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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1)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1)
모스크바를 공포에 떨게 했던 유럽연합군 제2군 사령관 로드 바이런(Lord Byron).
그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전쟁 상황을 현장에서 보도하려던 알자지라의 두 기자에 의해 실상이 밝혀진 것이다.
러시아 언론이 그동안 계속해서 떠들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이야기와 사실 같은 내용이었다.
마피아 소유의 러시아 언론을 믿을 수 없다고, 그간의 뉴스를 외면하던 서구권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유럽연합군에 소속된 나라들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 속칭 ‘유럽연합군’ 모스크바에서 약탈극.
- 800년 전 몽골군에게 당한 비극이 모스크바에서 재현되는가?
- 수많은 여자들이 침략군의 성 노리개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도 이어져.
- 비전투원을 향한 악랄한 잔학행위. 제네바협약도 구원자에게는 예외인가?
- 유럽연합, 방송사들을 상대로 ‘유럽연합군’ 명칭 사용 자제 호소. 정식 명칭은 ‘러시아 해방군’.
3월 4일 저녁, 정례 전략회의 시간이 되었지만 제2군 사령관 바이런의 모습은 화면에 뜨지 않았다.
회의 시작 5분 전부터 모여 있던 사람들은 화면을 주시하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회의 시작 시각으로부터 5분이 지났지만, 바이런의 화면은 꺼져 있는 채였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를 깨고 일어선 것은 역시 제1군 사령관 나폴레옹이었다.
“회의 시작하시죠, 총사령관님. 전범 바이런은 도망친 모양입니다.”
총사령관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숨을 크게 내쉬는 것이 화면에 잡혔다.
가면 뒤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리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다시 말했다.
“총사령관님.”
“네에··· 알았어요, 나폴레옹 사령관. 회의 시작하죠. 첫 번째 안건은···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오늘 자 알자지라 보도입니다.”
“각 군 상황부터 파악하시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우선 저희 제1군부터 말씀드리자면··· 조금 전에 제가 파악한 잔여 병력은 43명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반이 넘는 병력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말릴 수도 없었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가타는 눈과 코만을 가리는 오페라 가면을 마치 안경처럼 고쳐 썼다.
영화 <몰락>에 나오는 히틀러처럼, 그녀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 다음은요? 제3군···?”
“사령관 반 고흐, 제3군 보고드립니다. 회의 참가 직전에 확인한 잔여 병력은 37명입니다. 저희도 반수 넘게 이탈했습니다.”
“제4군 상황 보고드립니다. 저희도 오늘 하루 동안 반 정도의 구원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겠다면서 군에서 이탈했습니다. 잔여 병력은 41명입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총사령관을 대신해서, 제1군 사령관 나폴레옹이 물었다.
“제2군 상황 아시는 분 안 계십니까?”
제3군 사령관 반 고흐, 이어 제4군 사령관 엘 시드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고 나서, 총사령관이 입을 뗐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제2군 사령관 나폴레옹이 탁자를 가볍게 치면서 동의했다.
“바이런 그 작자··· 상식이라고는 없는··· 아니 인간으로서 양심이 없는···!”
총사령관이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치면서 일어났다.
일어서는 바람에 화면에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턱 끝만이 겨우 보이는 화면에서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기자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합니까! 전쟁에서 약탈은 당연한 거죠! 하지만 들키지는 말아야죠!”
어안이 벙벙해진 사령관들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가고, 제3군 사령관 반 고흐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화면에는 가면을 벗어 던진 그녀의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제3군 사령관 반 고흐. 내 이름은 아델하이트 판데사르다. 국적은 너희들도 예상했겠지만 네덜란드지. 러시아 해방? 거짓말에 속아서 오게 된 것이지만, 이따위 짐승 같은 짓거리에 가담한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부로 제3군은 해산한다.”
*****
모스크바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바실리사는 괴로워했다.
총사령관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의 비리를 캐는 데 주력했던 것은 이준기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준기도 괴로웠다.
“유럽연합군 제2군 사령관 나폴레옹, 제가 반드시 심판하겠습니다. 지금 모스크바로 갈 거예요.”
