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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2)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2)
죽지 않을 정도로만 피투성이가 되어서, 넷은 이준기와 세르게이 앞에 앉혀졌다.
무릎을 꿇려야 하겠지만, 무릎을 박살 내 놓은 상태다.
“지금처럼 악행을 하러 뛰어다닐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 내가 약속하지.”
“사··· 살려주십쇼.”
선글라스가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너희들이 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증언하는 것, 그것뿐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다. 고통을 더 당하고 싶지 않다면.”
“뭐···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너희들의 대장, 소위 바이런이라고 하는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선글라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사령관이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상관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그동안 기자들을 잡아 죽였어요. 그런데도 오늘 뉴스가 나자, 사령관은 화를 내면서 다들 꺼지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는 사령관을 보지 못했어요.”
“뉴스가 났는데도 너희들은 이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었단 말이지?”
이준기의 눈에 이글거리는 증오를 보고, 선글라스는 흠칫하며 기대고 있는 벽 쪽으로 몸을 밀었다.
그러나, 후퇴할 곳은 없다.
“부사령관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은 마음껏 약탈하는 날이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즐거운 날도 이제 끝날지 모르니까, 원 없이 즐기라고.”
“부사령관 이름은 뭐야? 어디에 있지?”
“부사령관도 코드명밖에 몰라요. 래··· 랭보라고 합니다.”
“시인들 이름에 먹칠을 하려고 작정을 했군. 그래서, 랭보는 지금 어디에 있어?”
“래··· 랭보는···”
선글라스가 말끝을 흐리자, 덩치가 끼어들어 문장을 마쳤다.
“모··· 모스크바 대학교로 갔습니다!”
“모스크바 대학교?”
“거··· 거기에서 학생들을···”
“뭐라고?”
“모스크바 대학교는 아직 휴교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부하들 수십 명이 신이 나서 함께 갔습니다. 거기에 가면 나쁜 놈들을 잔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쁜 놈이라는 단어가 네놈 입에서 나오니 기분이 더러워지려고 한다. 하지만, 참아주겠다. 지금 말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말이지.”
덩치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사··· 사실입니다. 아니라면 절 죽이셔도 좋아요.”
“그래, 알았다. 바로 여기에서 기다려라.”
이준기는 발리송을 집어 든 오른손을 어깨 위로 올렸다.
“히이익! 왜 그러세요! 다 말씀드렸잖아요! 살려주세요!”
덩치의 애원에 대꾸하지 않고, 이준기는 발리송을 그의 허벅지에 찔렀다.
칼날을 빼자, 허벅지의 상처에서 꿀럭꿀럭 찐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대퇴동맥이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덩치가 돼지처럼 끼익거리며 울먹였다.
“주··· 죽이지 않겠다고 야··· 약속하셨잖습니까?”
“죽지 않아. 39레벨이나 된 네놈이 이 정도로 죽으려면 여기서 3박 4일은 보내야 할 거다.”
“주··· 죽으면 어떡하죠?”
“대퇴부 동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이렇게 끈적거리다니. 넌 몇 살인데 벌써 고지혈증이냐? 이렇게 점성이 높아서야 피가 많이 나오지도 못할 거다. 넌 3박 4일이 아니라 6박 7일은 보내야 죽을 걸.”
“사··· 살려주세요.”
“네놈들 사령관과 부사령관을 단죄한 다음에 돌아온다. 그때 경찰병원으로 보내주지.”
“저··· 정말이죠?”
“지금 죽고 싶다는 얘기냐?”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너다!”
자신을 향해 칼을 치켜드는 이준기를 보고 선글라스도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사··· 살려주세요!”
*****
여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둘은 모스크바 대학교로 향했다.
놈들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교정 안에 들어서자마자 범죄 현장이 시야에 가득 찼다.
잔디밭, 보도블록, 벤치··· 모든 곳에서 강간과 살육이 진행 중이었다.
침략자에 맞서다가 죽은 것이 분명한 경찰관의 시체 옆에서 세르게이는 진압봉을 집어 들었다.
이준기는 발리송, 세르게이는 경찰 진압봉으로 무장하고 달려 나갔다.
둘은 닥치는 대로 가해자들을 때려눕혔다.
“끄아!”
“아아악!”
“뭐··· 뭐냐! 너희들은!”
