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53: 멕시코 (5)
Episode 53: 멕시코 (5)
티화나 시내 최고급 바의 별실.
이준기의 맞은편에 앉은 것은 추이 이아고닉.
멕시코 시티에 본부를 두고 있지만 치와와, 소노라, 그리고 바하 칼리포르니아 등 미국과의 접경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길드 ‘킬러포니아’의 실세다.
벽에 걸린 스크린에는 멕시코 지도가 나와 있고, 추이 이아고닉은 자기 길드의 영역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있었다.
“과달라하라(Guadalajara)와 몬테레이(Monterey)를 제외하면, 멕시코의 중북부는 거의 전부 우리 길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지.”
“그 도시들은 최대 길드, ‘테스카틀리포카’의 영역인가?”
“그래. 멕시코 시티 남부와 저 두 도시들이 그들의 주 영역이다.”
“좋아. 그 정도면 세력 관계는 됐고. 테스카틀리포카도 너희들처럼 민족주의가 중심 의제인가?”
“지··· 질문을 이해 못 하겠다.”
“미국에 대한 태도가 어떠냐고 묻는 거야.”
“미국에 대한 증오라면 그들도 우리 못지않아. 하지만 미국을 공격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다. 그들은 중부 아메리카의 통합, 그리고 남부 아메리카와의 연대가 중심 어젠다다.”
“온건하군.”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상대적인 거다. 중부 아메리카 통합 이후에는 그들도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주장?”
“그래, 주장. 중부 아메리카 통합을 언제 완료하고 미국을 친단 말이냐?”
“하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 너희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할 일을 미루는 겁쟁이들로 보이기도 하겠군.”
이준기는 조슈아와의 대결만을 생각하며 힘을 키워온 지난 몇 달을 생각했다.
그리고 질문을 계속했다.
“미국을 친다는 너희들의 입장은 지지를 받고 있나?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지?”
“길드 내의 지지는 공고하다. 알다시피, 우리 길드 멤버의 반은 비밀 결사 ‘알타 캘리포니아’에도 소속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멕시코인들의 지지는 어떤지 궁금하다.”
“보통 사람들의 지지를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대중은 지도하는 대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엘리트주의군.”
“멕시코에서 민주주의란 어차피 허상이다. 라틴 아메리카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미국에 대한 분노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미움의 대상이 된 느낌인데.”
“이곳에서 살지 않는 한, 미국이라는 존재의 해악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저주야. 유전자 수준에 새겨진 저주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통제하는···”
“···”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름 역덕인 이준기도 멕시코 역사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미-멕 전쟁으로 엄청난 규모의 땅을 빼앗겼다는 것 정도.
CIA가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을 백주대낮에 사살한 것이나, 남미 각국의 내전에 공공연하게 개입한 것은 알고 있어도, 멕시코에 대해서라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역시, 미국의 앞마당 관리가 철저한 탓일 것이다.
감정에 북받쳐 미국에 대한 증오를 쏟아낸 추이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이 조용하니 분위기가 더 싸해졌다.
이준기는 화제를 돌렸다.
시곗바늘이 8시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배경 이야기 고마워, 추이. 이제 본론을 얘기할 때가 온 것 같네.”
“그··· 그래. 말해봐라.”
“미국에 대한 공격, 너희 길드뿐이냐?”
“그··· 그건 나도 잘 몰라. 다른 길드도, 특히 테스카틀리포카가 미국 쪽에서 제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19세기 미-멕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21세기 미-멕 전쟁에 대해서는 잘 아는 이준기다.
추이의 의문에 대해서는 답을 알고 있지만, 이준기는 일단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격을 사주한 것은, 동부 연합이지?”
“그··· 그래. 잘 알고 있군.”
“소문이 무성하니까.”
“마··· 맞아.”
“동부 연합이 제시한 대가는 뭐냐? 설마, 정말로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야?”
“미··· 믿을지 모르지만, 사실이야. 법적으로 땅을 돌려주는 것보다도 더 나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캘리포니아를 돌려주기로 했다.”
“어떻게?”
