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22화 (22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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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2: 캘리포니아 (4)

Episode 52: 캘리포니아 (4)

서부 전선 구원자들을 끌어내려는 도발 사격 예정 시각은 밤 10시 반에서 11시 반 사이.

10시부터 이준기와 디에고는 라호야 근방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주택가를 걸을 수는 없으니, 상가 지역인 UTC(University Town Center)를 걸었다.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지만, 식당, 술집, 커피숍은 대개 아직 열려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지만 춥지 않고 시원했다.

“정말 날씨가 좋구나. 이렇게 쾌적하다니.”

“저··· 정말 그렇군. 날씨가 참 좋은데.”

“엥? 네 고향은 이렇지 않냐?”

“나? 난··· 멕시코시티 출신이야. 공기는 더럽고 날씨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37레벨이면 잘살고 있을 거 아냐?”

“확실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겠지. 차원문과 구원자들이 등장하고 나서 멕시코는 예전보다도 더 살기 팍팍해졌으니까.”

“구원자들이 마피아가 돼서?”

“처음에는 마피아가 구원자를 사냥하려고 했지. 구원자를 부하로 고용하려고 한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지. 대장이 더 잘 알겠지만, 쪼렙 구원자 따위, 총으로 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구원자들이 총을 쥐면서 상황이 바뀌었지. 마피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뛰고, 더 무거운 것도 들어 올리는 구원자들이 총까지 손에 쥐게 되자, 거꾸로 마피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어. 시력도 더 좋으니까, 단순히 사격술만 놓고 봐도 게임이 되지 않았지.”

구원자들을 더 나은 사수로 만드는 것은 우월한 시력뿐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더 효율적인 신진대사, 그리고 그로 인한 느린 심박, 훨씬 더 길고 고요하게 멈추는 것이 가능한 호흡.

“디에고, 너는 언제 구원자로 각성한 거지?”

“2019년 말에 각성했어. 구원자 판 전체를 놓고 봐도 꽤 초기에 각성한 거지. 그런데도 겨우 37레벨이니까, 재능이 부족한가 봐.”

“단순히 재능 문제는 아니지. 상황이라는 게 있으니까.”

“고··· 고마워, 대장.”

딱히 디에고의 기를 북돋우려 말한 건 아니었다.

예전과 현재의 자기 상황을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인데, 디에고는 그걸 격려로 받아들였나 보다.

“네 얘기를 조금 더 해봐. 구원자로 각성하고 나서는 뭘 했지?”

“나··· 난 원래 전자제품 수리점을 하고 있었어.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이것저것 고치는 거야. 주로 휴대폰 액정 교체 같은 일을 했지.”

“성실하게 살았군.”

“정말 그랬지. 구원자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말야. 멕시코시티 허름한 뒷골목에서 장사를 했어. 언제나 갱들에게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뜯기고는 했지. 내가 뭐 버는 게 쥐꼬리만 하다는 걸 그놈들도 아니까, 많이 빼앗아 가지는 않았어. 돈이 있어야 뺏어가기라도 하는 거 아냐. 그런데 구원자로 각성했지.”

“놀랐겠군?”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 눈앞에 뭐 이상한 게 보이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마음 먹기에 따라 조작도 되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이게 무슨 병인가 걱정하고 있는데, 어떤 손님이 알려주더라고. 구원자로 각성한 거라고.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과연 그렇더군.”

“그때까지 인터넷을 찾아보지 않았다고?”

“난 인터넷에서 스포츠 중계랑 드라마나 보던 사람이라서. 그런 정보가 인터넷에 있는 줄도 몰랐어. 그리고··· 그땐 구원자에 대한 정보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고.”

그건 맞는 말이다.

모든 걸 처음부터 스스로 깨쳐야 했던 헬렌 카자크만큼은 아니더라도, 초기 구원자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더구나 차원문 첫해 12월이라면··· 구원자 한 달 평균 생존율이 50%까지 떨어졌던 시기다.

처음의 조심스러움을 지나 자신감을 얻은 구원자들이 무리하게 활동한 결과다.

