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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3: 멕시코 (6)
Episode 53: 멕시코 (6)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는 바실리사와는 따로 연락을 취했다.
바실리사는 업데이트할 내용이 많은 모양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 보스, 셀레나 하트료신이 경찰에 입건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죠?”
“네. 뉴스에 났으니까요.”
“경찰과 딜을 한 거예요. 셀레나는 이미 밖에 나와 있어요. 지금은 아마 볼고그라드에 있을 거예요.”
“볼고그라드요?”
“세바스토폴에 이어, 볼고그라드가 정체불명의 침략자들에게 공격받고 있어요.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거라고 다들 얘기하는 분위기예요.”
“세바스토폴이라면 우크라이나가 배후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만, 볼고그라드는 왜요?”
“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조국 전쟁’이 아직 안 끝난 거죠. 유럽연합군은 물러갔지만, 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 연합군이 러시아를 침략 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경찰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가 딜을 했다는 거군요?”
“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 보스 셀레나 하트료신도, 모스크바 경찰청장 타샤 카플론스카야도 열혈 민족주의자니까요. 조국을 방어하겠다는 신념으로 의기투합했다고나 할까요. 유럽연합군 사태로 마피아 문제가 언론에 너무 부각되니까, 일단 정치쇼 차원에서라도 체포는 해야 했지만, 발등에 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상황이라서, 경찰과 마피아가 손을 잡은 거죠.”
“푸가초프는요?”
모스크바 마피아 대부, 아브람 쉬넨코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조직 ‘푸가초프’.
아브람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바실리사는 점조직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푸가초프를 되살려냈다.
모스크바 마피아의 막대한 자산을 활용할 수 없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졌지만, 진정한 레지스탕스 조직으로 다시 태어났다.
“푸가초프는 치안을 살피고 있어요. 러시아 경찰에게 치안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우리 조직 규모로 전쟁에 끼어들 수는 없으니까, 전쟁의 참화에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전쟁 범죄를 막고 있는 정도예요.”
“그건 정말 훌륭한 일이에요. 바실리사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하지 못했을 일이죠.”
“준기 씨는요? 미국 일은 잘돼가요?”
임무가 정보 수집과 정찰에서 전면전으로 바뀌었지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조슈아 테일러와의 대결을 앞두고 이준기의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지금은 멕시코에 와 있어요, 바실리사.”
“멕시코요?”
“멕시코라고는 해도, 미국 바로 옆이에요. 티화나라고, 국경 도시죠. 거기에서 현지 길드를 도와 차원문을 정리할 생각이에요.”
“멕시코라면··· 갱들이 지배하는 나라잖아요? 러시아와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들었는데···”
러시아에도 얼마든지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왜 멕시코에 갔냐는 표정이었다.
“미안해요, 바실리사. 미국 정세가 불안해지면 한국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민족주의자를 비난하고 다니지만, 저도 결국 나라 걱정을 하는 거죠. 제가 말했죠? 저는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고.”
작은 화면 속에서 바실리사가 빙긋 웃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던 때가 그립네요. 사실 얼마 전인데.”
“저도 그래요. 바실리사, 세르게이와 함께 잠도 못 자고 국경을 넘던 때가 생각나네요.”
“잊지 않았죠? 저는 준기 씨를 도우러 미국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요. 러시아 상황은 푸가초프가 관리할 수 있어요. 괜한 걱정 하지 말고 언제라도 불러줘요.”
“조금 더 알아보고, 자리를 잡은 다음에 연락할게요. 미국 내전을 종식시키려면, 멕시코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게 선행요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에 와 있는 거예요.”
“준기 씨 판단은 언제나 옳았잖아요? 이번에도 틀림없을 거예요.”
*****
길수연을 공항에서 맞은 것은, 예전에 문아린을 맞이했던 그녀, 아니타 슈나우저였다.
이번에는 취리히가 아니라 제네바 공항이다.
아니타는 길수연의 캐리어를 끌고 걸으며 자기 이야기를 했다.
