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20화 (2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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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2: 캘리포니아 (2)

Episode 52: 캘리포니아 (2)

3월 7일 월요일. 아침 10시.

강남구 도곡동 한국 길드협회 사무실.

오픈 시간인 10시에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들어왔다.

커피 머신에서 막 뽑은 종이컵을 들고 문을 열던 남자 직원이 탄성을 질렀다.

“길수연 구원자님!”

긴 생머리에 야구모자를 쓴 그녀의 손에는 얇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길수연은 꾸벅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서류 접수하러 왔는데, 어느 분께 말씀드려야죠?”

TV에서나 보던 슈퍼스타를 직접 본 직원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저,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어떤 서류죠?”

“탈퇴 신청서요.”

“타··· 탈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책상들의 숲 저편에서 여자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퇴··· 하시겠다는 거예요?”

“네.”

“은퇴 처리라면, 제가 한번 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 저 좀 도와주세요.”

길수연은 일어선 여자 직원을 향해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자 직원은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하하. 연습을 몇 번 했는데도 말이 잘 안 나오네요. 그게··· 설국헌 교수님이라고 아세요?”

“물론이죠. 설 교수님도 우리 회원이시니까요. 구원자이시기도 하고.”

“하긴, 그렇군요. 어제, 유튜브에서 설 교수님 예전 강의를 하나 봤어요.”

각본대로 설국헌 교수 강의 영상 이야기를 꺼냈지만, 다음 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연습한 대로 말하려고 하는데도 거짓말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여직원을 향해 길수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 외운 대로 하려는데 대사가 잘 안 나오네요. 하지만 거짓말은 아녜요. 어제 설 교수님 강의 영상을 본 건 사실이니까.”

“네··· 그래서요?”

“설 교수님, 구원자 되시기 전부터 인생 상담 강의로 인기 많았잖아요.”

“네, 그랬죠. 호불호가 갈리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 자신을 돌아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은퇴하려고요.”

“아아···”

“은퇴 서류 처리 경험이 있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여기 대강 써오기는 했는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좀 처리해주시겠어요?”

여직원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 일신상의 이유로 한국 구원자 길드협회 회원 자격 및 구원자 자격을 모두 반납하려고 하니 적의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신상의 이유요?”

“인터넷 찾아보니까 사직서는 그렇게 쓰더라고요.”

“진짜 이유가 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어느새 옆에 와서 함께 서류를 들여다보던 남자 직원도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길수연은 웃으며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그게 뭔지, 여쭤봐도 돼요?”

“차원문들을 빨리 정리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요. 모두 함께, 예전의 평화로운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요.”

남자 직원이 길수연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그··· 그걸 지금 하고 계시잖아요! 구원자 활동,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잖아요!”

길수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웃음 주름이 잡혔고, 입꼬리는 미소를 띠며 조금 올라갔다.

뭘 회상이라도 했는지, 다시 눈을 뜬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에요.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잖아요, 저는.”

“길수연 구원자님은 열심히 하고 계세요! 제가 아는 가장 훌륭한 구원자십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사실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협회가 정해주는 대로, 던전에 들어가서 동료들에게 힐 하고, 차원문 닫고···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죠. 그게 아니라는 것,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단호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친 길수연은 미소를 띠고 둘을 바라보았다.

더는 할 말이 없는지, 남자 직원은 입을 닫았다.

여자 직원이 대신 말했다.

“협회장님도 안 계시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한 회장님 러시아 기자회견, 봤어요. 한 회장님의 새로운 협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행동할래요. 더는 미루지 않겠어요. 저는 제 길을 가려고 합니다.”

“길수연 구원자님!”

“잘 처리해 주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오늘 오후에 출국하기는 하지만, 전화번호는 그대로 가져갑니다. 로밍이라서 요금이 부담되기는 하겠지만, 전화 주시면 언제든지 받을게요.”

*****

같은 시각, 샌디에이고는 아직 3월 6일이다. 오후 5시 30분.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을 향해 가는 중이다.

새벽부터 같은 뉴스가 반복되는 CNN.

라 콜롱브(La Colombe)의 나이트로 라테를 빨대로 들이키며, 이준기는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이 극적으로 끝난 가운데, 미국 내전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간밤에도 뉴욕시 퀸즈를 비롯해서 적어도 전국 일곱 곳에서 구원자들 사이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현장 연결합니다.”

“뉴욕시 퀸즈 총격전 현장입니다. 보시다시피 주택가입니다. 총격전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습니다. 직접 목격했던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비싸 보이는 집들이 죽 늘어선 퀸즈 주택가.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열띤 어조로 말했다.

“척 봐도 구원자들인 걸 알겠더라고요. 뛰는 속도가 자전거보다 더 빠르더라고요. 게다가 이 동네 사람들도 아니었고요. 이 근방에서 남미계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다니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여기서 25년째 살고 있는데···”

동부 연합 대변인인 드레 럭러스터가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지 않은 것도 이미 한 달이 되어간다.

지난 1월에도 드레 럭러스터 사망설이 퍼졌지만, 드레는 며칠 후에 영상을 올려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영상 녹화 시점에 대한 시비를 없애려고, 그는 바로 전날 뉴스를 들먹이면서 논평을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다시금 그의 사망설이 퍼지고 있지만, 새로운 영상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다.

뉴욕시 퀸즈라면 드레 럭러스터의 본진이다.

뉴스 앵커도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뉴욕시 퀸즈라면, 동부 연합 대변인 드레 럭러스터의 저택이 있는 곳이죠?”

“네, 그렇습니다.”