“준기 씨가 어떻게요? 위조 신분증으로 비행기 타기도 어렵잖아요?”
“대사관에 다녀왔어요. 실종 신고 풀었고, 여권도 신청했습니다. 당장 쓸 여행 증명서도 받아왔어요.”
“정말이죠? 저··· 저도 모스크바로 갈게요.”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바실리사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묻어났다.
마피아에 짓밟히고 이제는 침략자에게 약탈당한 조국, 아니, 사람들···
이웃 사람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나큰 분노가, 슬픔이 되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세르게이도 따라나섰다.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문아린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의논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한상태 문제다.
설국헌과 장대한에게 부탁해 놓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한상태와 담판을 봐야 하는 것은 이준기 자신이다.
그런데 지금 급하게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아린아, 자꾸 너한테 기대게만 되네. 미안하다.”
“아냐, 무슨 소리야. 말해봐.”
“한상태 회장이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어. 나 대신 네가 좀 만나줘.”
“한상태 회장이? 무슨 일인데?”
“공항에서 절차 끝내고 다시 연락할게. 그래도 모자라면 비행기에서 와이파이로 연락할게.”
“그래, 오빠. 급한 일부터 끝내고 연락해.”
세르게이는 당연히 따라왔다.
세르게이에게 지금 당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할 일이 없다.
겉으로는 표현을 하고 있지 않지만, 세르게이도 바실리사와 마찬가지로 분노에 불타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도 모스크바로 갈 권리가 있다.
“이건··· 예상 못 했어. 정말 미안하다, 세르게이.”
“아냐. 이게 왜 대장 잘못이야.”
“예상은 못 했지만, 반드시 바로잡을 거야.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죗값은 받아낼 거야.”
“그래, 대장. 나는 대장을 믿어. 나도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
바로 조금 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의 일등석을 사고, 짐도 없이 맨몸으로 검색대를 통과한 뒤, 둘은 게이트를 향해 뛰었다.
뛰면서, 이준기는 문아린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지금 게이트로 가는 중이야. 자세한 얘기는 정말로 비행기 타고서 해야겠다.”
*****
오후 2시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행기를 타고 9시간을 날아왔다.
시차 덕분에 모스크바는 아직 오후 4시였다.
허겁지겁 공항을 나와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택시를 향해 그들은 달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며, 이준기는 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시내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가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기자들입니다.”
“전쟁 중인 곳으로 가라고요? 그건 추가 요금인데.”
“추가 요금 드리겠습니다.”
“꽉 잡으세요. 있는 대로 밟을 테니.”
낡은 택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속도를 끌어올렸다.
엔진은 괴롭다고 괴성을 질러댔지만, 낡은 자동차는 주저앉지 않고 도로를 내달렸다.
지그재그로 앞선 차들을 제치며, 자동차는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근처까지만 가시면 됩니다. 위험하니까요.”
“말 걸지 마쇼. 집중해야 하니까.”
“네, 부탁합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건물들을 몇 개나 지나서, 자동차는 멈춰 섰다.
기사는 거치대에서 전화를 떼어 이준기와 세르게이에게 들이댔다.
지도 화면을 확대하여 보여주면서, 그는 설명했다.
“여기 이 지점에 차원문이 있고, 거기에서 겨우 네 블록 떨어진 여기··· 여기에도 차원문이 있소. 그래서 이 근처는 쑥대밭이 된 지 오래지. 위험하니까 여기에 차를 댄 거요. 조심해서 가보시오.”
“감사합니다.”
요금을 치르고, 둘은 차에서 내렸다.
현장에 가까이 갈수록, 전투의 흔적은 분명해졌다.
한 번이 아닌, 여러 차례의 화재로 그을린 벽은 다양한 농도의 회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적은 없다.
그야말로 아무도 없다.
택시 운전사가 말했던 그 골목에서 두 블록이나 떨어진 곳인데,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철수한 모양이다.
“꺄악!”
여자의 비명소리가 짧게 들리고 나서 가로막혔다.
이준기와 세르게이는 소리가 난 쪽으로 뛰었다.