“제 이름은 아니타 슈나우저.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지금은 스위스에 살고 있어요. 지난달까지만 해도 베른에 있었는데, 베른 지부가 폐쇄되어서 다시 제네바 본부로 돌아왔어요. 게다가 특진까지 해서 이제는 관리자 레벨이죠. 하는 일은 별로 안 바뀌었지만.”
“진급하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또 한국에서 오시다니, 게다가 또 여자분이시고. 한국에는 실력 좋은 여성 구원자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차,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죠? 제가 진급한 것, 문아린 구원자님 덕이에요. 러시아에서 큰 공을 세우셔서, 저까지 덩달아 진급했죠. 문아린 구원자님, 한국 출신이신데, 아시죠?”
“네. 예전에 공격대를 함께하기도 했죠.”
“아, 그러시구나! 베른 지부가 없어진 것도 문아린 구원자님 때문이에요. 원래 거기 있던 E급 차원문을 신입 회원 테스트 용도로 썼었는데, 문아린 구원자님이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셔서··· 형식적인 신입 회원 테스트를 없애기로 한 거죠.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돈도 명예도 거부하고 봉사 활동을 하겠다고 스위스까지 찾아온 구원자님들한테 테스트라니··· 가당치도 않죠.”
“아··· 그런가요? 저는 테스트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러세요? 저는 구원자 입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구원자님들은 테스트를 모욕적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상상했어요.”
“구원자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세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길수연 구원자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국경 없는 구원자회에서 활동했다는 경력, 그거 한 줄 쓰면 꽤 멋져 보이잖아요? 이력서에 그거 한 줄 넣고 정치에 뛰어드는 뜨내기 구원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건 막아야죠.”
“아, 길수연 구원자님 멋지신데요. 구원자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말하기가 편해지네요. 저도 사실 테스트 폐지는 반대거든요. 저는 직접 봤어요. 마나 폭발도 못 쓰는 구원자를요. 그 스킬은 차원문 밖에서도 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마나 폭발이라면 길수연의 레퍼토리에도 있는 스킬이다.
직접 대미지를 입힐 일이 없으니 실제로 쓰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런데 마나 폭발이 자기 주력 스킬이라고 소개한 구원자가 그걸 못 쓰는 거예요. 20레벨이라고 하더니 사실은 1레벨이었죠. 던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조금 전에 길수연 구원자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생각으로 SSF에 입회 원서를 냈던 것 같아요. 나미비아 사람이었는데.”
“나미비아요?”
“네. 아프리카 서남단에 있는 나라죠. 개도국에서 봉사활동이 무슨 스펙에 도움이 되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개도국, 아니 최빈국일수록 그게 스펙에 엄청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봉사활동을, 그것도 외국에 가서 하고 올 정도면 이건 밀어줘야 하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가 형성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에 가더라도 무사통과죠. 특히 외국계 기업이나 국제구호단체 이런 곳에서 좋아하는 스펙이니까, 선진국보다는 오히려 개도국에서 큰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세상은 생각보다 참 복잡한 곳이에요. 저는 그냥 심플하게 살고 싶은데.”
“머나먼 스위스까지 와서 SSF에 입회하는 게 심플한 삶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타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길수연도 따라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될까요?”
“저희의 주 업무는, 아시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방치되는 차원문의 봉쇄예요. 그런데 지금 이곳 상황이 너무 복잡해져서, 당장 어떤 일을 하시게 될지,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어차피 제 상관이 결정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상관이라면 어떤 분?”
“레온 소바킨이라고 러시아 사람이에요! 그 사람도 사실 문아린 구원자님 때문에 출세한 거죠. 러시아 구원자가 마피아에 가담하지 않고 SSF로 온 것은 백번 천번 칭찬해줘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유능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아, 지금 이 말은 혼잣말입니다. 제발 잊어주세요.”
“저, 입 무거워요.”
“아, 다행이다! 아무튼, 제 직속 상관은 그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일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무슨 말씀이죠?”
