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52: 캘리포니아 (5)
Episode 52: 캘리포니아 (5)
바닥에 주저앉은 추이 이아고닉은 멍한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날아가는 빛의 방패의 궤적 위에, 상대방은 있었다.
유도탄처럼 날아가는 빛의 방패는 원래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유도탄이 아니더라도 그 위치에서 그걸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검을 든 오른손을 치켜올렸던 것이다.
상대방이 빛의 방패에 닿는 순간, 한칼에 두 조각을 내려고.
그러나···
다음 순간, 넘어진 것은 상대가 아니고 자신이었다.
빛의 방패를 유유히 피해 품으로 파고든 이준기가 추이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이준기의 손에는 칼날 길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장난감 같은 발리송이 들려 있었다.
귀검이나 소멸 같은 스킬을 쓴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빛의 방패를 마치 옆구리에 끼고 움직이는 것처럼, 이준기는 추이를 향해 다가왔다.
빛의 방패는 이준기를 지나쳐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준기의 타격에 추이의 정신 집중이 무너진 탓이다.
추이는 무릎을 땅에 짚어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제기랄··· 빛의 방패! 돌아와라!”
빛의 방패가 급하게 코너링을 해서 추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추이를 향해 돌아오던 빛의 방패가 공중에서 멈춰 섰다.
“정신 집중이 흐트러져서 그런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에잇!”
추이는 뭔가에 홀렸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털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핏발이 설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빛의 원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공중에 멈춘 빛의 방패는 여전히 제자리에 정지한 채였다.
추이는 빛의 방패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유로운 표정의 이준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외의 위압감에, 추이는 무릎을 다시 굽히며 주저앉았다.
“서··· 설마? 네··· 네놈이 하는 거냐?”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의 표정이 그의 얼굴 전체를 휘어잡고 있었다.
이준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알아챈 거야? 너무 늦는데.”
“뭐··· 뭐야? 설마··· 텔레키네시스?”
“잘 아는군.”
“텔레키네시스로 빛의 방패를 제어한다고? 저건··· 내 건데? 내 빛의 방패란 말이다!”
“그 정도로 놀라주니 고맙기는 한데, 그렇게 사소한 일에 놀라다간 앞으로 놀랄 일이 너무 많을 거야.”
이준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빛의 방패를 움직였다.
멀리에서부터 빛의 방패가 다가오자, 추이의 멕시코 갱 부하들은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주춤주춤 피하려고 움직였다.
그들의 한가운데로 날아온 빛의 방패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지지직···
잠시 네온사인처럼 지직거리던 빛의 방패가 완전히 꺼졌다.
멕시코 갱들은 놀란 눈으로 빛의 방패가 사라져간 땅바닥을 바라보다가 자신들의 대장, 추이 이아고닉을 쳐다보았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추이 이아고닉은 이준기를 향해 외쳤다.
“너··· 넌 뭐냐? 설마 조슈아 테일러? 아··· 아니지. 네놈은 동양인이잖아!”
“캘리포니아에 동양인은 많잖아?”
동양인이 훨씬 희귀했던 러시아에 비하면 확실히 활동하기 편할 거라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주저앉은 상대를 향해 눈을 내리깐 채, 이준기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추이 이아고닉이지? 알타 캘리포니아 소속.”
“뭐··· 뭐야! 어떻게 알고 있지?”
“네 부하가 알려줬지.”
“디에고··· 이 쓸모없는 녀석. 붙잡힌 것으로도 모자라 이것저것 되는 대로 다 불었군. 너··· 넌, 정체가 뭐야? 서부 전선 녀석이냐?”
“글쎄. 좋을 대로 생각해라.”
“비겁한 놈··· 정체를 밝히지도 않다니.”
“침략자에게 그런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데.”
“나··· 나를 제압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난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다!”
추이는 다치지 않은 다리 쪽으로 무게를 실으며 일어났다.
