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26화 (22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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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3: 멕시코 (1)

Episode 53: 멕시코 (1)

디에고는 죽고, 추이 이아고닉이 이끄는 멕시코 갱들은 국경 너머 사라졌다.

머지않아 되돌아올 것이 확실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48레벨의 추이 이아고닉보다 레벨이 높은 자는 멕시코에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알타 캘리포니아의 실지 회복 운동에 동감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지.’

비행기로 이동해도 9시간이 걸리던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이동보다야 낫지만, 미국 역시 도시 간 이동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문제다.

더구나 CNN 뉴스에 나버렸다.

이제는 공항에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켜고 역사 메모를 확인했다.

- 3월 5일. 조슈아, 멕시코 구원자 격퇴 사건.

- 3월 8일. ‘남부의 힘’ 길드 숙청 사건. (언론 보도는 4월 9일)

- 3월 10일. ‘플로리다 프로젝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미국 전체를 충격에 몰아넣은 사건.

진주만 이후, 80년 만에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사건이다.

알카에다의 9/11이라든가, 멕시코 갱의 내전 개입도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규모부터가 너무 다르다.

마이애미, 올란도, 탐파 등 플로리다 전역의 주요 도시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당했다.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좌익 길드가 주도한 이 공격으로, 하룻밤 만에 200명에 가까운 구원자들이 사망했다.

경찰을 비롯한 일반인 희생자는 5천 명에 달한다.

플로리다는 뉴욕, 매사추세츠, 뉴저지와 함께 동부 연합의 핵심 세력권.

내전 중반부 이후 서부 전선에 의해 통제되고는 있지만 동부 연합의 끊임없는 탈환 시도가 이어져 온 곳.

그래서 많은 수의 서부 전선 소속 구원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다국적 구원자 연합군에 몰살당한 것이다.

마무리 일격만을 남겨두고 있던 서부 전선에 심대한 타격을 준 사건.

주모자들이 전원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이 공격의 기획자가 누구인지는 결국 알 수 없게 된다.

쟁점은 동부 연합이 ‘미국에 대한’ 이 공격을 사주했는가인데, 역시 미궁에 빠져버렸다.

다수설은 동부 연합과 상관없는 사건이라고 본다.

반미정서와 히스패닉 민족주의의 에너지가 분출된 사건인데, 우연히 서부 전선에 불비례적으로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는 것.

둘로 나뉘어 싸우는 적에 대한 공격이라면 당연히 이이제이의 전략을 채택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적’에 대항해 싸우려면 내전을 멈춰야 한다고 서부 전선이 제안했으나, 동부 연합은 거부했다.

결국 서부 전선은 동부 연합 잔당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정리하고 남미 침략군에 맞서 싸우는 전략을 채택한다.

작전의 두 단계 모두에서 조슈아 테일러가 대활약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애틀랜타 숙청 사건은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고,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아직 며칠 남았다. 역사가 그대로 재현된다면 말이지.’

당장 이준기에게 더 큰 문제는 간밤의 습격자였다.

지금 이준기는 헬렌 카자크나 조슈아 테일러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런데 갑툭튀한 간밤의 그 여자를 상대로라면, 자신할 수 없다.

분명히 이준기 자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으니까.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까? 앤드루 테일러의 저택.’

*****

‘정말 저택이군.’

테일러 가의 저택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조슈아 테일러는 본격적으로 미국 내전에 개입하면서 이 저택을 처분했으니까.

거대한 철문이 이준기를 가로막았다.

배트맨의 아버지 토머스 웨인 만큼의 엄청난 거부는 아니지만, 조슈아 테일러의 아버지인 앤드루 테일러 역시 자수성가한 부자다.

재고관리 스타트업을 비싼 가격에 월마트에 매각한 후, 아직 생소한 영역이었던 재생 에너지와 전자 상거래 분야에 뛰어들어 자산을 몇 갑절로 불렸다.

은퇴 후에는 사회복지 재단을 만들어 재산의 거의 전부를 쏟아부은 의인.

조슈아 테일러는 그의 외아들이다.

자신보다 몇 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따라, 2019년 말, 그도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심근 경색.

심혈관 질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그에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그런데 왜 2019년이었을까?

조슈아 테일러가 각성한 바로 그해.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썼다.

잡화점 가판대의 3류 잡지들은 종종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실었다.

- 조슈아 테일러, 그는 정말 아버지를 죽였나?

- 조슈아 테일러의 무서운 계획. 친부 살해가 그 첫 단계.

- 미소 띤 가면 뒤의 악마. 존속 살인자 조슈아 테일러.

미국 대통령이 사실은 외계인이라든가, 텍사스 사막 한가운데 지구 중심으로 통하는 구멍이 뚫렸다는 개드립을 태연히 커버에 올리는 잡지들이다.

진성 돌아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슈아도, 그의 길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곧바로 화면이 켜지면서 정장 차림의 신사가 말했다.

“누구시죠?”

“조슈아 테일러의 팬입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조슈아 님은 여기 살지 않습니다. 정말 팬 맞아요?”

놀랄 정도로 사생활이 알려져 있지 않은 신비의 구원자, 조슈아 테일러.

이준기가 그를 실제로 본 것은, 2022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세계 구원자 포럼 제6차 대회, 소위 ‘샌프란시스코 선언’ 당시가 처음이다.

그 전에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 그런 사생활은 당연히 모른다.

생각해 보니, 저택으로 접어드는 막다른 길 저편에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나 여기에 나타날지 모르는 조슈아를 기다리는 팬들이었던 것이다.

전부 해서 스무 명도 되지 않은 걸 보면, 조슈아가 여기에 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준기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죠? 한국에서 여기까지, 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단 말입니다.”

