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3)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3)
피투성이가 되어, 랭보는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나리··· 뭐든지···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무릎과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가운데, 랭보는 이준기의 텔레키네시스에 들려 공중에 떠 있었다.
그 다리로 서 있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관람 중인 병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준기는 랭보의 발을 바닥으로부터 10센티미터 정도 들어 올린 채 그를 염력으로 붙잡고 있었다.
“질문에 대답한다.”
“네! 뭐든지 여쭈십시오!”
“본명은?”
“테··· 테드 블랙(Ted Black)입니다.”
“국적.”
“영국인입니다. 리버풀 출신이고요.”
이준기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은 짧게 잘려져 있고, 곱슬이 꽤 심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도해 보이던 회색 눈은, 사색이 되어 목숨을 구걸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리 빈말을 잔뜩 모아도, 잘생긴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
“랭보? 보들레르도 아니고 랭보라고?”
“죄··· 죄송합니다.”
“여기엔 왜 왔지?”
“죄··· 죄송합니다.”
“대답해라.”
“여··· 여학생들 강간하려고···”
“아니, 러시아에 왜 왔냔 말이다.”
“러··· 러시아 민중을 해방··· 끄아아악!”
랭보의 오른쪽 다리가 행주를 짜는 것처럼 비틀렸다.
꽤 크게 우두둑 소리가 났지만, 푸줏간의 돼지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랭보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좌절과 공포에 휩싸인 비명은 건물 바깥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랭보는 어떻게든 말을 짜냈다.
비명을 질러대는 것만으로는 사태가 수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 살려··· 끄아아악! 자··· 잘못했습니다! 사, 사실은··· 야··· 약탈하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요!”
랭보의 다리에서 주름이 펴졌다.
비명이 잦아들면서, 색색거리는 가쁜 숨소리와 함께 울먹이는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랭보는 너무 늦을까 싶어 서둘러 이준기에게 감사를 표했다.
“가··· 감사합니다...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하다는 그의 말은 더없이 진실하게 들렸다.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감사의 마음을, 그는 어떻게든 이준기에게 전하고 싶었다.
거의 스톡홀름 증후군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이준기는 물었다.
“영국에서는 뭐 하던 놈이야?”
“길드에서··· 부길마 했습니다··· 뉴클리어 사일로(Nuclear Silo)라는 이름의 길드입니다.”
“43레벨이면 엄청 높은 레벨인데, 약탈이 하고 싶어 여길 왔다고?”
“사··· 사람··· 구원자 죽이면 경험치가 많이 들어오잖아요. 나리도 아시겠지만···”
테드 블랙이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
이 정도의 녀석이라면, 세계 대전에서 사망하는 99%에 들었을 테니 당연하다.
겨우 그 정도의 녀석이지만, 구원자 살해의 이득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걸 실천하러 외국에 원정까지 온 것이다.
해운대 차원문에서 장혁수를 죽이고 겨우 반년이 지났다.
구원자 살해가 최고의 경험치 소스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 기세는 더욱 가속되기만 할 것이다.
차원문과 구원자라는 게임을 내놓은 설계자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던전 마스터’는 왜 인간을 그토록 증오하는 거지?
인류의 일원인 조슈아 테일러는 왜 동족의 반대편에 서게 된 것일까?
랭보, 아니 테드 블랙과 같은 자들이 보여주는 추악한 인간 본성 때문일까?
머릿속을 자꾸 비집고 들어서려는 그런 생각들을 떨치고, 이준기는 심문 중인 적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울먹이는 돼지의 모습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죽이고 싶지만, 이놈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보일까 두려웠다.
아니, 그것보다는 지금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준기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하지만 제일 중요한 질문이다. 잘 대답해.”
“네, 물론입니다, 나리! 절대로,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령관 바이런은 어디 있지?”
“그··· 그건···”
“모른다고? 정말?”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사령관이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거기 있을 거예요. 틀림없습니다!”
“말해.”
“크렘린··· 거기가 확실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그렇게 뉴스가 났으니, 이제 유럽연합군은 해체되고, 귀국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일 하고 싶었던 걸 해야죠! 그래서 전 여기에 온 것이고···”
“바이런은?”