눈앞에 보이는 가해자들을 전부 제압한 다음, 이준기는 맨 나중에 쓰러뜨린 악당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랭보! 너희들의 두목! 어디 있어!”
“퉷!”
이준기를 향해 상대방은 침을 뱉었다.
뺨에서 침을 닦아내며, 이준기는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딱 한 번만 다시 묻겠다. 랭보, 어디 있어?”
“더러운 마피아 놈··· 내가 말할 것 같으냐?”
“그따위 놈을 감싸는 거냐?”
“으하하하! 오늘 스무 명을 강간했다! 랭보 부사령관 덕분에 말야!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섹스를! 농락하고 전부 죽였어! 황제가 된 느낌이다! 랭보는 내 은인이다! 내가 불 것 같은가?”
이준기의 눈이 증오로 불타올랐다.
치켜 올라간 그의 손이 상대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증오로 정신이 불타오르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정확했다.
칼날을 뉘여 심장을 찌른 그의 손은 직각으로 칼날을 비틀며 빠져나왔다.
갈비뼈가 칼날에 걸려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비명은 없었다.
즉사였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의 범죄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시체가 되었다.
아직 대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검은 곱슬머리의 청년, 아니 짐승이다.
이준기는 길게 숨을 내쉬고 침을 삼켰다.
피가 튀었는지,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대··· 대장! 알아냈어! 랭보는 여학생 기숙사에 있어!”
“그래, 가자.”
“대장! 입술에 피가···”
“그래?”
이준기는 입술을 왼손 손등으로 훔쳤다.
선명한 붉은 피가 묻어났다.
“입술을 깨문 거야? 피가 줄줄 흐르잖아!”
이준기는 손등에 묻은 선홍색의 피를 쳐다보았다.
다시 전방을 보고 걷기 시작하면서, 그는 던지듯 말했다.
“괜찮아.”
*****
여자들을 끌고 다니는 약탈자들을 쓰러뜨리면서, 이준기와 세르게이는 기숙사로 진입했다.
비명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방향으로 그들은 서둘러 갔다.
아마도 식당이었던 커다란 방안에서부터 여자들의 비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문은 열려 있었다.
둘은 지체 없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랭보가 어떤 놈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한가운데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그는 부하들의 범죄 행각을 감상하고 있었다.
잡혀 와서 한쪽 구석에 모여 앉은 여자들이 하나씩 그의 앞으로 끌려 나왔다.
방의 다른 구석에는 여자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랭보!”
코드명에 익숙한지, 그는 고개를 돌려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넌 뭐지? 내 부하는 아닌 것 같은데··· 발음 좋구나.”
“랭보 부사령관, 확실한가?”
“넌 뭔데 이렇게 무례하지?”
대답 대신, 이준기는 의자에 앉은 놈을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랭보는 의자를 밀어 넘기고 일어나면서 옆으로 피했다.
“으하하! 마피아 졸개로군?”
이준기는 대답 없이 적을 향해 치켜든 손을 겨냥했다.
“힘없는 여자들만 괴롭히느라 심심했는데, 잘됐군. 잠깐 놀아주지.”
그렇게 말하면서 랭보는 허리춤에서 쌍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날이 제대로 선 군용 나이프 한 쌍이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반사했다.
“겨우 그따위 발리송으로 날 대적하겠다고? 어디 러시아 촌구석 시장에서 산 거냐?”
이준기의 무기를 비웃고 나서, 랭보는 양손의 단검을 손안에서 휘리릭 돌렸다.
방안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랭보 님!”
“부사령관의 화려한 단검술을 또 보게 되는군요!”
“마피아 놈, 회를 떠버려요!”
세르게이가 이준기를 향해 외쳤다.
“대장! 본때를 보여줘! 차분하게, 차분하게 말야···”
세르게이의 요청에 따라 이준기는 치켜들었던 오른손을 내렸다.
그리고 발리송을 두 손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랭보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거 뭐야? 항복이냐?”
부하들도 가담해서 조롱했다.
“살려달라는 거냐?”
“지금 항복해도 결과는 같아!”
“랭보 부사령관은 자비심이라고는 없다고!”
이준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증오를 많이 잠재운 눈으로 랭보를 쳐다보았다.
랭보가 비꼬며 말했다.