“길드 사무실에라도 가보시죠.”

다운타운에 있는 101 길드 샌디에이고 지부 사무실.

조슈아는 길드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슈아는 길드 사무실에는 나오지 않잖아요.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조슈아 님의 생활 공간에 대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팬이라면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세요.”

“휴우··· 한국에서 10시간을 날아서···”

“딱하게 됐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죠. 죄송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인터폰 화면이 꺼졌다.

*****

오후에 이준기는 남쪽으로 렌터카를 몰았다.

30분 정도 달리고 나니 국경 검문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준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5미터 정도의 높이로 지어진 거대한 벽이 보였다.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쌓겠다고 공언했던, 그것이다.

우선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지역부터 차단하겠다고 하면서 샌디에이고-티화나 국경에 설치한, 말하자면 프로토타입이다.

한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 뉴스에 나올 정도로 당시에는 화제가 되었다.

“결국 세우는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공약을 지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전문가 입장에서 한 말씀 해주시죠. 샌디에이고-티화나 국경에 최초의 장벽을 세우는 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밀입국하는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텍사스 황야에서 건너옵니다. 이미 검문소에 무장 병력이 깔려 있는 샌디에이고 국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어요. 이건 그냥 정치적 쇼에 가까운 거죠. 이웃 나라에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고, 공약을 지킨다는 이미지도 쌓아서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겁니다. 이제 재선도 1년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으니까요.”

“장벽 높이가 5미터라고 하던데요. 그렇게까지 높게 지을 필요가 있나요?”

“말씀드렸듯이, 이건 정치적 쇼입니다. 웅장할수록 효과가 있죠.”

감히 아무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5미터로 높게 지었다는 이야기.

이 벽이 완공된 2019년 10월 시점이라면, 전 세계 최고레벨 구원자라고 해야 10레벨 초중반.

구원자라고 하더라도 5미터를 뛰어넘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지금 시점에도 5미터를 한 번에 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벽에 가까이 다가가자, 무장한 병사가 이준기를 제지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벽에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떨어지세요.”

“관광객입니다. 사진 좀 찍으려고요.”

“군사시설입니다. 사진 찍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 그래서 사진 찍는 사람이 없군요? 이렇게 재미있는 구조물인데.”

“물러나세요. 총 맞는 사고도 종종 일어납니다.”

“벽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총을 쏜다는 말씀입니까? 게다가 이건 저쪽에서 건너오는 사람들을 막으려는 거잖아요?”

“어느 쪽이든 벽을 넘는 건 금지입니다.”

“에이. 이런 벽을 어떻게 넘어요. 사다리라도 가져온다면 모를까.”

“그렇긴 하죠.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물러서세요. 아니면 정말 발포할 수밖에 없어요.”

이준기는 양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융통성이 없으시군요. 저도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뭐라고요?”

“시간이 없으니, 실례하겠습니다.”

‘Excuse me’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비켜’라고 했던가.

비키라고 말하고, 이준기는 벽을 향해 달렸다.

“뭐, 뭡니까! 쏘··· 쏩니다!”

이준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 이준기가 오후의 태양 속으로 사라졌다.

눈이 부신 병사는 시선을 돌렸다.

탁.

벽 건너편에서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는 눈을 깜빡여 해에 부신 시야를 적응시키려 했다.

조금 전에 도약했던 그 사람이 건너간 것이 맞는 모양이다.

벽 이쪽에는 아무도 없다.

*****

“누··· 누구야?”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멕시코 병사가 일어서면서 외쳤다.

잘은 못해도, 미겔 덕분에 기초적인 스페인어 회화는 가능하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이준기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멕시코 병사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미국 측의 강요로 멕시코도 장벽 건너편에 병력을 배치하기는 했다.

하지만 국경 방비를 열심히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미국 측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병력.

목에 소총을 걸고 있기는 하지만 담배나 피우면서 어슬렁거리는 병사들.

한국의 예비군 훈련장으로 착각할 만한 분위기다.

얼마 달리지도 않아 주택가로 들어섰다.

벽 바로 뒤에 미국 땅을 접하는 이곳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장벽 건설 전에는 미국 땅이 보였을 것이다.

티화나. 국경 넘어 쇼핑을 하려고 미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덕분에 티화나 물가는 멕시코 어디보다도 높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구원자들이 가세한 갱들을 멕시코 정부가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티화나로 건너오는 미국 쪽 쇼핑객들은 그 수가 급감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예컨대 마약··· 같은 것들.

시트 안에 마약을 가득 채운 자동차가 적발된다든가 하는, 기묘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이 바로 샌디에이고-티화나 국경이다.

이준기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상가 쪽으로 나갔다.

아직 대낮이다.

이런 시간에 뒷골목 장사치들을 만날 수 있을까?

‘부리또나 좀 먹으면서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야겠다.’

티화나 시내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멕시코 음식 프랜차이즈 식당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본고장에 와서까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를 먹을 이유는 없다.

허름해 보이지만 왠지 맛집일 것 같은 식당으로 이준기는 걸어 들어갔다.

“소고기랑 쌀만 넣은 걸로 주시고요. 소스는 제일 매운 걸로. 그리고 과카몰리 잔뜩 주세요.”

멕시코 음식이라면, 이준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종류 중 하나다.

스페인어 실력은 별로지만, 먹을거리에 관해서라면 빠삭하다.

유창하게 음식 주문을 하는데 식당 문이 열리며 딸랑 소리가 났다.

비좁은 식당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서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저놈이야?”

“그래, 저놈.”

“만만찮은 놈일 거야. 조심해!”

한참 떠드는 걸 일단 끝까지 듣고 나서, 이준기는 그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거, 내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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