“크렘린에 가면, 보석 전시관이 있어요. 거기, 왕의 홀(笏)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여러 번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준기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랭보는 내팽개져친 것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랭보의 새된 비명이 열린 식당 문을 통해 복도에 메아리쳤다.
*****
“바실리사,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어?”
크렘린으로 향하는 중에, 세르게이가 물었다.
이준기는 차 안에서 창밖을 쳐다보는 채로 대답했다.
“이런 꼴, 보여주고 싶지 않아.”
세르게이는 수긍했다.
오늘 본 것처럼 무서운 눈을 한 이준기를 그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 바실리사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모습까지 함께하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온 것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동료다.
“그럼, 바실리사에게는 비행기가 연착 중이라고 메시지를 보내둘게.”
“그래, 세르게이. 고마워.”
크렘린에 도착하자 4시 55분이었다.
직원은 그들을 막아섰다.
“5시에 폐관합니다. 5분 남았어요. 입장 안 됩니다.”
“지금 안에 있는 사람들은요?”
“5분 내에 나와야죠.”
이준기가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내가?”
“난, 별로 러시아 사람으로 보이지 않잖아?”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둘의 대화를 듣다못해, 크렘린 직원이 물었다.
“뭘 사실대로 말한다는 겁니까?”
“유럽연합군··· 아시죠?”
직원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는 경악의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뭐··· 뭐요! 당신들이 그거라는 겁니까?”
“무··· 무슨 말입니까!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국경 바깥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는··· 아니 그건 아니군··· 최근에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다녀왔으니까··· 어쨌든, 100% 러시아인이란 말입니다!”
“그럼, 유럽연합군이 왜요? 그 망할 놈들이?”
“유럽연합군 사령관이 지금 이 안에 있단 말입니다!”
“뭐··· 뭐라고요!”
“황제의 홀? 아무튼,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막대기를 훔치려고 들어갔어요.”
“오··· 오를로프(Orlov) 말입니까?”
*****
“바··· 방문이 열리지 않아요!”
여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손잡이는 돌아가는 것 같은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아요!”
이준기가 물었다.
“이 문 건너편에 오를로프가 있다는 말이죠?”
“네!”
“이 문을 부숴도 되겠습니까?”
“네?”
“이 문도 중요한 문화재이겠지만, 오를로프의 다이아몬드가 더 중요한 거겠죠?”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안에 도둑이 없다면, 곤란해지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거예요.”
“그것까지는 저희도 몰라요. 유럽연합군 부사령관에게서 들은 얘기지만, 그놈도 100%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바이런 그놈이 오를로프를 ‘기념품’으로 챙겨가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이렇게 큰 위험이라면 일단 대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댓값 몰라요?”
“몰라요! 그게 뭐예요!”
“만에 하나 다이아몬드가 없어지면 이깟 문이 문제겠냐는 말입니다!”
“마··· 맞아요! 문을 부숴요! 사람들을 좀 불러올까요?”
“아뇨.”
이준기의 대답과 동시에 세르게이가 문에 어깨를 부딪쳤다.
경첩이 떨어져 나가면서, 문이 패대기쳐졌다.
오를로프의 전시실에는 장발의 사나이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진열된 두꺼운 유리 벽 앞에, 장발의 사나이가 서 있었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가 말했다.
“그냥 빨리 가지고 나갈 걸 그랬군. 유리를 깨다가 다이아몬드가 다칠까 봐 조금 천천히 하려고 했더니···”
“랭보가 맞았군. 정말로 도둑질을 하고 있었어. 문을 괜히 부순 게 아니어서 다행이야.”
“랭보? 그놈이 내가 여기 있다고 말했다고?”
“바이런!”
“그래, 그게 나다. 지난 열흘간 모스크바를 벌벌 떨게 한 공포의 마왕, 그게 나다.”
여직원이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겨··· 경찰이라도 데려올까요?”
“아뇨. 금방 끝납니다.”
이준기의 대답을 듣고, 바이런이 크게 웃어젖혔다.
“금방 끝나? 으하하하! 과연 그렇지. 누가 끝내냐의 문제겠지만.”
“통성명이나 해볼까?”