이준기는 반 발짝 뒤로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추이의 오른손에 꽉 붙들린 채로, 긴 칼날이 가로등 조명에 빛났다.
“그렇게 큰 칼을 다 보이게 들고 다니다니, 간이 크구나.”
“간이 큰 건 기본이고, 실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마.”
“설마, 다시 덤비려고? 다쳤잖아?”
“이따위 부상,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생각보다 좀 아플 거다. 조금 깊게 베었거든.”
말의 위력인지, 추이는 베인 다리에 다시금 고통을 느끼며 잠깐 휘청거렸다.
이준기가 주머니에 양손을 넣으며 말했다.
“라호야에 열려 있는 차원문은 없다. 조슈아 테일러가 그런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차원문에 들어가서 힐링 포션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거다.”
“주머니에 손을 넣다니, 내가 우습냐?”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아.”
“뭐가 어째?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내 부하들이 안 보이냐?”
“총은 쏘지 못할 거야. 다들 손을 다쳤으니.”
“그··· 짧은 시간에? 그럴 수가···”
추이는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들,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서 저놈을 쏴라!”
그러나 돌아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다리를 다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부하들은 다들 다리보다 손을 감싸 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넋이 나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 추이를 향해 이준기가 말했다.
“이 근방에는 차원문이 없다. 병원에 가든가 멕시코로 돌아가든가 해야 할 거야.”
그때, 요란한 총격음이 하늘을 갈랐다.
이어지는 목소리.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경찰의 경고가 밤공기를 울렸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불응하면 발포하겠다!”
*****
구원자의 등장과 함께 미국 경찰의 용의자 제압 프로토콜은 완전히 바뀌었다.
위협 사격은 당연히 허용되고, 먼저 총을 쏘아 상대를 맞히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선제적 정당방위’가 인정된다.
상대가 구원자인 경우는 물론이고, ‘구원자라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입증되는 경우’에도 경찰의 선제 발포는 처벌되지 않는다.
NYPD 소속 경찰들이 파업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만, 급속히 50개 주 전체로 퍼졌다.
길드 ‘101’의 통제로 인해 구원자 범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캘리포니아 남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용의자 제압 프로토콜의 변화와 함께, 경찰의 오발 사고는 급증했다.
희생자는 언제나 소수 인종이었지만, 과잉 대응이라는 비난에 대해서 경찰의 입장은 단호했다.
“선제발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경찰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이번에도 희생자가 소수 인종이었지만, 우연일 뿐입니다.”
경찰에 대한 범죄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드레 럭러스터와 같은 흑인 구원자들이 경찰을 사냥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구원자일지도 모르는’ 범죄자에 대응하기 위한 경찰의 과잉 대응은 오발 사고를 불러오고, 이상하게도 소수 인종에게 집중되는 오발 사고는 분노를 넘어 경찰을 희생자로 삼는 범죄의 증가를 불러왔다.
그래서 경찰은 더더욱 과잉 대응을 해야 하는, 악의 순환 고리가 끝없이 소용돌이쳤다.
경찰의 사제 총기류 구입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범죄자들의 무장 수준에 발맞추어 사제 총기류를 구입하는 경찰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구원자 범죄의 등장, 그리고 경찰의 과잉 대응에 의한 악순환 고리로 인해 이제 사제 총기류 구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하나뿐인 목숨, 돈이 문제가 아니다.
총포 상인을 통해 정식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경우 경찰의 사제 총기류 구입은 뒷골목에서 이뤄졌다.
훨씬 싼 가격에 훨씬 더 좋은 무기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기들은 러시아와 멕시코 마피아가 공급했다.
세르게이도 그 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무기 판매도 아주 중요한 수익원이지. 전 세계가 러시아제 무기를 원하니까.”
“그 정도야? 전 세계라고?”
“가성비가 그 비결이지. 독일제나 미국제에 비해서 러시아제는 가성비가 끝내주니까. 비슷한 성능의 무기를 독일제로 사려면 돈을 두세 배는 지출해야 한다고. 미국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웃기는 게 뭐냐 하면, 미국 경찰들이 제일 많이 들고 다니는 게 러시아제 무기야.”
