키네시스로··· 이런 게 가능하다는 말이지, 저놈은?’

흩어져 내리는 유리 파편이 햇살에 빛난다.

귓가를 거쳐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이 하나둘, 유리 조각의 비에 섞여 내린다.

구원자로 각성하고, 갱들을 제압해서 두목 노릇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다른 녀석의 손에 운명이 결정되게 할 수는 없지.

고개는 돌릴 수 없지만, 운 좋게도 오른팔은 잘 움직인다.

오른팔을 한두 차례 안쪽으로 굽혀본다.

오른팔 안쪽 근육에 힘을 주자, 손목 안쪽에 장치해 놓은 권총이 튀어나온다.

“아아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론은 오른손에 쥐어진 권총을 오른쪽 관자놀이에 가져다 댄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신체의 고통으로 인해 떨리는 손.

방아쇠를 당긴다.

여전히 공중에 뜬 채로, 아론의 몸이 축 늘어졌다.

*****

“멍청한 놈.”

아론의 몸이 힘없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 추이는 내뱉었다.

그리고 창문에서 멀어졌다.

이준기가 물체들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아론의 몸을 맴돌던 총알 무더기.

생명이 빠져나간 아론의 육체.

그리고 유리 파편들이 차례로 깨진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빠르게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고, 추이는 아론과 함께 들어왔던 부하에게 지시했다.

“아론의 시체를 옮겨라. 장례식은 사흘 뒤로 해라. 참석할 수 있으면 나도 참석하겠다.”

“가족에게는··· 추이 님··· 아니 보스가 연락하시겠습니까?”

“아니. 난 바빠. 모든 걸 너에게 일임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몸을 돌리자, 아론의 시체는 커튼으로 덮여 있었다.

추이는 이준기를 향해 똑바로 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모든 게 정리된 것 같군요, 보스. 오후 일정은 아까 말씀하신 대로 하시겠습니까?”

*****

“꽤 멀군?”

이준기의 물음에 추이가 대답했다.

“국경에 가까운 차원문은 아무래도 좀 껄끄러워서요, 생기는 대로 빨리 처리합니다.”

“조슈아 테일러 때문에?”

“미국과 말썽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상 그렇죠. 조슈아 테일러가 그렇게 애향심이 투철한 구원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준기가 원래 제안했던 대로, 추이와 이준기는 차원문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티화나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이나 이동해야 했다.

“푼타델마(Punta Del Mar)?”

“네. 그 근처입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근처에도 그런 지명이 있는데, 델마(Del Mar)라고. 무슨 관계지?”

“글쎄요? 아시겠지만, 델마는 ‘바다의’라는 뜻이니까요. 푼타 델마는 영어로 번역하면 바다 끝자락(Tip of the Sea) 정도 되겠죠. 태평양 바로 옆이다 보니 이 근처에는 델마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이 많습니다. 차원문이 열린 곳 이름도 레알 델마(Real Del Mar)거든요.”

“레··· 레알 델마?”

이준기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켰다.

레알은 스페인어로 로열(royal)이라는 뜻이니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겠지만, 레알 델마라고 하니 마치 ‘여기가 진짜 델마’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라호야의 테일러 가 저택에 살지 않는다는 조슈아.

캘리포니아에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나타나고는 한다.

그래서 라호야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근방에 산다고 다들 추정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바로 델마.

라호야에서 북쪽으로 겨우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다.

라호야와 마찬가지로, 아니 이제는 라호야보다도 더 부촌인 곳.

그곳에 줄을 지어 서 있는 부자들의 별장 중 한 곳이 조슈아의 거처라는 것이다.

“이준기 님이 새로 우리 조직의 보스가 되신 이상, 조직 운영 방침에 변화가 필요합니다. 몇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도 잠깐 얘기했지만, 내 방침은 조직 해체다. 그래도 나를 보스로 세우겠다는 거야?”

“그것이 보스의 생각이라면, 그게 우리 조직의 운명인 거겠죠.”

“운명?”

“보스는 신을 믿지 않으시지만,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보스가 멕시코 땅에 오시게 된 것도, 새로 저희들의 보스가 되신 것도, 다 신의 뜻입니다. 그게 운명인 거죠.”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도 편하기는 하겠군.”

