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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3: 멕시코 (2)
Episode 53: 멕시코 (2)
“오호라? 스페인어를 알아듣는군?”
맨 앞에 선 멕시코인이 이준기를 향해 말했다.
들이닥친 패거리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며, 식당 주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싸··· 싸움은 제발···”
멕시코인이 식당 주인을 향해 외쳤다.
“추초(Chucho)! 영원히 장사 접게 해줄까?”
“아··· 아닙니다.”
“까불지 마. 주제넘은 소리는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죄··· 죄송합니다. 델가도 님.”
어깨를 으쓱하며, 이준기가 멕시코 깡패들의 대장을 향해 말했다.
“본고장 부리또를 먹게 됐는데, 그걸 방해하다니. 먹을 것에 관한 원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멕시코인은 옆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놈, 정말 센 거 맞아? 키는 크지만, 비실비실하게 생겨서 왠지 부실한 느낌인데. 스페인어도 이상하고.”
“아까 제가 분명히 두 눈으로 봤습니다, 대장. 자···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왔다고요.”
“구원자라는 얘기인가 본데··· 아니, 그게 구원자라고 해도 가능한 거야? 장벽 높이는 5미터잖아?”
“제··· 제가 봤어요. 장벽 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요.”
“벽에 매달렸다가 떨어진 게 아니고, 벽을 훌쩍 넘어왔다고?”
“네··· 그냥 울타리 뛰어넘는 것처럼··· 그렇게 넘어왔어요.”
“흠··· 그 뭐냐··· 애들 방방 뛰어노는 그거라도 밟고 날아온 거 아닐까?”
“트··· 트램펄린입니다!”
“그래, 그거. 트램펄린. 그거 밟고 뛰면 나도 5미터는 뛸 것 같은데?”
“거···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죠. 저는 담장 이쪽 편에서 본 게 전부니까요.”
“뭐, 좋아. 저놈이 트램펄린으로 묘기를 부리는 광대인지, 진짜 엄청 무서운 최신형 구원자인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우린 열 명이잖아? 아니, 열한 명이지. 내가, 훌리오 델가도(Julio Delgado)가 직접 왔으니까. 당장 혼내주고 나서, 무릎을 꿇려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자.”
이준기가 끼어들었다.
“말 다 끝났나? 무안하게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해?”
“괴상한 억양이기는 해도, 스페인어 잘하는데? 네놈 이름은 뭐냐? 미국놈이야?”
“친구한테 6개월 속성, 날림으로 배우다 보니 발음이 좀 별로인가 보다. 나름 열심히 배운 건데.”
“스페인 억양에 가깝군, 라틴 아메리카 발음이 아냐.”
“그렇다면 제대로 배운 거군. 내 친구는 스페인 빌바오 출신이니까.”
“빌바오? 그게 어딘데? 그러니까 네놈이 거기에서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니, 난 미국에서 왔지. 바로 저 장벽 건너편에서.”
“그래, 미국놈이란 말이지? 그래서, 산초 놈이 말한 대로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냐?”
“맘대로 생각해. 내가 뭐라고 대답하든 너는 믿지 않을 거 아냐.”
“말하는 걸 들었으니, 너도 알 거 아냐. 산초 녀석은 담장 이쪽에서만 본 거다. 네가 담장 저쪽에서 트램펄린을 썼는지 장대높이뛰기를 했는지 누가 아냐는 말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담장 저쪽 편에는 트램펄린이나 장대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냐?”
“그게 뭔데?”
“뭐긴 뭐야. 총을 든 미국 병사들이지. 내가 어떻게 군인들을 따돌렸을까? 담장을 뛰어넘었는지 아닌지보다 그게 더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좋아. 네놈을 무릎 꿇린 다음에 물어야 할 질문이 늘었군. 이봐, 미국놈. 무릎을 꿇어라. 지금 당장.”
“싫은데?”
“이래도 싫어?”
훌리오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이준기를 향해 겨냥했다.
“너한테만 무기가 있을까?”
“후후후. 우린 열한 명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의 선언과 함께, 양옆으로 기립한 부하들이 일제히 총을 꺼내 들었다.
전부 기관총이다.
양쪽 귓가로 입꼬리가 올라가게 웃으면서, 훌리오는 다시 말했다.
“꿇어.”
“생각해 보니까, 나는 지금 무기가 없다. 아까 새벽에 부러진 걸 깜빡했네.”
