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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6)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6)
놀라는 것이 표정에 다 드러났지만, 구라모토는 애써 침착한 양 말했다.
“무슨 얘깁니까? 와타베 하야토라니··· 그건 그렇고, 이준기 상은 우리 일본 상위 랭커들을 전부 다 꿰고 계시는군요?”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지만, 제가 최근에 일본 랭킹 차트를 많이 압축해 드렸잖습니까. 이제는 목록이 꽤 간단해져서, 저절로 외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차트 압축을 했다는 겁니까?”
“와타베 하야토는 죽지 않았어요. 당분간은 랭킹 2위를 유지할 겁니다. 하지만 곧 차트에서 밀려나겠죠. 더 이상은 레벨업 할 일이 없을 테니까.”
구라모토의 얼굴에 이번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제대로 드러났다.
“츠··· 츠지 준페이는? 설마 그놈도?”
“만나는 봤습니다. 제 논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곧바로 수긍하더군요. 약속을 하겠다고, 혈서라도 쓸 기세였습니다만.”
“도··· 도대체 언제 일본에 들어온 거냐?”
“연착으로 악명 높은 아에로플롯(Aeroflot)이라서 걱정을 좀 했는데, 운이 좋은지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아침 11시쯤에 나리타 공항에 내렸죠.”
“그··· 그 사이에 와타베와 츠지를 모두 만나 처리했다고?”
“유튜브가 있어서 일이 수월했습니다.”
이준기가 들이민 휴대폰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누군가가 찍은, 이준기와 사이토의 대결 동영상이다.
“이··· 이런 게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거냐?”
“제가 올린 게 아녜요. 구경하던 누군가가 올린 거지.”
“그래서, 이걸 들고 사람들을 협박하고 다니는 거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의 승리 아닙니까? 손자병법에도 나옵니다만.”
“그러니까··· 츠지와 와타베가 이걸 보고 꼬리를 내렸다는 거야?”
“츠지 준페이는 그랬죠. 와타베는 손을 좀 봐줘야 했지만.”
“야마다! 아시카가! 쿠사나기! 그 녀석들은?”
“오늘 집에 초대한 사람들이 꽤 많군요? 외로움을 타시나 봐요?”
“전부 다 죽이거나 겁을 줬다는 거냐?”
“뭐, 그 이상도 있습니다.”
“그 이상···이라니?”
“썩은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또 문제가 생기겠죠.”
“무슨 소리냐!”
“일본 협회는 앞으로 쿠사나기 씨가 이끌게 될 겁니다.”
“쿠사나기가? 그년은 너와 무슨 관계냐?”
“쿠사나기 씨가 직접 자기 입으로 말했습니다. 하시바를 따르는 것은, 그의 강력한 힘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하시바 따위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보여줬죠.”
“그 말은··· 쿠사나기가 네 졸개가 됐다는 거냐?”
“동료라고 해두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업자 관계라고나 할까요. 계약에 기반한 것이기는 해도, 쌍방에 신뢰가 있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시··· 신뢰?”
“쿠사나기 씨의 원칙이랄까··· 그녀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제가 기여를 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자발적으로 저와 뜻을 함께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신뢰 관계 아닙니까?”
“막돼먹은 년이 나라를 팔아먹는구나··· 내가 그년을 가만둘 것 같으냐?”
“그건 구라모토 씨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렇게 말하며, 이준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들짝 놀라면서 구라모토도 황망히 일어섰다.
이준기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그에게 말했다.
“거실로 나갈까요? 손님이 있습니다.”
“여긴 내 집이다. 무슨 수작이냐?”
“이 집, 나 혼자서도 들어오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만, 오늘은 더 쉽게 들어왔죠. 쿠사나기 씨 덕분에.”
그렇게 말하고 다실 문을 열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쿠사나기가 일어나며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 이준기 님. 구라모토 님.”
구라모토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쿠사나기··· 이 매국노! 옆의 저 자식은 또 뭐야? 너도 매국노냐?”