“그래서, 조직 운영 관련해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제일 큰 문제는, 아시겠지만 미국 원정 문제입니다. 상황을 관망하면서 소극적으로 개입하고는 있지만, 인명 피해는 누적되고 있습니다. 피라미들이라고는 해도, 구원자는 구원자니까요. 게다가 일반인 갱들도 꽤 죽어 나가고 있고, 돈도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돈이 들어가는 건 국경 통과 때문이겠지?”

“네. 동부 연합에서 도와주고는 있지만,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는 것으로 해서요.”

“추이, 네 생각은 어때? 미국 내전에서 동부 연합이 승리할 것 같은가?”

“그··· 글쎄요.”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 네 의견을 듣고 나면 내 생각도 말해주지.”

“아··· 알겠습니다, 보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부 전선 쪽 로스터도 화려하지만 동부 연합 쪽 로스터도 못지않게 화려하니까요. 밴쿠버의 캐넉스 길드가 서부 전선 쪽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캐나다 퀘벡 쪽은 동부 연합 편이고, 우리 길드도 미약하게나마 돕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마 테스카틀리포카 길드도 동부 연합의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도박을 할 때도 딸 가능성을 보고 돈을 거는 거잖아? 동부 연합에 베팅을 하는 거라면, 성공 가능성을 얼마나 보고 있는지, 그래서 어디까지 베팅을 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거야.”

“글쎄요··· 동부 연합이 이길 가능성은 40% 정도라고 봅니다. 미-멕 국경 검문권을 대가로 받는 만큼, 우리 길드의 명운을 걸어도 될 만큼 큰 도박이라고 생각하고요.”

“미-멕 국경 검문권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너희 길드 전체와 바꿔도 될 정도인가?”

“그··· 그건 아직 계산해보지 못했습니다.”

“잠깐 생각해봐. 지금 너희 길드가 얼마나 벌어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국경 검문권을 가지게 되면, 돈을 얼마나 벌어들이게 될지. 국경 검문권을 가지게 되면, 현재 국경에서 사람 밀수로 버는 돈은 없어지는 거야. 그것도 계산에 넣으라고.”

“그··· 그렇군요.”

“게다가, 사람들은 쉬워 보이는 일에 돈을 내려고 하지 않아. 지금 너희들이 하는 월경 컨설팅에 비해 볼 때, 입국 포인트에서 도장 하나 찍어주는 것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 그런 일에 사람들이 예전처럼 비싼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아···”

“불법 체류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공급도 생각해야지. 미국 국경 넘는 것이 쉬워지고 불법 입국자들이 많아지면, 그들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얼추 비슷해지는 시기가 오게 되겠지. 그 균형점이 달성되면, 더는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없을 거야. 너희들에게 대가를 치르고 미국에 들어가 불법으로 취업을 하는 게 더 이상 수지가 안 맞게 되는 거지.”

“그··· 그렇다면···”

“지금 너희들이 국경 넘기 컨설팅을 해주는 사람들 숫자에 받고 싶은 국경 검문 수수료를 곱하면 안 된다는 거지. 만에 하나 동부 연합이 승리하고, 그들이 정말로 너희들에게 미-멕 국경 검문권을 넘겨준다 하더라도, 너희들의 수입은 크게 늘어나지 않을 거야.”

“보스 말씀을 듣고 나니··· 정말 그렇겠군요.”

“그런 일에 너희 길드는 지금 돈과 시간, 거기에 사람들 목숨을 쏟아 붓고 있는 거다.”

추이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보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부 연합과 협상을 다시 해야지.”

추이가 반색했다.

“그렇다면! 조직을 유지하시는 겁니까?”

“너무 좋아할 일은 아닐 거야. 살인, 강도, 방화, 납치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못할 테니까. 일단 당장 명령을 내려라.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중단하라고.”

“모··· 모든 일이라면? 빌려준 돈도 받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어차피 말도 안 되는 고리대일 거 아냐.”

“알겠습니다, 보스.”

