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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5)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5)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구원자들, 그리고 한일 연합군의 러시아 침략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있었지만, 세계 대전 양상은 이준기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게 전개되었다.
특히 신대륙에서 그랬다.
미국 내전이 남북아메리카 전역으로 확대되는 양상이 똑같이 재연되었다.
내전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밀리던 동부 연합은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미 12월 말부터 멕시코 갱들의 미국 내전 개입 소문이 퍼졌다.
동부 연합의 대변인, 드레 럭러스터(Dre Lcukluster)는 처음부터 이 소문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우릴 뭘로 보는 겁니까? 우리가 정말 밀리고 있다 하더라도, 외국놈들에게 손 벌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밀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당장 내일부터 크게 되받아쳐 줄 테니까 잘 보세요.”
그러나 그 ‘내일’은 오지 않았다.
게릴라전의 특성상, 가끔 달성하는 승리도 국지적이고 한시적이었다.
그렇게 국지적이고 한시적인 범위에서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전쟁을 끝내야 하는 것이 게릴라의 숙명이건만, 동부 연합에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게릴라전으로 전략을 바꾸고 공식 기자회견이 어려워지자, 드레 럭러스터는 유튜브를 통해 발언을 쏟아냈다.
“외세 개입? 그건 저 가증스러운 서부 전선 놈들이죠. 전쟁 초기부터 캐나다를 끌어들였잖아요? 캐넉스(Canucks)가 자원봉사 하러 미국에 왔답니까? 서부 전선 수뇌부가 전쟁 참가 대가로 막대한 보상을 제안했다는 증거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워싱턴, 노스 다코타를 포함해서 캐나다 국경에 접한 6개 주를 넘기기로 했다는 겁니다! 서부 전선은 미국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1월 초에 올린 이 영상은 폭풍이 몰아치듯 클릭 수를 쌓아갔다.
증거를 보이라는 댓글이 빗발치고, 지상파 뉴스도 이 영상을 비중 있게 다루자, 드레는 후속 영상을 공개했다.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던 증거, 오늘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문서를 보십시오. 여기 서명이 보이십니까? 카메라에 가까이 가져다 댈 테니 잘 보세요. 로스 캐넌. 서부 전선 우두머리의 서명이 분명히 보이는군요. 그 밑에 P.S. 라고 간단하게 서명한 것이 캐넉스 길드의 길마이자 지금 우리 미국 땅을 침략 중인 마녀, 프리실라 세딘티입니다. 지금 미국은 침략을 당하고 있어요! 사이 좋은 이웃이라고 생각하던 캐나다에 말입니다! 동부 연합을 지지하는 것이 미국을 구하는 길입니다!”
드레 럭러스터가 내민 문서에는 과연 로스 캐넌과 프리실라 세딘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문서도 서명도 위조하기 쉽다.
여론은 드레가 원하는 방향의 정반대로 움직였다.
데이트 폭력과 강간 전과가 있는 드레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정서가 주를 이루었다.
샌터바바라에서 길거리 총격전으로 시작된 미국 내전은 이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고 있었다.
차원문을 뺏고 뺏기는 싸움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게릴라전의 양상이다.
민간인들에 대한 컬래트럴 대미지는 양과 질 모두에서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구원자들끼리의 싸움을 외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결국 편 가르기에 나섰다.
“드레 럭러스터 대 프리실라 세딘티가 말이 되냐? 외모만 봐도 악마 대 천사다!”
“하긴, 동부 연합 대변인으로 왜 그렇게 인상 나쁜 사람을 내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니까. 보통 사람들 여론은 상관없다 이건가?”
“그나저나 조슈아 테일러는 왜 서부 전선 소속으로 나오지 않는 거지? 나온다면 지금도 높은 서부 전선 인기가 하늘을 찌를 텐데?”