미성년자가 틀림없어 보이는 여자를 우락부락한 체격의 한 남자가 끌고 가고 있었다.
솥뚜껑같이 무지막지한 손바닥이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낯선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잠깐 굳었던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씨익 웃으면서 그는 둘에게 말했다.
“크흐흐흐. 새로 온 놈들이냐? 이런 건 냄새를 참 잘 맡는단 말야. 순서를 기다려라. 나 말고도 세 명이 저쪽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세르게이가 흥분해서 외쳤다.
“뭐··· 뭣이 어째? 우리가 너와 같은 부류로 보이냐, 이 짐승 같은 놈아!”
“뭐야? 정의의 사도들이냐?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사내가 입안에 손가락을 넣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곧바로, 그가 말한 앞 순서의 세 명이 골목에서 나타났다.
가장 키가 큰 흑발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앞으로 나왔다.
“뭐야 이 새끼들은?”
대꾸도 없이 세르게이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
일대다의 전투에 익숙해진 세르게이였지만, 예상보다 거친 저항에 부닥쳤다.
선두의 선글라스는 세르게이의 선공을 가볍게 피했다.
세르게이는 멈추지 않고 그 뒤의 덩치에게 일격을 날렸다.
덩치는 그대로 쓰러졌지만, 선글라스가 세르게이의 뒤로 돌아와 세르게이에게 일격을 먹였다.
세르게이가 바닥을 구르고 일어서며 말했다.
“제법이군. 짐승 같은 놈들이.”
선글라스는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썩소를 지어보였다.
“마피아 조무래기로구나. 그래, 억울하냐? 네놈들 영역이 유린당하는 것이?”
선글라스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불덩어리가 그의 손을 감쌌다.
씨익 웃으면서, 선글라스는 세르게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이라면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세르게이였지만, 손을 뺄 수 없었다.
“너보다 강한 자에게는 꼬리를 내려야지. 안 그래?”
“더러운 범죄자 놈들!”
“원래 네놈들이 하던 일이다. 우리라고 못 할 것도 없잖아?”
“반드시 지옥에 보내주마.”
“어디 한번 해봐라.”
선글라스는 올렸던 손을 내려 세르게이에게 불꽃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그의 손을 벗어나는가 싶던 불덩이는 그대로 그의 팔을 거꾸로 타고 올라와 그를 휩쌌다.
“뭐··· 뭐야! 으악!”
선글라스는 팔을 타고 올라와 얼굴로 덤벼드는 불꽃에 놀라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불덩이를 돌려준 이준기는 가볍게 땅을 디디고 도약했다.
잠시 후, 선글라스의 양옆을 지키던 두 명이 거의 동시에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한 명의 눈앞에 이준기가 나타났다.
“현행범. 즉결처분이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눈.
이준기는 손에 든 주머니칼로 그의 무릎을 직격했다.
“끄아아악!”
무릎을 쥐고 나뒹구르려는 남자를, 이준기는 거칠게 붙잡아 다시 땅바닥으로 눌렀다.
“사··· 살려줘!”
그의 다른 무릎에도 주머니칼이 깊숙이 들어왔다.
“살려주는 이유는 하나다. 네놈들의 악행을 증언해라. 그렇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남자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눈을 감고 외쳤다.
“사··· 살려줘! 시키는 대로 할게! 우리들이 한 짓을 전부 털어놓겠어!”
대꾸하지 않고, 이준기는 일어나서 2인조의 다른 남자를 쳐다보았다.
뒷걸음질 치면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도 증언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짧게 대답한 이준기는 그를 거칠게 밀쳐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바로 옆에 기절한 여자가 누워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그녀를 보자, 이준기의 눈이 증오로 불타올랐다.
“너 따위, 살 가치가 없다!”
이준기는 손에 든 칼을 높이 들어 남자의 심장을 겨누었다.
“대··· 대장!”
어깨를 붙잡는 상대를 향해 이준기가 고개를 거칠게 돌렸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의 눈에 세르게이는 곧바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말은 이어갈 수 있었다.
“저··· 정신 차려! 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