“정말이야? 예전에 네가 말했잖아. 독일제 글록을 제일 많이 들고 다닌다고.”
“그건 옛날얘기지. 이런 얘기 하면 대장이 화낼지도 모르는데, 해도 되려나?”
“궁금하잖아. 일단 말해봐. 화를 낼지 말지는 일단 듣고 나서 생각해볼 테니.”
장난스러운 이준기의 목소리에, 세르게이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아, 대장은 역시 무책임하군. 좋아, 얻어맞을 각오로 말한다.”
“그래, 뭐야? 궁금하니까 빨리 말해봐.”
“미국 경찰들이 죄다 러시아제 총기류를 들고 다니는 건,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 때문이라고. 내가 극동 마피아 총기 수출을 담당하면서 그렇게 바뀐 거야. 수출 진흥 표창이라도 받아야 하는 사람이야, 내가.”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아아, 화내지 마. 난 그냥 일을 열심히 한 건데. 살인이나 마약 판매보다는 낫잖아?”
“휴우, 그것도 그렇긴 하군.”
“그리고, 내가 안 팔았어도 누군가는 그쪽으로 길을 열었을 거야. 멕시코 갱들한테 상품 조달이나 하던 러시아 마피아가 직접 고객 관리에 나선 거지. 중간 유통을 많이 거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직거래가 낫잖아?”
“직거래를 했다고? 미국 경찰과 러시아 마피아가?”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멕시코 놈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거기까지는 못 했어. 놈들에게도 빵 부스러기는 좀 남겨줘야 했지. 그래도 예전에 비해 유통 단계를 많이 줄였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자리를 비웠으니, 요즘 미국 경찰들은 좀 난감하겠군? 값싸고 질 좋은 러시아제 무기를 구하기 어려워졌으니.”
“아직은 괜찮겠지. 바다 건너가는데 보통 두 달 정도 잡으니까, 아직까지는 멕시코 갱들한테 재고가 있겠지. 그렇지만 그놈들도 이제 초조할 거야. 재고가 줄어드는 게 보이는데, 새 물건은 안 들어오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정말 문제가 생길 거야. 멕시코 갱들에게 러시아제 무기를 대는 게 극동 마피아만은 아니지만, 우리가 제일 큰 소스였던 것은 맞으니까.”
과연 세르게이 효과가 벌써 작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원래 친독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경찰이 손에 든 것은 독일제 글록 19였다.
평화로운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구원자로 추정되는 적’을 상대하는 것이 처음인지, 경찰의 다리는 멀리에서도 잘 보일 정도로 후들거렸다.
검을 내던지고 양손을 머리 높이로 든 추이 이아고닉이 이준기를 향해 작게 말했다.
“경찰이다. 오늘은 그냥 좋게 헤어지는 게 어때?”
“훗. 그런 다리로 도망을 가겠다고?”
“너에게서는 도망치지 못하겠지만, 경찰 따위는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다.”
추이 이아고닉.
멕시코 구원자 계나 미국 내전에서 중요한 인물일지는 모르나, 이준기에게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가만히 둬도 세계 대전에 휘말려 죽을 인물이다.
조슈아 테일러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샌디에이고로 왔지만, 만나지 못했다.
조슈아 대신 이준기가 멕시코 갱들의 말썽을 해결해 준 셈이 되었다.
어쩌면 정말 그 때문에 조슈아 테일러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준기는 낮은 목소리로 추이에게 말했다.
“추이 이아고닉. 캘리포니아에 다시 들어올 생각은 말아라.”
“그래. 고려해 보겠다.”
“널 경찰에게 던져주고 갈 수도 있어. 대답 잘해라.”
“아··· 알았다. 캘리포니아 땅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
미국 내전에 개입하는 결정을 추이 이아고닉이 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이곳에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를 미국 경찰에 넘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이준기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