매뉴얼과 조직을 만들고 체계적인 서포트가 가능해진 다음에 생존율은 다시 70%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한 달 평균 생존율은 70%의 한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내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부에서 사람들이 왔어. 갑자기 육군 소속 장교가 됐지. 곧바로 중위를 달았어. 얼떨떨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갑자기 계급장을 다니 우쭐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 그런데 경찰 쪽에서도 나를 찾아온 거야. 더 높은 직위를 줄 테니 경찰로 넘어오라고 하더라고.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커피숍을 나오는데, 육군 본부에서 보자는 거야. 경찰 쪽 사람들과 만난 게 들통났나, 어떻게 하지··· 뭐 이런 걱정을 하고 갔더니, 당장 대위로 진급시켜 버리더군. 한 달도 안 돼서 중령까지 올라갔어. 주··· 중령이 얼마나 높은 건지 알아?”

그렇게 말하는 디에고의 목소리는 옛 영광에 취해 고양되어 있었다.

“중령! 딱 한 달만 복무하고 퇴역해도 연금이 나와! 직업 군인 중에 중령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 줄 알아? 그··· 그걸 겨우 한 달 만에 달았어!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상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

“그렇겠지.”

이준기는 경찰 특채에 황공해 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어느 날, 차원문을 정리하고 나와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어떤 녀석이 물어보더라고. 얼마나 버냐고. 그때 아마 소령이었을 거야. 소령 봉급에, 구원자 수당, 거기에 또 차원문에 들어갈 때마다, 그리고 차원문을 닫을 때마다 추가로 보너스를 받았으니까, 꽤 됐지.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도 되는 건지, 옆자리에 있던 육군 장성의 표정을 살폈지. 장성은 고개를 저었어. 그래서 정확히 얼마나 버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다고, 공손하게 질문했던 기자에게 대답했지. 그랬더니, 그 기자가 말했어.”

“···”

“다른 구원자들은 엄청나게 벌 텐데··· 그걸 마다하고 군인 생활을 하다니 대단하다고.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말했지. 말하는 내용은 칭찬이지만, 말투에 조소가 묻어나는 건 나도 느낄 수 있었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내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온 것이.”

“악마···라고?”

“그래, 악마. 이런 말, 믿기지 않겠지만··· 난 신을 믿어. 아니, 예전에는 신을 믿었다고 말해야 하려나? 그래서 장사를 했을 때도, 군대에 있을 때도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그날 기자회견 후에 그게 안 되는 거야. 난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지? 그런 질문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어. 휴대폰 액정이나 고치던 때에 비하면 열 배도 넘는 돈을 벌고 있지만, 구원자라면! 구원자라면 당연히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는데 나는 그러고 있지 못하잖아. 마음속에 분노가 쌓여갔지.”

“그래서?”

“이것저것 일과에 묶인 군인 생활이 갑자기 너무 싫어졌어. 어떻게든 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내 마음속의 악마가 핑계를 만들어 냈던 거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한숨을 푹푹 쉬면서 출근을 하는데, 사무실 내 책상이 조금 지저분했던 거야. 그··· 그래서···”

디에고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준기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뭐야?”

“머··· 멍청한 놈! 마··· 마리오! 적당히 아무 핑계나 댔으면 좋았잖아!”

“무슨 말이야?”

“책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당번병을 혼냈어. 그놈 이름이 마리오였지. 그··· 그런데 그놈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너무 답답했어. 아마 그 녀석에게서 내 옛 모습을 본 거겠지. 나··· 난, 살인자가 됐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무실에 나밖에 없었지. 마리오는 죽고, 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망쳐 버렸으니까. 그렇게··· 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지.”

“군사 재판?”

“그··· 그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땐 구원자들이 법정에도 서고 그랬어. 심지어 미국도 아니고 멕시코에서 말야. 어떻게 되는 걸까··· 육군 교도소로 이감을 기다리면서 영창에서 나는 밤하늘을 보고 있었지. 그런데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어.”

“갱?”

“그래. 멕시코시티 갱 조직이 영창을 기습한 거야. 날 스카우트하려고 한 거지. 목숨을 빚진 나로서는··· 영입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어. 아니, 사실, 그렇게 살고 싶었던 거지. 그렇게 갱이 된 거야.”