쿠사나기 옆에 앉아 있다가 함께 일어난 남자, 츠지 준페이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구라모토 님! 저는 오늘 결투에 증인으로 입회하라고 해서··· 그래서 온 겁니다! 아니, 끌려온 거죠.”
이준기가 츠지에게 말했다.
“츠지 씨, 자신감을 좀 가지세요. 제가 언제 츠지 씨를 끌고 왔습니까? 직접 두 다리로 오신 거 아녜요? 그게 츠지 씨와 와타베 씨의 차이점이었죠.”
츠지가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이준기 님.”
구라모토가 츠지를 노려보며 분노에 일그러진 말투로 소리쳤다.
“이준기 님? 어디에다 극존칭을 갖다 붙이는 거냐! 이 썩어빠진 놈아! 돼지 같은 새끼!”
이준기는 손을 들어 보이며 구라모토의 욕설을 중단시켰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구라모토를 내려다보며 그는 말했다.
“예상대롭니다. 구라모토 당신은 와타베와 같은 과예요. 어떻게 보면 칭찬이죠. 그러나 용기와 만용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반신불수가 된 와타베의 용기를 칭찬해야 할까요? 그것보다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포기한 츠지 씨가 더 나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구라모토가 이준기를 향해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일본의 정상 국가화라고나 할까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정신 나간 정상 국가 말고, 다른 나라들처럼 제정신인 나라. 태평양 전쟁에서 지고도 아직까지 가슴에 품고 있는 제국주의를 버린 나라. 그걸 바랍니다.”
“미친놈!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원하는 걸 말하란 말이다. 내가 그걸 주겠다. 난 그럴 힘이 있어. 이런 집을 원하나? 돈? 권력? 여자?”
“이런, 이런··· 알라딘의 마술램프입니까? 당신이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고요?”
이 상황에 장난기가 발동하려는 자기 자신을 보고, 이준기는 조금 놀랐다.
알라딘의 마술램프가 있다면, 조슈아를 없애 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아니, 조슈아가 없더라도 누군가가 나타나 히틀러 같은 주장을 할 것이다.
그보다는, 차원문을 모두 없애버리고 구원자들의 능력도 모두 봉인하는 편이 나으리라.
잠시 딴생각을 하는 이준기를 향해 구라모토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준기! 듣고 있나? 난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난 일본 정부라도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 그건 그걸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겠죠. 구라모토 당신은 아닙니다.”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거냐?”
“저도 평화로운 해결책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구라모토 당신이 제안한다면 평화로운 해결책은 기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내··· 내가 지금까지 이뤄왔던 이 모든 걸··· 네놈이 무너뜨리겠다고? 그··· 그것만은 제발···”
“뭐죠? 상황 파악이 된 겁니까?”
“나··· 나는 아마 너를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저를 저승길 동무로 삼고 싶은 모양이군요. 지금까지 그랬던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구라모토는 어느새 품속에서 꺼낸 작은 기계를 들고 위협했다.
“자폭 버튼이다. 내가 대비책을 겨우 하나만 가지고 있을 줄 알았나? 와타베나 츠지 놈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걸 대비해서, 이 집에 거대한 폭탄을 설치했다.”
이준기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담아, 구라모토를 향해 말했다.
“내가 말했죠. 당신은 욕심이 가득한 인간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겨우 나를 죽이겠다고 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그렇게 생각하나?”
“그건, 뻥카입니까?”
“이상덕도 가지고 있던 ‘사자의 서’. 그런 아이템을 나라고 가지고 있지 않을 것 같은가?”
“그래서, 업그레이드 버전 ‘사자의 서’라도 갖고 있다는 겁니까?”
“으흐흐흐. 말귀를 좀 알아듣는군. 폭탄이 터지면, 죽는 건 너와 이 한심한 놈들뿐이야. 난 다시 살아난다.”
“그 아이템 이름이 뭡니까?”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말하겠냐!”
이준기는 빙긋이 웃었다.
“보이지 않아서 그럽니다.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그 아이템 이름이 설마 ‘고급 식량 패키지’는 아닐 것 아닙니까? 그건 당신이 그동안 쓰던 무기, ‘쿠사나기의 검’도, 한상태와 하시바에게서 빼앗은 ‘레드 클라우드(Red Cloud)’도 아니잖아요?”