“동부 연합과 재협상은 물론 네가 한다. 보스가 바뀌었다느니 그런 말은 할 필요 없고, 네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말해.”

“네, 보스. 원래 동부 연합과의 협상은 제가 전담해 왔으니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이준기는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달리는 길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사람도 거의 없다.

“바다에 사람이 별로 없네?”

운전사 옆에 앉은 개리 헌팅턴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좀 더 남쪽 해안에 있습니다. 이 근처는 바위도 많고 해서요.”

“개리. 넌 미국인이지?”

“네. 멕시코 영주권은 있습니다만.”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뭐지?”

“나쁜 일을··· 왜 하느냐고 물으시는 거죠?”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구원자라고 나쁜 놈이 없는 건 아니지. 왜 멕시코에 왔느냐고 묻는 거야. 미국에도 알게 모르게 범죄 조직과 손을 잡은 구원자들이 있을 텐데?”

“그··· 그게···”

“솔직하게 말해봐. 나, 거짓말은 별로 안 좋아해서.”

“아··· 알겠습니다, 보스. 놀라실지 모르겠는데, 저도 원래 101 길드 소속이었습니다. 조슈아 테일러와 같은 길드요.”

LA에서 경찰 일을 했다는 개리 헌팅턴이 101 길드 소속이었다는 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미국 서부에서도 큰 길드에 속하는 101 길드.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 본부를 두고 있지만, 네바다, 애리조나, 오레곤, 워싱턴까지 넓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지금 같은 차를 탄 사람이 조슈아 테일러와 같은 길드였다는 사실은 흥미를 끌 만했다.

이준기는 관심이 생긴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래?”

“조슈아 테일러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워낙 큰 길드라서요. 길드 마스터는 한두 번 봤지만요. 키건 하워즈 말입니다.”

“길드는 왜 나왔지?”

“길드에 또라이 새끼가 하나 있어요. 리암 화이트헤드(Liam Whitehead)라고.”

아는 이름이 또 등장했다.

지금도 유명하겠지만, 곧 더 유명해질 이름.

이준기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자신의 기억과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리암 화이트헤드?”

“키··· 키가 큰 레게 머리 흑인입니다. 키가 2미터가 넘어요. 인상도 더러운데 성격도···”

“길드를 왜 나왔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그 녀석이 너를 괴롭히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 그렇습니다, 보스. 제가 경찰 출신이라는 걸 안 이후로 갑자기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길드 들어오면서 LAPD 그만뒀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그 녀석은 저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물었죠. 왜 경찰은 흑인만 죽이냐고.”

“직장 내 괴롭힘이군. 그런 건 직장 상사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101 길드는 꽤 큰 길드라서, 행정 인력도 꽤 많아요. 인사과에 고충 상담 인력도 있었죠. 찾아가서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전직 경찰이라고 자꾸 괴롭힌다. 그렇게 말했더니 괴롭히는 사람 이름이 뭐냐고 묻더군요. 리암 화이트헤드라고 말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어요. 가해자한테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저한테 오히려 뭐라고 하더군요. 리암한테 무슨 잘못 한 것 있느냐, 말실수 같은 것 한 적 있느냐 물으면서, 괜히 그 사람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으니 적당히 피해 다니라고 조언하더군요. 제가 한숨을 팍팍 쉬어대니까, 결국 솔직하게 말하더군요. 경찰 출신인 걸 리암이 알았다면, 계속 괴롭힐 거라고. 피해 다니는 수밖에 별수가 없다고.”

“101 길드에 경찰 출신이 너 하나뿐이었어?”

“아뇨, 더 있었죠. 경찰 출신 백인 구원자라면 그놈이 전부 괴롭히고 다녔어요. 그중에는 아예 리암의 꼬붕이 되어서 아부를 일삼는 녀석도 있었죠. 아무튼 리암 화이트헤드 그 녀석 때문에 101 길드를 나오게 된 겁니다.”

추이가 끼어들었다.

“우리한테 스카우트 제안받고 나서 그만둔 거잖아?”

“그렇죠. 알고 지내던 멕시코 식당 주인이 말해줘서, 추이 님을 만나고 스카우트됐습니다. 그리고 101 길드는 곧장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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