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52: 캘리포니아 (7)
Episode 52: 캘리포니아 (7)
혼잣말이 틀림없었지만,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이준기는 분명하게 들었다.
10대 중후반, 조금은 장난기도 섞인 듯한 소녀의 목소리.
하늘로 날아올랐던 발리송의 부러진 칼날이 땅에 떨어지며 가볍게 금속음을 냈다.
근방의 가로등이 모두 꺼져서 갑자기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이준기는 조용히 말했다.
“넌 누구냐?”
“신경 쓸 것 없다.”
“넌 내 포로를 죽였다. 그런데 신경 쓰지 말라고?”
“나쁜 놈이잖아, 죽은 거.”
“경찰이냐?”
“후후.”
더 시간을 끌면서 어둠에 시야를 적응시키려 했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지려고 했다.
‘귀검!’
이준기는 시공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적을 향해 돌진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둠에 반쯤 적응한 그의 시야에 비친 상대방은, 귀검을 쓴 이준기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대개의 다른 스킬들과 마찬가지로, 귀검 역시 숙련도에 따라 더 강해진다.
그러나, 51레벨의 이준기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라니?
그런 수준의 귀검이 가능한가?
그런데 그걸 쓰는 사람이 하필 이준기의 앞에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났다고?
조슈아 테일러도, 헬렌 카자크도 아니다.
역사가 완전히 바뀌어서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귀검의 2초.
그동안 이준기는 100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 상대방을 뒤쫓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마치 훨씬 더 길게 지속되고 훨씬 더 빠른 ‘귀검’을 쓴 것처럼, 그녀는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오는 이준기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느새 바다에 더욱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파도 소리에 섞여 바닷새 소리도 들려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준기는 혼잣말을 했다.
“춥지도 않은가? 핫팬츠 차림이라니.”
*****
모텔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디에고 라몬을 죽인 것이 자신이 아니기는 하지만, 경찰 조사라도 받는다면 너무 번거롭게 된다.
무엇보다, 조슈아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는 그의 미션이 엉망이 된다.
숙박료는 선불로 지불했고, 짐은 없다.
휴대폰을 꺼내 다른 모텔을 찾아 이준기는 잠을 청했다.
열두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드는 일은 흔치 않다.
수면 리듬이 깨지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뜻밖에 이준기는 잘 자고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꿈 같이 멀게 느껴졌다.
짐도 없는데 한 곳에서 오래 묵을 필요가 없다.
이준기는 아침 9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나와 커피숍을 찾았다.
한국과 달리 커피 맛이 형편없었지만, 이준기는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무엇보다, 사이렌 오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불리면 가서 들고 오면 그만이다.
직원들과 눈이 마주칠 일 자체가 없다.
한국도 아니니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조심하기로 했다.
‘어젯밤의 그 자객··· 나를 아는 사람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스타벅스는 매장에 대형 스크린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신제품 광고나 회사 홍보를 주로 내보냈지만,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아침에는 뉴스를 틀어주는 곳이 많아졌다.
지금 이곳도 그랬다.
아직 햇살이 강하지도 않고, 게다가 실내였지만, 이준기는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TV 화면에 자기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CNN 앵커가 뉴스를 읊고 있었다.
“한국 구원자 랭킹 1위, 이준기가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며칠 전 이준기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들러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다고, 총영사관 관계자가 밝혔습니다. 이준기는 공무에 한해 특별히 발급되는 ‘복수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으며, 구원자 특권으로 여행 목적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차원문 전문가 앤디 스위프트 씨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준기 구원자. 들어본 듯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화제가 되는 이유는 뭡니까?”
“구원자 팬덤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준기, 아는 이름일 겁니다.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역대 최고 속도 레벨업 기록 보유자이기 때문이죠.”
“그렇군요. 얼마나 빨리 레벨업을 한 겁니까?”
“이준기의 각성은 작년 8월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막 6개월이 지난 시점이죠. 현재 이준기의 추정 레벨은 49 내지 50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놀라실 만합니다. 50레벨이라면, 현재 미국 내 최고랭커 조슈아 테일러와 같은 레벨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조슈아 테일러의 각성 시점은 2019년 10월 21일입니다. 한참 전이죠.”
“조슈아 테일러도 꽤 빠른 레벨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록은 언제나 깨어지라고 있는 거라는, 옛말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이준기가 현재 50레벨 정도 되었다면, 이제는 최고 레벨업 속도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세계 최고레벨에 도전할 만한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화면을 보시죠. 현재 세계 최고 랭커 서열입니다.”
화면에는 전 세계 탑랭커들의 목록이 나타났다.
- 1위. 헬렌 카자크. 영국. 갓세이브더퀸 길드. 52레벨.
- 2위. 카말 파텔(Kamal Patel). 인도. 디센딩 크리슈나(Descending Krishna) 길드. 51레벨.
- 3위. 마누엘 올리베이라(Manoel Oliveria). 브라질. 히우두문두(Rio do Mundo) 길드. 51레벨.
- 4위. 조슈아 테일러. 미국. 101 길드. 50레벨.
- 5위. 하심 알 파델(Hasim Al-Fadel). 이집트. 카이로연합 길드. 50레벨.