“그래서? 공평하게 무기를 달라고 말하는 건가?”
“아니야. 훌리오 너같이 약한 사람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깡패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공평한 거잖아.”
“그렇다면 문제없겠군. 당장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해라.”
“싫다고 말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주지. 높이뛰기의 진상을 듣지 못하는 건 섭섭하지만, 너처럼 까부는 녀석을 살려두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총을 쏘겠다고? 여긴 네 나와바리 아닌가? 가게 주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길 다 부수겠다는 거야?”
“엄청 바른생활 사나이인가 보군. 그건 내가 해결하지. 이봐, 추초!”
식당 주인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네··· 네! 델가도 님.”
“식당 좀 부숴도 되지? 이 미국놈을 혼내주려면 어쩔 수가 없네.”
“아아··· 델가도 님··· 제발···”
“뭐야! 싫어?”
“아··· 아닙니다···”
씨익 웃으면서, 훌리오는 이준기에게 말했다.
“들었지? 괜찮다잖아.”
“이봐, 훌리오. 말이 다가 아니야. 저 추초라는 사람, 얼굴 표정 안 보여? 저게 네 눈에는 괜찮은 걸로 보이냐?”
“자기 입으로 괜찮다는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내가 저놈 마음속이라도 읽어야 된다는 말이냐?”
“공감 능력의 결여가 심각한 놈이군.”
“무슨 개소리냐? 뭐, 공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네놈 말은 내가 사람 같지 않다, 그거냐? 내가 인간말종이라고?”
“잠정 결론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두지.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면, 착한 일을 많이 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야 할 거야. 친해진 다음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친해져? 이거 아주 미친놈이었군?”
“기회를 두 번 주겠다는 걸,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군. 그렇다면 잠정이 아니라 최종 결론이라고 해도 괜찮겠군. 훌리오 델가도, 네놈은 악당이다.”
“악당이라는 말은 칭찬 같은데? 악당이 뭘 하고 다니는지 이제 보여주마. 이봐, 렌조! 문을 걸어 잠가라.”
렌조라는 부하가 즉각 대답했다.
“이미 걸어 잠갔습니다. 아까, 들어올 때요.”
“좋아. 이제 쇼타임을 시작해볼까?”
이준기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좋은 생각이다.”
*****
“잘 숨어있어라, 추초. 괜히 일어서서 벌집 되지 말고.”
이가 위아래로 여덟 개는 드러나게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훌리오가 주방 쪽을 향해 외쳤다.
“네, 네! 감사합니다, 델가도 님!”
추초는 변변치 않아 보이는 금속 쟁반을 뒤집어쓰고 주방 밑으로 몸을 숨겼다.
동시에, 훌리오가 방아쇠를 당기며 외쳤다.
“죽어라!”
이준기는 모자챙을 들어 올리며 전방에 신경을 집중했다.
몇 개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모두 열한 개의 총구.
훌리오의 권총은 몰라도, 부하들의 기관총이라면 초당 20발은 나온다고 봐야 한다.
뜻밖에 만난 극강의 훈련 기회.
마음껏 총을 쏘게 하고 몇 개까지 버티는지 알아볼까?
아니, 굳이 이렇게 위험한 세팅으로 훈련을 강행할 필요는 없다.
안전하게, 보수적으로, 조금씩. 제어할 수 있는 물체의 수를 늘려가는 게 좋겠다.
다행인 것은 이 허름한 가게가 석조 건물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는 연습.
총알 몇 개가 이준기의 통제를 벗어나 가게 벽이나 기물에 박힐 수 있다.
석조 건물이니 재산상 피해는 최소한에 그칠 것이다.
손해 배상은 무릎 꿇은 훌리오에게서 받아내면 된다.
탕!
훌리오의 총구에서 총탄이 발사되었다.
찰나의 순간 뒤에, 부하들의 총구에서도 거의 일제히 탄환들이 분사되었다.
맨 오른쪽 녀석이 든 기관총부터, 하나씩 가늠쇠를 잠금으로 돌려버리면서 날아드는 총알의 개수를 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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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면, 사람의 행동은 참 재미있다.
<맨워칭>이라는 책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는 녀석도 있고, 저 혼자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녀석, 잔디깎이라도 돌리는 것처럼 묵묵히 서서 손가락에 힘을 주는 녀석.