“어젯밤에 총격전이 있었지만 드레 럭러스터를 보았다는 증언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의 사망설이 한 달 정도 전부터 널리 퍼져 있는데, 소문이 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어제 자기 동네에서 벌어진 총격전에도 드레 럭러스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미 사망한 것 아닌가··· 이런 의심이 더욱더 짙어졌습니다. 게다가 어제 뉴욕시 퀸즈에 출몰한 남미계 구원자들은 5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미국 내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멕시코 구원자들이 맞다면, 지금까지 최대 규모입니다.”

“동부 연합, 서부 전선 모두 멕시코를 개입시켰다는 의혹은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죠?”

“멕시코 용병에 대한 의혹은 서부 전선이 먼저 제기했는데요, 동부 연합은 단호하게 부정했죠. 반면, 동부 연합이 의혹을 제기한 캐나다 길드 캐넉스(Canucks)의 내전 개입은 서부 전선이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순순히 인정하기는 했지만, 용병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다. 이렇게 말했죠.”

“네. 아무래도 그런 단서가 달렸기 때문에 순순히 인정한 것이라는 말이 많습니다. 멕시코에서 미국 내전으로 흘러들어온 구원자 규모도 크지만, 캐나다도 만만치 않습니다. 밴쿠버의 캐넉스가 서부 전선을 지원하려고 개입한 이후, 퀘벡 지방 길드 ‘퀘벡의 원탁(Table Ronde du Québec)’도 동부 연합 지원을 위해 국경을 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동부 연합은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만.”

“멕시코 구원자들이 동부 연합이 아니라 서부 전선 쪽 용병이라는 주장도 있잖습니까?”

“바로 그 주장을 한 것이 드레 럭러스터죠. 그냥 적에 대한 흠집 내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전쟁이니까, 근거 없이 일단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뉴욕시 퀸즈 외에도 전국 여섯 곳에서 총격전이 있었던 걸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말씀해 주시죠.”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역시 플로리다주의 올란도, 조지아주 브룩헤이븐(Brookhaven),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텍사스주 엘 파소,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이상입니다.”

“뉴욕시 퀸즈를 제외하면 그래도 멕시코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들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퀸즈 기습이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서부 전선 측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퀸즈에서 사살된 구원자들은 대개 서부 전선 측 구원자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간밤의 총격전은 그간 흔치 않았던 동부 연합 쪽의 승리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1월 중순 내슈빌에서 서부 전선 구원자 16명이 사망했잖습니까. 동부 연합으로서는 그 이후 최고의 전과가 될 것 같습니다.”

“퀸즈 외에, 다른 곳에서는 구원자 인명손실이 없었나요?”

“조지아주 브룩헤이븐에서 한 명 사망이 확인되었고요, 샌디에이고에서도 구원자 한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는 실종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만, 구원자가 차원문 안에서 사망한 경우 보통 이렇게 분류되어 있다가 나중에 사망으로 정정되는 일은 흔하니까요.”

이준기는 텔레비전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는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화들짝 놀라면서 남자는 들고 마시던 맥도날드 종이컵을 손에서 놓쳤다.

이준기는 재빨리 움직여 그 컵을 낚아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머리를 조아린 채 벌벌 떨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카펫 위에 엎었다면 호텔에서 가만히 안 있었겠지만, 그러기 전에 잡았으니 됐잖아.”

“감사합니다!”

“그만하면 됐으니, 고개 들어. 디에고.”

*****

조슈아 테일러는 종종 그 일화를 이야기하고는 했다.

“전 캘리포니아를 사랑합니다. 제 고향인 샌디에이고는 더더욱 그렇죠. 그런데 그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를 침략한 멕시코 사람들···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2022년 3월 5일이 바로 그날이었죠. 구원자를 처음으로 죽인 날.”

2022년 3월 5일.

조슈아 테일러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지만, 천사의 외모를 한 조슈아가 처음으로 다른 구원자의 목숨을 해친 날로 유명해졌다.

세 번 연속으로 비행기를 타면서까지 이준기가 밤 비행기를 타고 샌디에이고에 서둘러 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2022년 3월 5일 밤 조슈아가 멕시코 구원자를 죽인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조슈아 테일러를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와 시간이었던 것이다.

과연 3월 5일 밤 샌디에이고에서는 구원자들 사이의 싸움이 있었다.

운 좋게도 이준기는 바로 그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을 걷고 있었다.

조슈아 테일러에게 샌디에이고는 라호야와 동의어다.

조슈아 테일러가 샌디에이고 다운타운을 침범한 멕시코 갱에게 분노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의 성지, 라호야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그래서 이준기의 정찰 범위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라호야로 국한한다면, 한쪽 끝에서 울리는 총성이라도 다른 끝에서 들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다.

바로 어젯밤, 이준기는 라호야를 배회하며 구원자들의 싸움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디에고 라몬(Diego Ramon).

3월 5일 밤 11시 정도.

요란한 총격음을 따라 주택가의 골목에 도달한 이준기.

같이 온 다른 녀석들은 이미 자리를 뜬 것 같은데, 작달막한 멕시코인 하나가 남아 있었다.

벌벌 떠는 여자를 앞에 두고, 만화나 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는 3류 악당의 대사를 치고 있었다.

“어이구 이런 야심한 시간에 이렇게 인적없는 곳을 돌아다니면 어쩌라는 거야, 이쁜이?”

저벅.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동양인 남자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이 새낀?”

콧바람을 불며 깡패의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디에고 라몬.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손이 빠지지 않는다.

호리호리한 남자의 가느다란 팔목인데.

서늘한 캘리포니아의 봄밤.

콧등으로 싸늘히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과 함께 디에고는 말했다.

“구··· 구원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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