“다들 아시겠지만, 구원자 레벨은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아니면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두 명 다 51레벨이지만 카말 파텔이 마누엘 올리베이라보다 높이 표시되는 이유는, 경험치 바가 어느 정도 찼느냐에 따른 것인데, 이 부분이 특히 부정확하거든요.”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죠.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방법이 있었다면 벌써 적용했을 겁니다. 구원자 팬덤 관련 산업은 현재 전 세계 문화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까요. 결국 구원자 개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것 말고도 구원자 랭킹 집계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개개인의 신고에 의한 것이라서, 신고를 안 하면 아예 알 수가 없는 거죠. 랭킹에서 아예 빠지게 되는 겁니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랭킹 표를 보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면, 누구라도 의아한 생각이 드실 겁니다.”
“중국 말씀하시는 거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구원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중국 구원자협회가 세계 랭킹 집계에 자료를 보내지 않기 때문인데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사는 중국이 빠진 랭킹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중국이 랭킹 집계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역시 군부 때문입니까?”
“전문가들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전원 공무원 신분인 중국 구원자들은 공안이나 군에 소속해서 활동 중인데요, 중국 정부는 이들을 기밀로 취급합니다. 특수 부대 취급이죠. 전문가들은 전 세계 최상위 랭커 10명에 중국인 구원자가 적어도 둘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이준기가 정말 50레벨이라면, 조금 전에 보셨던··· 아니 이제 다시 화면에 나오는군요. 지금 화면에 보이는 전 세계 랭킹 5위권에 포함되는 것 아닙니까?”
“네, 그래서 지금 전 세계 구원자 팬덤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겁니다. 미국의 자랑, 조슈아 테일러에게 선의의 경쟁자가 생기는 거죠. 그것도 우방국 한국 출신의 구원자로 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준기는 현재 개인 자격으로 여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디에 있을까요?”
“본인 이름으로 된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니, 신분을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개인 정보 보호 제도 때문에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걸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입국했다면, 유명한 그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어쩌면 미국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이준기는 아직 미국 팬덤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니까요.”
“이준기가 지금 미국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하하. 앤디 스위프트 씨,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길거리에서 동양인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캘리포니아지만, 이준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에 하나, 누가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행동에 제약이 된다.
맛없는 커피도 이미 다 마셔버렸다.
*****
3월 7일 월요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한 한상태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미 사죄의 기자회견을 했으므로, 간단하게 질의응답 시간만 가지기로 했지만, 기자들의 질문이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기자회견이나 다름없어졌다.
피곤하기도 해서 짧게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상태는 성실하게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외국에까지 나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마피아 소탕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이제는 침략행위였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시는 겁니까?”
“블라디보스토크 기자회견에서 이미 밝혔듯이,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일본 협회 구라모토 회장이 사고를 당한 건 알고 계십니까?”
“뉴스를 통해 알았습니다.”
“직접 통화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공무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죠.”
“한상태 회장이 철군을 결정한 것과 시기를 딱 맞춰서 구라모토 회장이 사고를 당했는데요, 관련이 있습니까? 세간에는 자살 기도라는 말도 있어서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 땅에서 사망한 구원자들에 대해서는 사후 처리가 어떻게 되나요? 불명예스러운 작전 수행 중에 사망한 게 되는데···”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준기가 살아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사태에 이준기는 관련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연의 일치가 너무 절묘한 것 아닙니까?”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도에서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협회장 직은 유지하시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협회 차원에서 검토를 하겠습니다. 협회 회원 전부, 그러니까 한국 구원자분들 모두에게 의견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한국에 없는 이준기나, 은퇴한 문아린은요? 그 사람들 의견도 받습니까?”
“모든 분들에게 의견 개진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제안을 하고 안 하고는 그분들이 선택하실 일이고요.”
결국 한상태는 쓰러진 다음에야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쓰러지는 척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쓰러진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기를 상대하다가 분을 못 이기고 쓰러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줄을 완전히 놓았다.
기자들의 질문세례를 각오하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정신력 게이지가 바닥을 쳐버렸다
쓰러진 한상태를 차로 옮기는 동안에도 기자들은 쫓아다니면서 질문을 퍼부었다.
한상태의 바로 옆을 지키던 설국헌과 장대한에게 주로 질문이 쏟아졌다.
“유지호 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해외에 나가 나라 망신을 시킨 사람인데요.”
“문아린 구원자의 은퇴가 번복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길수연 구원자가 협회에 탈퇴 신청을 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얼굴이 마비될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설국헌은 ‘실례합니다’를 연신 외쳤다.
기자들은 아무래도 우락부락한 인상의 장대한보다는 설국헌에게 질문을 던졌다.
승합차 문을 간신히 닫고 나서, 장대한이 설국헌에게 말했다.
“휴··· 설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끈질기네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제 협회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상태 회장이 말한 대로, 모든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봐야죠.”
“협회가 제대로 돌아가야 할 텐데··· 주말에 상암동에 차원문이 하나 더 열렸다고 하더라고요.”
“상암동이라··· 잠깐 동안이지만 외국에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지 왠지 낯설게 들리네요. 귀국한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죠, 교수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설국헌은 눈을 감았다.
오후의 봄 햇살이 차 안으로 들어와 그의 눈꺼풀을 간지렸다.
너무 밝아서 그런지, 자는 척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진정 원하는 걸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그렇게 강의를 하고 다녔는데. 지금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구원자가 되는 바람에 밥벌이 걱정도 사라졌는데, 나는 왜 아직도 불행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