“그래서, 사는 게 좀 나아졌나?”

“돈은 분명히 훨씬 더 많이 벌었지. 하지만 결국 군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게다가, 이제는 교회에 가지도 않지. 무슨 낯으로 교회에 가겠어.”

*****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밤하늘을 총성이 갈랐다.

총성에 움츠리면서 디에고가 소리 질렀다.

“나··· 남쪽이야!”

“남쪽이면 어디지? 여기 지리를 좀 아나? 난, 어제 온 거라서.”

“미··· 미안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샌디에이고는, 아니 캘리포니아는 처음이야.”

이준기는 서둘러 휴대폰 지도 앱을 열었다.

UTC 남쪽은 주택가였다.

어제와는 다른 지역이지만, 오늘도 멕시코 침략자들이 소란을 피우려는 곳은 주택가였다.

“또 주택가군.”

“주택가에서 소란을 피우라는 명령은 없었어. 어제도 그냥 아무 데나 고른 건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시선을 집중하려는 이유는 뭐야?”

“그··· 글쎄?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아닐까?”

“저놈들이군.”

달리기를 멈추면서 이준기가 디에고에게 말했다.

멀리, 7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코트에 중절모까지 쓴 키 큰 남자가 가운데에 있었다.

가로등을 배경으로 한 실루엣에는 허리에 찬 기다란 칼도 보였다.

그 모습에, 디에고가 사색이 되었다.

“저··· 저건··· 추이!”

“추이? 헤수스 이아고닉이라는 놈?”

“그··· 그래! 어··· 어쩌면 날 죽이려고···”

“죽인다고?”

“저놈은···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죽여. 작전 중에 사로잡혔으니, 아마 날 죽이려고 할 거야··· 으아아!”

이준기는 바람막이를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얘기를 좀 해볼까?”

그 말과 동시에, 디에고의 눈앞에서 이준기가 사라졌다.

*****

가운데 키 큰 남자를 제외하고, 여섯 명의 부하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리나 팔, 다들 몸의 한군데를 부여잡고 쓰러져 신음하는 갱들 사이에서 이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 큰 남자, 추이 이아고닉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뭐냐?”

“어디에서 총질이야.”

“미국놈? 서부 전선이지?”

“용병 짓거리는 범죄다. 당장 감옥에 넣어주지.”

“글쎄, 그게 네 맘대로 될까?”

추이 이아고닉의 손에 흰색 원반이 나타났다.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밝아지는 빛의 원반.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추이 이아고닉이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죽기 전에, 이름은 들어주마.”

“그런 대사는 도대체 왜 하는 거냐?”

“뭣이?”

인상을 찡그리며, 추이 이아고닉은 이준기를 향해 빛의 방패를 내던졌다.

동시에, 그는 허리춤에서 긴 검을 꺼냈다.

많이 보던 움직임이다.

적을 추적해 날아가는 빛의 방패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적이 빛의 방패를 상대하는 사이, 빈틈을 노려 공략해 오는 패턴.

빛의 방패에 맞으면 순간적으로 이동 속도가 90% 감소한다.

거의 제자리에 얼어붙는 수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빛의 방패를 쳐내는 수밖에 없다.

포인트는 빛의 방패와의 접점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접점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둔화 효과를 받게 된다.

마법 막대가 빛의 방패에 대해서 최적의 카운터가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법 막대의 타격 방식은 힘의 장(場)에 의한 것.

직접 타격이 아니기 때문에 빛의 방패의 둔화 효과를 조금도 받지 않는다.

빛의 방패를 보고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준기를 바라보며, 추이 이아고닉이 외쳤다.

“뭐야, 생초짜야?”

“자신감인데?”

“제법 빠르구나! 하지만 빛의 방패는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빛의 방패에 닿으면 상대는 곧 굼벵이처럼 느려질 것이다.

그렇게 거의 제자리에서 꾸물거리는 상대를 검으로 가볍게 갈라주면 된다.

즐거운 상상에 저절로 웃음을 지으며, 추이 이아고닉은 오른손을 들어 검을 위로 올렸다.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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