“이곳, 샌디에이고와 티화나 사이의 국경 관리를 우리 멕시코 쪽에 넘기는 거다. 캘리포니아로 멕시코인들을 줄줄이 유입시키는 거지. 그렇게 되면 결국 정치판도 경제판도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다.”
나중에 밝혀지는 것이지만, 이 제안은 동부 연합의 두뇌, 드레 럭러스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 전체를 석권한 구원자 단체라면, 국경 관리 권한 정도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를 압박해서 얼마든지 넘겨받을 수 있다.
국경 관리 권한을 정식으로 인수받게 되면, 하청을 어디에 주든 그건 동부 연합의 내부 문제일 뿐이다.
국경 검문을 멕시코 갱들이 하게 되면, 샌디에이고-티화나 국경은 그야말로 프리 패스.
통행세를 얼마로 할지, 쿼터는 어떻게 정할지, 모두 멕시코에 일임하겠다는 통 큰 제안이었다.
“물론··· 캘리포니아로 유입되는 멕시코인 인구는 우리가 통제할 거다. 대책도 없이 아무나 몰려들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 너에게는 계획이 다 있구나?”
“비웃지 마라.”
“딱히 비웃는 건 아냐. 미래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니까.”
“무슨··· 얘기냐? 한국에는 희망이 없다는 거야?”
몇 달 후부터 벌어지는 대참사를 막지 못하면 그 누구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겠다.”
“그··· 그래.”
“동부 연합의 그 달콤한 제안에, 너희들이 왜 그렇게 미적거리는 것인지, 그걸 묻고 싶다.”
“미··· 미적거린다니··· 무슨 소리냐?”
“킬러포니아의 실세들은 전부 멕시코에 있잖아. 동부 연합이 캘리포니아라는 금싸라기 땅과 교환하자고 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추이 너도, 그리고 길마 아론도 전부 미국으로 넘어와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는 것, 그걸 원했으니까 저렇게 좋은 조건을 건 것 아닌가?”
“사··· 상황이··· 아직 맞지 않아··· 때를 기다리는 거다.”
“그 상황이라는 게, 조슈아 테일러를 말하는 거겠지?”
추이 이아고닉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조슈아 테일러 때문이다.”
“조슈아 테일러가 움직이지 않는데, 먼저 움직이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거냐?”
“그래. 정확하다.”
“조슈아 테일러가 건재한 이상, 동부 연합은 내전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캘리포니아를 넘겨준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조슈아 테일러를 공식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래. 조슈아 테일러가 죽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가 캘리포니아를 포기해 준다면 우리는 그것도 대환영이다.”
“조슈아 테일러의 싸움을 본 적이 있나?”
“유튜브 들어가면 동영상이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나.”
“직접 본 적은?”
“그··· 그런··· 적은 당연히 없다. 너는 그의 싸움을 직접 보기라도 했다는 거냐?”
보고 있지. 매일.
조슈아 테일러와의 싸움이 아니라면 이준기의 꿈 극장은 소재가 떨어져서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이준기는 말을 돌렸다.
“그래서, 계획이 뭐야? 넌 다 계획이 있잖아.”
“동부 연합이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해 버리면 우리도 곤란하다. 최소한의 도움은 주고 있어. 이곳저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며 도망 다니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캘리포니아 공략이다. 캘리포니아를 무력화시키지 않는 한, 동부 연합 용병 짓을 해서 얻을 것은 없다. 그냥 미국 내전에 들러리 서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만 하겠지. 그래서야 19세기 미국에게 뒤통수 맞은 역사를 재현하는 것뿐이다.”
“그래, 그건 이미 말했지. 캘리포니아를 어떻게 공략하려는 거야? 그게 내 질문이다.”
“조슈아 테일러를 끌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본진, 라호야에서 소란을 피워서?”
“그··· 그래. 그가 직접 나설 때까지··· 위협 수준을 조금씩 늘려갈 생각이었어.”
“시간이 많군?”
이준기의 비아냥거리는 지적에, 추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면서, 이준기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그들도 다들 계획을 가지고 있지.”
