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19화 (21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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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2: 캘리포니아 (1)

Episode 52: 캘리포니아 (1)

입국 수속은 오래 걸렸다.

내전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려는 건지, 미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점검은 공항에서든 항구에서든 육로 진입 포인트에서든, 아주 심하게 강화되었다.

입국 수속장에는 수속 안내 방송이 반복되는 대형 화면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손안의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CNN, BBC, 알자지라, NHK···

저마다 보는 채널은 달랐지만, 뉴스 내용은 비슷했다.

워낙 큰 사건이 벌어진 탓인지, 뉴스는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

“CNN 크레이그 타일러입니다. 마피아를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에 들어왔던 속칭 ‘유럽연합군’ 총사령관 아가타 하바로프스키가 현지 시각으로 어젯밤,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에르미타주 미술관 약탈 계획을 담은 지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아가타 하바로프스키, 그 이름이 밝혀진 것은 어제가 처음이죠?”

“네, 앵커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동안 러시아 침략군은 서로를 코드명으로 불렀습니다. 회의 시간에는 가면까지 써서 자기들 사이에서도 정체를 감췄습니다.”

“총사령관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의 코드명이···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었다면서요?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거 정말 웃기는 일 아닙니까?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라면, 숨겨진 보물을 찾아 일궈낸 부를 기반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인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에게 그 보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었던 거죠.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주인으로부터 보물을 정당하게 인계받은 것이지만,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약탈하려고··· 그러니까 도둑질하려고 한 점이 다릅니다.”

“아가타 하바로프스키··· 폴란드에서는 아주 큰 길드 마스터라고 하던데요?”

“네,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길드, ‘솔리대리티’의 수장입니다.”

“뭘로 유명한 길드죠? 설마 도둑질로 유명한 건 아니겠죠?”

“도둑질로 유명한 건 아니고요, ‘솔리대리티’는 폴란드가 탈 공산화하던 시점에 자유주의 운동을 주도하던 노조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대로, 세계 각지의 자유주의 운동을 지원하던 길드로 유명합니다. 아니, 유명했다···고 과거형으로 말씀드려야겠군요.”

“왜 그렇죠?”

화면에는 두꺼운 금고의 원형 철문이 열리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지금 화면에 보이는 것이 솔리대리티 길드의, 아니 길드 이름으로 아가타 하바로프스키가 가지고 있던 비밀 금고입니다. 여기에서 그동안 그녀의 축재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축재라고요?”

“금괴나 보석은 물론, 광업 허가증, 어획 허가증 같은 것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세계 각지의 소수 민족 독립운동을 도우면서 대가를 받아왔던 거죠. 그런데 놀라운 일은 더 있습니다.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독립운동을 하는 반대쪽, 그러니까 독재자나 자유를 탄압하는 정부 쪽으로부터도 막대한 대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에서 돈을 챙긴 거죠.”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 된 것이, 장사의 귀재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아가타 하바로프스키가 구속되는 시점에, 언론사에 제보가 쏟아졌습니다. 그녀는 구원자 각성 전에 중학교 역사 교사였는데요, 교사로 재직할 당시에도 학부모들에게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고는 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러다가 징계를 당한 기록도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위선자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그래서, 유럽연합군은 해체된 건가요?”

“유럽연합군은 해체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이 사건도 놀랍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어제 사건이 더 충격적이었죠.”

“알자지라에서 보도했던, 모스크바 약탈 사건 말씀이시죠?”

화면은 불타는 모스크바 밤거리로 바뀌었다.

“네, 모스크바에 진주한 유럽연합군이 일반인들을 상대로 약탈, 강간,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는 것이 알자지라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되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이 사건에도 진전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맞습니다. 정체불명의 구원자에 의해 유럽연합군 모스크바 방면 사령관, 장-바티스트 콩트와가 살해되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어제 오후 늦게, 모스크바 소재 크렘린 보석박물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현장에서 두 사람의 결투 현장을 목격한 박물관 관계자의 인터뷰를 보시겠습니다.”

어제의 그 크렘린 박물관 직원이 화면에 나와 러시아어로 이야기했다.

“동양계 러시아인이었습니다. 침략자 놈이 얼음 마법으로 맹렬히 공격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더라고요. 위험해서 먼발치에서 지켜보느라 자세히는 못 봤지만, 완전히 일방적인 결투였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침략자 놈은 자기가 썼던 얼음 마법에 거꾸로 당해서 죽어 있더군요.”

다시 화면에 나온 기자가 정보를 보충했다.

“장-바티스트 콩트와는 크렘린 보석박물관의 유명한 전시품, 오를로프의 다이아몬드를 훔치려고 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것 참··· 유럽연합군이란 사람들은 죄다 도둑들인 겁니까?”

“글쎄요. 도둑이라고 부르면 그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연합군 모스크바 방면 부사령관도 어제 체포되었는데요, 생명은 구했으나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다시는 구원자 활동을··· 아니 범죄를 저지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더 가증스러운 범죄자라고 하던데요?”

“네. 이 사람의 이름은 테드 블랙. 영국인입니다. 알자지라 방송 보도로 인해 모스크바 원정군이 해산될 상황이 되자, 여학생들을 강간하려고 모스크바 대학에 침입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어떻게 체포했죠?”

“러시아 마피아와 싸우다가 크게 다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인터뷰에 나서는 사람이 없어 정확한 사실관계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천인공노할 범죄자들이군요.”

“테드 블랙의 경찰 진술에 따르면, 사령관 장-바티스트 콩트와도 매일 강간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여자를 납치해서 바쳤다고···”

“정말 가증스러운 범죄자들입니다. 이런 끔찍한 범죄가 결국 어제부로 끝난 거군요?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네, 다행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연합군 사건을 총괄 수사하고 있는 모스크바 경찰은 주범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를 상대로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도망친 나머지 주모자들의 신상도 밝혀졌고, 곧 인터폴에 수배될 예정입니다.”