“뉴스 많이 보세요? 최근에 벌어졌던 러시아 전쟁, 얼마나 아세요?”
“글쎄요. 어느 정도는···”
“러시아 전쟁에서 최악의 전범으로 밝혀진 사람이··· 하필 스위스 사람이잖아요. 장-바티스트 콩트와.”
“아, 그 사람.”
“게다가 루체른 출신. 제네바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어 지방이죠. 웃기는 얘기지만, 이 조그만 나라도 지역감정이 있답니다. 불어권과 독어권의 대립인데, 독어권 쪽에서는 건수 잡았다고 한창 떠들고 있죠. 그럴 줄 알았다고.”
“여기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군요?”
“한국에도 지역감정이 있나 봐요?”
“그럼요. 전 지역감정 같은 건 우리나라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죠, 뭐. 아무튼, SSF 본부가 스위스에 있다 보니, 이번 전쟁 범죄가 스위스인에 의해서 벌어졌다는 게 아무래도 영향이 커요. 그런데 스위스는 EU 소속이 아니라서 그나마 조용한 것이고,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는 그 폴란드 여자···”
“아가타 하바로프스키 말씀이시죠?”
“네. 그 여자가 폴란드 출신이잖아요. 폴란드는 EU 국가고요. 지금 유럽 전체적으로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엄청나요. 도둑이라고. 특히 독일에서는 거의 매일 사건이 터진다고 들었어요.”
“그럴 수가···”
“이러다가 전쟁 나겠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오가요. 들은 얘기지만, 제2차 세계대전 끝나고 폴란드에 빼앗겼던 땅들, 독일 국민들은 이번 기회에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라고 하더라고요.”
“아···”
“시끄러울 때 오셨지만,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택시 부를게요.”
*****
3월 8일 화요일, 아침.
이준기와 추이 이아고닉은 오늘 일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재 캘리포니아에 너희 병력은 없다는 거지?”
“물론이야. 네가 그렇게 명령했잖아. 캘리포니아에 다시는 발 들이지 말라고.”
“어제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이제 다시 발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야.”
“알고 있어.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어.”
“문제?”
“멕시코 갱들이 캘리포니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어. 디에고와 내가 라호야에 갔던 날은, 그날 경비가 우리와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었기 때문이야. 뇌물을 잔뜩 먹여 놓은 녀석들이 있는데, 그놈들이 경비를 서는 날만 무사통과가 가능한 거지.”
“경비팀 하나를 통째로 매수했다고?”
“경비팀 몇 개지. 가끔 멤버가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자주 바뀌지는 않아. 게다가 새로 바뀌는 멤버도 돈 좀 찔러주면 금방 넘어오지. 개리 헌팅턴이 티화나에서 출세하게 된 것도, 그걸 잘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 녀석, 미국 경찰 출신이거든. 할리우드 영화에 맨날 나오는 LAPD 출신이지.”
“말로만 듣던 LAPD를 만나다니, 영광이군, 개리.”
이준기는 옆에 기립한 채 서 있는 개리 헌팅턴에게 말했다.
아침 일찍 호출된 개리는 추이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전략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이준기는 앉으라고 말했지만, 개리는 한사코 사양하고 선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이준기가 아니라, 추이 이아고닉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다.
LAPD를 만나 영광이라는 이준기의 말에, 개리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떨떠름함이 짙게 묻어났다.
상관의 상관인 추이 이아고닉이 설설 기는 것을 보고 일단 저자세를 취하고는 있지만, 저 동양놈은 뭔데 나한테 갑질이야 하는 표정이 언틋 얼굴에 드러났다.
이준기는 무시하고 추이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구워삶아 놓은 경비들이 순번이 아니다?”
“미···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어.”
“그렇다면 넌 어때? 나와 함께 갈 수 있나?”
“무··· 무슨 뜻이지? 나라고 별수 있어? 경비들이··· 아!”
말하던 도중, 추이는 이준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뛰··· 뛰어넘으라는 거야? 자··· 장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