“내··· 내 인벤토리가 보인다는 거냐? 거··· 거짓말 마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충고하죠. 백번 양보해서 당신이 쥐고 있는 그게 자폭 버튼이라고 칩시다. 과연 당신이 그걸 누를 수 있을까요?”
“뭐라고?”
쿠사나기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구라모토 님, 당신은 그걸 누르지 못할 겁니다. 하시바도 이상덕도 자기 몸을 자기 뜻대로 가누지 못했어요. 이준기 님의 텔레키네시스라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무··· 무슨 소리냐! 거짓말 마라!”
이준기가 말을 받았다.
“쿠사나기 씨 말이 맞아요.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마십시오. 오늘은 스킬도 별로 쓰지 않아서 스킬 책이 남아돌거든요. 여기가 몇 층이죠? 롯폰기 하늘이라도 날아다니게 해드릴까요?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오겠군요.”
구라모토가 울부짖었다.
“거··· 거짓말 마라! 내··· 내가!”
이준기가 말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요?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하는 것과, 버튼은 그냥 누르게 하고 폭탄이 터지지 못하게 막는 것과.”
“건방 떨지 마라! 네가 신이라도 된다는 거냐!”
“하긴, 그것도 폭탄이 있다는 가정 하에나 성립하는 얘기군요. 당신이 그냥 지어낸 거짓말일지도 모르니까.”
“주··· 죽어라!”
구라모토는 두 손을 포개 들고 있던 장치의 버튼을 꾹 눌렀다.
*****
“그럼, 쿠사나기 씨. 뒷일을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준기 님.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감사하죠. 일본에 쿠사나기 씨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이제야 제 자신을 찾은 기분이에요. 자신감을 가지고 제 행동을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원래부터 쿠사나기 씨가 가지고 있던 겁니다.”
“그렇게 얘기하실 것 같았어요. 그래도 감사해요.”
둘은 공항에 있었다.
5시에 미국 샌디에이고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이준기.
쿠사나기는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
앞으로 일본 협회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는 미리 얘기해 두었다.
쿠사나기가 굳이 협회장이 될 필요는 없다.
막후에서 힘을 쓰면 되는 일이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협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저는 믿어요. 일본 구원자들의 대부분은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차원문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소리 큰 몇몇 사람들이 전체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쿠사나기 씨가 잘 살펴봐 주세요.”
“쿠로사와도 후지와라도 있는걸요. 열심히 잘할게요. 이준기 님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가야겠습니다. 일등석을 끊어주신 것은 고맙지만, 저는 그냥 평소대로 하겠습니다. 일반석이 편해요.”
“편하다니··· 그건 거짓말이죠.”
“마음이 편한 걸로 해두죠. 밤 비행기니까요, 한숨 푹 자고 나면 미국이겠죠.”
“다시 뵐 때는, 완전히 달라진 일본 협회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잇쇼켄메이(一所懸命)··· 노력하겠습니다.”
“너무 부담 주지 마세요.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면, 쿠사나기 씨가 책임질 일은 없어요. 그래도,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네, 감사해요. 이준기 님.”
“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쿠로사와가 그렇게 부르게 놔두는 건, 그 사람이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고, 저는 원래 부담스러운 거 싫어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이준기 씨.”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 이준기는 검색대 줄로 걸어 들어갔다.
공항의 대형 스크린에는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폭발물이 공중에서 터지는 모습, 그리고 사람이 공중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반복하여 재생되었다.
“뉴스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2시 45분경, 도쿄 롯폰기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정체불명의 폭발물이 롯폰기 상공 높은 곳에서 폭발했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전혀 없었습니다만, 우연의 일치인지 폭발 직후에 구라모토 신스케 일본 구원자 협회장이 롯폰기 펜트하우스 자택에서 추락했습니다. 구라모토 회장은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구원자 활동은 어렵게 됐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오늘 오후 2시 45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