화면에는 소위 유럽연합군을 주도해 러시아를 침략한 전범들의 실명이 공개되었다.

- 총사령관 아가타 하바로프스키. 폴란드인. 코드명 몬테 크리스토 백작.

-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면 사령관 뱅상 아르갈(Vincent Arghal). 프랑스인. 코드명 나폴레옹.

- 모스크바 방면 사령관 장-바티스트 콩트와. 스위스인. 코드명 바이런.

- 볼고그라드 방면 사령관 아델하이트 판데사르(Adelheid Van Dessar). 네덜란드인. 코드명 반 고흐.

- 크림반도 방면 사령관 아메데오 아스페사리오(Amedeo Aspessario). 이탈리아인. 코드명 엘 시드.

“정말 다국적 범죄집단이군요. 이런 사람들이 마피아를 소탕하겠다고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인터폴에 수배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인터폴이 이들을 잡을 수 있습니까? 이 범죄자들··· 전부 구원자 아닙니까?”

“네,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터폴은 국경없는 구원자회, 즉 SSF와 협조해서 이들의 체포에 나설 예정입니다. SSF 모스크바 지부장, 레온 소바킨 씨의 입장을 들어보겠습니다.”

문아린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던 러시아인 SSF 구원자, 레온 소바킨이 화면에 나왔다.

“범죄자들의 체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화면을 반으로 갈라 점령한 뉴스 앵커와 기자가 말을 주고받았다.

“이미, SSF가 이번 사태 해결에 도움을 좀 줬다고요?”

“네.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서쪽에서 넘어온 유럽연합군 외에도 동쪽에서 건너온 일한 연합군의 침략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 동쪽 전선에서 SSF가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동부 전선도 서부 전선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주력군은 마피아였던 거죠?”

“네. 극동 마피아의 마리아 보로닌이라는 여자가 러시아의 구세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보로닌 씨는 마피아 시절에도 악행을 별로 저지르지 않아 세간의 평가가 좋다고 합니다.”

“마피아 시절이라고 표현하신 걸 보면, 보로닌 씨는 이제 마피아 생활을 청산한 겁니까?”

“네,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아쉽게도, 마리아 보로닌 씨와는 인터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마피아는 물론 구원자 생활도 일제히 청산하고 은둔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나름 미담이군요. 러시아 관련 소식이 너무 처참해서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나마 해피 엔딩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 전쟁 소식이 너무 쏟아져서 시청자분들이 힘드실 것 같은데··· 뉴스가 아직도 더 남았다고요?”

화면은 도쿄 롯폰기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비추었다.

훨씬 더 높은 공중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장면에 이어, 펜트하우스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같은 화면을 반복해서 트는 가운데, 화면 오른쪽 아래에 기자 얼굴이 나왔다.

“침략 주체가 불분명한 러시아 서부 전선과는 달리, 동부 전선을 침략한 일한 연합군은 두 나라의 구원자 협회가 주도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와 관련해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 전쟁 배상을 청구하겠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화면에 작게 나오는 사람, 해상도가 안 좋아서 잘 보이지 않는데 누굽니까?”

“일본 구원자협회의 구라모토 신스케 협회장입니다. 어제 폭발 사건과 동시에 자신의 집인 펜트하우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생명은 건졌습니다만,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자 역할도 못 하게 된 거죠.”

“자살 시도라고요? 러시아 원정··· 아니 침략에 실패해서 그런 겁니까?”

“다들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어 확인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구의 몸이 된 만큼, 일본은 협회장을 새로 뽑아야 할 상황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 구원자 계는 협회의 입김이 대단히 세기 때문에, 협회장이 새로 뽑히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러시아 연해주를 함께 침략했던 한국 쪽은 어떻습니까?”

바뀐 화면은 한상태의 기자회견 장면을 내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병원이 배경이었다.

“한국 길드협회장 한상태는 원정 중에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 중인데요, 바로 그 병원에서 사죄의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사죄의 기자회견이라고요?”

“직접 들어보시죠.”

화면에는 한상태의 한국어 발표가 자막과 함께 나왔다.

담담한 표정으로 문서를 읽는 한상태의 모습을 보니, 정신적 충격은 어느 정도 극복한 모양이었다.

사죄문을 읽는 한상태 바로 뒤에는 설국헌과 장대한이 서 있었다.

“저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으신 러시아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를 드립니다. 피해자 구호를 위해 1억 달러 규모의 지원금을 조성하겠습니다. 그리고, 극동 지방의 차원문 문제 해결을 위해 SSF와 적극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화면에 다시 나온 기자가 말했다.

“우연하게도 SSF의 블라디보스토크 지부에는 한국 출신의 구원자가 나와 있습니다. 한 달 정도 전에 한국에서 구원자 생활을 청산하고 SSF에 입회한 여성 구원자입니다. 이번 극동 침략 사태 해결에도 크게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아린이 화면에 나와서 말했다.

“SSF는 이번 사태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에 러시아를 침략한 나라들 중에 저의 조국인 한국이 포함되었는데요,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18시간의 시차가 나는 거리에 있지만, 씩씩한 문아린의 모습을 화면에서나마 보니 이준기는 반가웠다.

휴대폰의 작은 화면 안에서 CNN 기자 크레이그 타일러가 클로징 멘트를 했다.

“잔혹했던 전쟁이 이제 러시아에서 물러가는 모습입니다. 저의 조국, 미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내전도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 CNN 크레이그 타일러였습니다.”

어느새 이준기는 줄의 선두에 와 있었다.

바른 자세로 앞으로 걸어간 이준기는 지문 날인 장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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