“조슈아 테일러는 캘리포니아 소재 길드 101 소속이잖아. 굳이 서부 전선 쪽에서 싸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조슈아가 서부 전선 소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서부 전선의 우위로 굳어진 전황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캘리포니아 등 서부 쪽에 사는 사람들은 괜한 기대감에 휩싸였고, 뉴욕, 보스턴 등 동부에 사는 사람들은 이대로 전쟁이 끝나고 뭔가 불이익을 보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서부 전선이 이기는 걸로 내전이 마무리돼도 괜찮을까? 뉴요커로서, 나는 왠지 불안한데.”
“동부, 서부는 자기들이 붙인 이름이잖아. 어느 쪽이 이기든, 우리들 사는 데 뭐가 바뀌겠어?”
“그래도··· 뭔가 불이익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위세가 대단한 구원자들인데,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면 무슨 일을 벌일지 어떻게 알아? 미국 정부는 구원자들을 막을 힘도 없잖아?”
“자기가 아직도 장사치인 줄 아는 대통령한테 뭘 바라냐. 구원자들이 양심이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그래도, 프리실라 세딘티가 나쁜 짓을 하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서부 전선 수장은 로스 캐넌이야. 프리실라 세딘티가 아니라고. 로스 캐넌이 인상이 좋아 보이냐?”
“로스 캐넌이 뭐 어때서? 그냥 중립적인 인상 아냐?”
프리실라 세딘티는 헬렌 카자크, 린핑 루와 경쟁을 벌이는 구원자 계의 아이돌이다.
로스 캐넌은 스타트업을 운영한 적이 있다는 사업가로, 외모는 케빈 스페이시와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존 백스터는 요즘 뭐하지? 예전에 비해 꽤 조용해진 것 같아서.”
“존 백스터는 왜? 예전에도 그냥 혼자만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이잖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데도 언제나 자기 주장만 했지.”
“남부 연합(Confederation)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했지. 그런데 의외로 남부 지방에는 그런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군.”
“하긴, 애틀랜타에서 유학 중인 친척이 있는데, 거기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런 주장을 많이들 한다고 하더라고.”
“남부 연합에 가담했던 주들의 깃발만 모아 놓은 공원도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존 백스터가 요즘 뭐 하는지 궁금한 거군?”
“그렇지. 굳이 따지자면 애틀랜타도 동쪽에 있으니 동부 연합에 들어간 것 같은데, 존 백스터는 정확히 말해서 동부가 아니지. 강성 레드넥이라고.”
“레드넥은 좀 심한 표현이군. 존 백스터도 교육자 출신인데 그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겠지.”
“만나보지 않고 어떻게 판단을 하겠어. 하긴, 만나봐도 속마음을 어떻게 아나.”
“그건 그렇고, 내전이 안 끝나는 것도 불안하지만 내전이 끝나도 그것대로 또 불안할 것 같아.”
“원래 내가 하려던 얘기가 바로 그거라고.”
그렇게 미국인들의 일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총기 사고가 종종 터지던 일상이었다.
구원자라는 새로운 존재들이 벌이는 총기 사고라고 생각하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내전은 더 큰 전쟁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전쟁은 또 다른,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을 불러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
3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
도쿄 롯폰기, 구라모토 자택.
토요일에 자기 집까지 찾아온 이준기를 보고도 구라모토는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벌써 나타나다니. 이준기 상은 휴일도 없군요?”
“일정이 좀 밀렸습니다. 이제 곧 미국으로 가봐야 해서요. 서두르는 중입니다.”
“앉으시죠. 차라도 좀 내올까요?”
“차 좋죠. 비행기에서 아침에 마셨던 구정물 커피 때문에 속이 안 좋던 참인데.”
“듣자 하니 이준기 상은 단 것도 아주 좋아하신다던데. 양갱이라도 좀 내올까요?”
“하하하. 이렇게 얻어먹어도 되는 건지, 좀 불안하군요.”
“우리가 결판을 봐야 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야기를 좀 하죠. 저도 점심 먹고 차는 아직이라서요, 차는 좀 마셔야겠습니다.”
“좋습니다.”
구라모토는 이준기를 다다미방으로 안내했다.