“그 눈은 뭐지? 아까보다는 낫지만, 공손하려면 아직 멀었어. 내가 공손하게 만들어주지.”
이준기가 고개를 까딱 움직임과 동시에, 랭보가 어색하게 한 걸음을 앞으로 뗐다.
분명히 저항하고 있음에도, 그의 몸은 어떤 힘에 밀려 앞으로 끌려왔다.
랭보가 놀라서 외쳤다.
“이··· 이게 뭐야? 설마··· 텔레키네시스?”
다음 순간, 그의 두 손에서 단검이 분리되었다.
거칠게 당겨져 양손에서 뒤로 빠져나간 단검이 양쪽 손바닥을 베고 지나갔다.
“크아악! 피! 피 나잖아!”
랭보는 자기 손바닥을 보며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뒤뚱뒤뚱, 스스로의 몸에 저항하면서 앞으로 어색하게 걸음을 떼었다.
부하들이 소리쳤다.
“래··· 랭보 님!”
“저··· 단검이 움직인다!”
단검 두 개가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랭보의 앞으로 움직였다.
달려드는 단검을 보고 눈을 질끈 감으며 랭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몸을 찔릴 것이라 예상하고 눈을 감은 랭보의 귀에 부하들의 외침이 들렸다.
“다··· 단검이 공중에서 멈췄다!”
눈을 뜬 랭보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빼앗긴 두 개의 단검이 허벅지 높이로, 그의 전방 2미터 정도의 거리에 둥둥 떠 있었다.
랭보는 여전히 뒤뚱거리며 앞으로 걷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야 이 새끼들아! 이 새끼 잡아!”
랭보의 외침에 병사 둘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그들은 뭔가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바닥에 넘어졌다.
공중에서 반 바퀴 돌며 바닥으로 떨어진 그들은 턱이 깨졌다.
둘 다, 손이 뒤로 꺾인 채로 떨어졌다.
바닥을 손바닥으로 막고 싶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들 이제는 확실하게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병사들이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저게··· 구원자 스킬이란 말이야?”
그 와중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안을 가로질렀다.
“꼼짝 마라! 스킬을 멈춰! 계속하면 이 여자의 목을 그어버리겠다!”
고개를 돌려 이준기는 보았다.
구석에 꿇어앉은 여학생들 중 한 명의 목에, 병사 하나가 부엌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준기가 물었다.
“넌, 몇 명이나 죽였지?”
“무슨 소리야! 멈추라고 했다! 이 여자가 죽는 걸 보고 싶은 거냐? 이 여자를 죽인 다음에는 여기 이 여자들을 하나씩 다 죽이겠다!”
“많이 죽여봤다는 얘기겠지?”
“뭐어?”
위협하던 병사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그가 들고 위협하던 부엌칼이 공중에 뜬 채로 그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그냥 목이 날아갈 거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준기의 말에, 병사가 울먹이며 외쳤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대답해. 넌 얼마나 죽이고, 강간했지?”
“저··· 저는 별로···”
“똑바로 대답해라! 화가 나면, 난 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단 말이다!”
“전··· 별로 많이 죽이지 않았어요···”
“숫자를 말하지 않겠다면, 네가 좋아하는 대로 목을 그어주마.”
“스··· 스무 명 정도··· 끄아악!”
부엌칼이 그의 목을 옆으로 베고 지나가서 창틀 위로 착륙했다.
병사는 자기 목의 오른편을 양손으로 붙잡고 주변을 향해 애원했다.
“사··· 살려줘요··· 제··· 제발···”
여자들은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 그를 피해 흩어졌다.
병사들이 동요하자, 이준기는 외쳤다.
“저 꼴이 되고 싶은 놈은 언제든지 움직여 봐라.”
그 말에, 병사들은 물론 여자들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준기는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미소를 보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그는 말했다.
“숙녀분들은, 편하게 계셔 주세요. 다른 방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잠깐만 거기에서 기다려 주세요.”
그러는 동안에도, 랭보는 뒤뚱뒤뚱 앞으로 걷고 있었다.
온몸을 뒤로 기대 움직임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단검과 그 사이에는 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울부짖으며, 랭보가 애원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이준기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는 죽지 않아. 적어도, 5시까지는 살아 있을 거다.”
식당 벽에 걸린 시계는 4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