겨우 열한 명의 악당들이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훌리오를 제외한 10명의 기관총을 모두 잠금 상태로 돌리는 데에는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 1초가 지나는 동안,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표정이 변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사람들은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자기 잘난 맛에 콜트 싱글 액션 아미(Single Action Army)를 들고 온 훌리오만이 사태의 변화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초당 1발이나 발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구식 무기.
그 권총만은 제어하지 않고 놔두고 있다.
그래서, 훌리오만은 아직 뜻하는 대로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그 기묘한 느낌에서 자유롭다.
권총을 앞으로 내밀고 마치 서부극의 보안관처럼 방아쇠를 당기는 훌리오의 얼굴에는 묘한 쾌감의 표정이 떠올랐다.
요란한 총격음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뭐야?”
“어?”
“이게 왜 이래?”
부하들이 하나둘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방아쇠가 손가락에 걸리는 감각이 이상한 것을 처음에 느끼고, 다음에는 청각이 반응한다.
11개의 총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소음 수준.
그리고 나서야 시각에 잡히는 기괴한 광경.
수십 개, 아니 100개가 넘는 총알이 거미줄에라도 걸린 듯 공중에 떠 있다.
“저··· 저게 뭐야?”
“초··· 총알이 공중에 멈췄어?”
“저··· 저놈이 하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이준기는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면서 말했다.
“좋아. 147개. 오늘은 여기까지.”
그렇게 선언하는 이준기의 앞에는 턱이 빠지게 입을 벌린 훌리오가 서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저절로 힘이 빠져 버렸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공중에 멈춘 백여 개의 총알을, 아니 그 뒤에 선 이준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멕시코 갱들.
이준기는 싱긋 웃어 보였다.
“처음 보는 거야?”
*****
후두둑.
식당 바닥으로 수많은 총알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완전히 얼이 빠져 있던 갱스터들이 후두둑 소리에 잠이라도 깨듯 머리를 흔들었다.
몇몇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심해. 아직 뜨거우니까 말야.”
대열의 가운데에 서 있던 훌리오가 권총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너··· 뭐야? 사탄인가?”
“아니, 관광객.”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게 뭐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난 식당에서 주문하던 중이었고, 너희들이 시비를 건 거잖아. 내가 원했던 것은 나른한 봄 햇살을 받으며 본고장 부리또를 음미하는 거였다고. 그걸 망쳐놨지. 훌리오 네가 말야.”
말을 끝낸 이준기가 싱긋 웃자, 훌리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뭔가 핑계라도 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훌리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오··· 오해야···”
“오해? 총으로 위협한 것도 아니고 총을 쏴놓고 오해라고?”
“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 미··· 미안하다! 요··· 용서해줘!”
“아까 말했지? 먹을 것에 관한 원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용서해줘··· 아니, 사··· 살려줘···”
“그건 조금 생각해볼게. 일단, 장소를 옮기자.”
“어··· 어디로?”
“위대한 훌리오 델가도 님이라면 아지트가 있을 거 아냐?”
“우··· 우리 아지트로 가겠다고?”
“그래.”
“거기에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우릴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긴 그도 그렇군. 총이 100개 정도 되면 좀 힘들기는 하겠다.”
“사··· 살려주면 너를 다시는 건드리지 않겠다. 보··· 보스한테도 확실하게 보고하고, 부하들에게도 다··· 단단히 일러두마.”
“그러니까, 그 말을 모두에게 전달하려면 아무래도 아지트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저··· 정말로 우리 아지트에 가겠다고?”
“그래, 앞장서라.”
이준기는 허리를 굽혀 훌리오의 싱글 액션 아미를 집어 들었다.
“이건, 잠깐 동안 내가 보관하지.”
이준기는 훌리오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는 이렇게 사이좋은 포즈로 간다. 괜찮지? 아니··· 안 되나? 멕시코 문화를 내가 잘 몰라서.”
“그··· 그건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주머니에 넣은 총을 네 옆구리에 찌르고 있을 테니, 알아서 자연스럽게 잘 걸어봐.”
“아··· 알았다.”
“내가 이렇게 실실 웃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죽인 사람 숫자가··· 어유··· 이게 얼마야. 세지도 못하겠네.”
“아··· 알겠다! 살려만 준다면 절대복종하겠다!”
“자, 그럼 가볼까?”
덜덜 떠는 손으로 부하들 중 하나가 문의 잠금쇠를 풀었다.
문을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식당 주인 추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 부리또와 과카몰리··· 여기 있습니다! 돈은 필요 없어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립니다. 마··· 맛있게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