“나폴레옹 이 새끼를 혼내주고 싶었는데, 우선 마피아 애송이부터 손보게 생겼구나. 네놈은 모스크바 마피아의 똘마니냐?”
“나도 너처럼 가명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실을 말해야겠지. 너도 본명을 말할 테니까 말이다.”
바이런이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이다. 난 곧 죽을 놈한테는 관대하니까 말이다.”
“그래? 그 점은 나와 비슷하구나.”
“재미있는 놈이군. 그래서, 네놈의 이름은 뭐냐?”
“난 이준기라고 한다.”
“이준기? 한국인인가? 귀에 익은 이름인데?”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후후. 대장은 꽤 유명한 것 같단 말야. 왜 난 몰랐지?”
바이런이 대꾸했다.
“대장? 넌 뭐냐?”
“난, 세르게이 로스코비츠라고 한다. 푸가초프 멤버지.”
“푸가초프? 그딴 조직이 정말 존재했었단 말이냐? 지금까지 모스크바를 유린하는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극동에서 일본놈들을 막느라 좀 늦었다.”
“그래, 그래서? 한국에서 온 이준기, 그리고 푸가초프라고 주장하는 세르게이?”
이준기가 말을 받았다.
“통성명이 약속이었지. 이제 네 본명을 말해라.”
“이준기··· 왜 귀에 익지?”
“빙빙 돌리지 말고, 이름을 말해!”
“그래, 그러지. 나도 빨리 일 끝내고 집에 가야 하니. 아 참, 그렇지. 집에 가기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야지. 나폴레옹 그 새끼를 찢어 죽이고 집에 돌아가야 맘이 편할 테니까.”
“거참 말 많은 놈이군.”
“내가 말이 긴 걸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일 텐데? 내 수다 덕분에 네놈 명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거니까 말이다.”
“닥치고, 이름을 말해라. 다리가 박살이 난 다음에 말하고 싶은 거냐?”
바이런이 웃어젖히자, 전시실에 메아리가 쳤다.
“우하하하! 자신감이 마음에 든다. 좋다, 말해주지. 내 이름은 장-바티스트 콩트와(Jean-Baptiste Comtois)다. 좀 길지?”
“장-바티스트 콩트와··· 프랑스인이냐?”
“한국놈이라더니 아주 무식하지는 않군. 프랑스 이름이 맞다. 하지만 난 스위스인이다. 루체른 출신이지.”
“러시아에는 왜 온 거냐?”
“왜긴 왜야. 사람들 좀 죽이고, 여자들과 좀 즐겨볼까 해서지. 스위스는 동네가 너무 좁아. 유럽으로 넓혀도 마찬가지지. 너무 법대로 하는 유럽, 짜증 난다고. 그에 비해 여기는 얼마나 좋아? 구원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곳이지.”
“스위스는 유럽연합도 아니잖아? 왜 유럽연합군이지?”
“그 이름을 내가 붙였나? 정식 명칭은 러시아 해방군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네 부하들을 여럿 만났지. 전부 유럽연합군이라는 명칭을 쓰던데? 범죄 주체를 오도하려는 거냐?”
“오도? 으하하하! 재미있는 놈이군. 내 코드명이 바이런이다. 시인 바이런 경. 영국인이잖아. 그러니까 유럽연합···”
“탈퇴했잖아.”
“제길, 그렇군. 뭐, 그래도··· 유럽연합이 꼭 EU를 뜻하라는 법도 없잖아? 일반 명사라고 생각하라고. 유럽 여기저기에서 온 떨거지들이니까 유럽연합군이지.”
“총사령관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어디에 있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알아도 네놈에게 발설하지는 않겠지만.”
“제1군 사령관 나폴레옹을 혼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폴레옹도 총사령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을 텐데.”
“나폴레옹이고 총사령관이고··· 본국에서 할 일이 없다 보니 여기까지 와서 노략질이나 하는 떨거지들일 뿐이다. 나중에 천천히, 하나씩 찾아 죽이면 그만이야.”
“그 떨거지들 중에서도 잔학무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이런. 아니, 장-바티스트 콩트와.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어디 누가 죗값을 치르는지 한번 보자. 덤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