“그··· 그래. 네··· 네가 나타날 줄은 전혀 알지 못했어.”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오면서 공부를 했다. 스페인어 기사는 거의 다 읽었지만, 영어로 검색하니 며칠이 걸려도 다 읽지 못할 분량의 자료가 쏟아지더군. 우···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게 날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래서, 나 말야··· 쓸모가 좀 있어 보이나?”
“무··· 무슨?”
“나 이준기, 너희들에게 용병으로 쓸만하냐는 질문이야.”
“뭐··· 라고?”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난 더 강한 상대와 싸워보고 싶다.”
“그··· 그래서··· 조슈아 테일러를 찾아 미국까지 왔다는 거야?”
“믿거나 말거나, 그게 내 대답이다.”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맞은 듯한 표정으로 추이는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조슈아 테일러를 끌어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자신의 앞길을 막아버린 거대한 돌덩이, 이준기가 사실은 우군이었다니.
이준기가 제안을 거둬들이기라도 할까 봐, 추이는 와락 이준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제··· 제발! 우리 편에서 싸워다오! 조··· 조건은 뭐지?”
이준기는 손을 빼면서 대답했다.
“조슈아 테일러와 싸우게만 해준다면, 난 별로 바라는 건 없어. 그때까지 지낼 숙소를 알아봐 준다면 고맙기는 하겠지.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까.”
“저··· 정말 그것뿐이냐?”
“내가 제안하는 조건이 너희에게 아주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는 마. 난 조슈아 테일러, 단 한 사람과 싸워주겠다는 거다. 너희들에게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사소한 싸움에 나를 동원할 생각은 하지 마.”
“무··· 물론이다! 최고의 예우를 해주겠다!”
공허한 그의 결계 안에서 무력하게 패한 이준기와 동료들.
착실하게 실력을 키우고 팀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간밤에 만났던 미지의 자객.
시간이 없다. 아니, 갑자기 시간이 부족해졌다.
*****
캘리포니아의 싸구려 모텔에서 티화나의 고급 호텔로 숙소가 바뀌었다.
오후 10시경, 이준기는 블라디보스토크 팀과 연락을 취했다.
문아린이 화면에 나왔다.
“오빠!”
“아린아. 잘 지내지?”
“이제 가도 돼? 미국으로 가도 되는 거냐고.”
“그게 말야,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왜?”
“나, 지금 멕시코에 있어.”
“어, 정말? 거기에는 왜 간 거야?”
“캘리포니아에는 차원문이 씨가 말랐더라고.”
“아···”
미국으로 오면서, 동료들에게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궁색하지만 차원문을 닫으러 가겠다고 했다.
내전 중인 미국이라면, 방치된 차원문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한번 가보려고. 아직 가본 적이 없어서 말야.”
그게 무슨 허접한 이유냐고 따져 물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창수가 불쑥 말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그 덕에 질문 공세에서 벗어난 이준기.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대꾸했다.
“자리를 잡고 나서, 여러분들도 모실게요.”
문아린이 즉각 대답했다.
“정말? 나도 미국은 처음이야!”
세르게이도 물었다.
“나도··· 가는 거지, 대장?”
“물론이지, 세르게이. 미국에도 나쁜 놈들이 차고 넘칠 테니.”
“휴, 다행이다. 난 또··· 나를 떼버리려는 건가 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팀은 끝까지 함께 간다.”
문아린이 끼어들었다.
“그 팀··· 나도 포함되는 거야?”
“물론이지. 일단 가서 자리를 잡으면, 도움을 요청할 테니 그때 와서 도와줘.”
그러고 나서, 이제야 연락하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업데이트는 문자로 받았지만, 통화는 처음.
작은 화면에 몰려든 문아린, 세르게이, 그리고 조금 떨어진 김창수.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화면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문아린이 물었다.
“자리 잡으면 부른다면서? 도대체 자리를 잡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거기에서 길드라도 만들겠다는 거야?”
“미국은 SSF에 우호적인 나라도 아니고, 게다가 지금 내전 중이잖아. 이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혼자가 편해서. 현지 길드에서 용병 계약이라도 맺으면 상황이 나아지잖아. 그때 부를게.”
“용병 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