롯폰기의 거대 주상복합 최상층 펜트하우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집 거실에는 시시오도시를 포함한 일본식 정원도 꾸려져 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다실 정도는 기본이었다.
수많은 암살 위협에 노출되었던 이준기다.
웬만한 독은 쉽게 알아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는 몰라도, 구라모토는 차에 독을 섞지는 않았다.
차를 조금 들이켜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준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3차 원정대 멤버들을 돌려보낸 게 그저께 밤이니까, 어제쯤에는 보고를 받았겠죠?”
“차는 어떠십니까? 향이 참 좋습니다만.”
“좋은 차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보고는 받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사이토 카이를 회 떠버리셨다고.”
“사이토가 공항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해서, 급하게 처리하느라 그랬습니다. 원래 제 스타일은 아니죠. 지금 저를 보면 아시겠지만.”
“하하하. 꽤 직설적이시군요. 그러니까, 지금 저를 죽이러 오셨다는 거군요. 이렇게 이야기부터 하고 죽이는 게 이준기 상 스타일이다, 그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보는 중요하니까요.”
“정보는 중요하죠.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준기 상이 저에게 더 캐낼 정보가 있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정보는 이미 있는 대로 캐내신 것 아닙니까?”
“제가 신도 아니고, 구라모토 회장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하하. 제가 하려던 일들··· 전부 다 뭉개버리셨으면 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고 밖에는··· 생각하기 어렵죠. 믿기 힘든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런 일들이 저에게 계속 일어났죠. 갑자기··· 작년 여름부터던가.”
“이상덕과는 그 전부터 알고 지내셨겠죠?”
“이웃 나라 구원자 협회장입니다. 알고 지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이름이 마츠야마 아키히로라고 하던 사람입니다. 단순히 이웃 나라 구원자가 아니죠.”
“하하하!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쿠사나기 씨가 말하지 않던가요? 이상덕을··· 마츠야마를 죽인 게 접니다.”
“마츠야마 그놈은 참 여러 가지를 지껄이고 죽었군요. 쓸모도 없는 녀석이 말은 많아 가지고.”
“구라모토 씨에게 묻고 싶은 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결국 단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말씀해 보시죠. 무슨 질문인지도 모르고 대답하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으니.”
“이 모든 일을 왜 꾸미신 겁니까?”
“이 모든 일···이라면?”
“한국 침략, 그게 안 되니 러시아 침략. 끝없는 침략과 제국주의 말입니다.”
구라모토는 입가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일기일회. 이준기 상은 일본 문화에 꽤 정통하시니 알고 계시겠죠?”
“저도 좋아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하자는, 아주 좋은 말이죠.”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만남조차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차를 내놓은 겁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볼까요?”
“하시죠.”
“욕심이 끝이 없는 구라모토 씨가 저에게 이런 좋은 차를 내놓은 이유는, 나중에 만회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겠죠. 아닙니까?”
“아하, 그게 이준기 상이 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군요.”
“회수가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은 발톱 때라도 남에게 주려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게 제 결론이에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전 회수가 가능한 투자만 하죠.”
“그게 원칙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죠?”
“으흐흐흐. 정말 속을 잘 긁습니다, 이준기 상은. 부아를 돋우는 데 재능이 있군요.”
“회수가 가능했던 투자에 대해 묻는 겁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예를 들자면, 이상덕은 어떻습니까? 투자 결과가 어땠나요? 조선 총독 이상덕에 대한 투자도, 자객 마츠야마에 대한 투자도 말씀해 보시죠.”
“둘 다, 완전히 망했죠. 분수도 모르는 어떤 조센징 때문에.”
“그 조선인에게 내놓은 이 비싼 차에 대해서는, 어떻게 비용을 회수할 생각입니까?”
이번에는 확실히 한 모금을 삼키고 나서, 그리고 눈을 감고 살짝 음미까지 하고 나서 구라모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눈을 뜨며 그는 이준기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보채지 않아도 끝은 오는 법입니다.”
“기다려도, 와타베 하야토는 오지 않습니다. 아니, 못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