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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0: 트루 컬러즈 (6)
Episode 50: 트루 컬러즈 (6)
자동문 건너편의 이준기를 보고 사이토는 소리 질렀다.
“이준기! 네놈 얼굴은 잘 알고 있다. 네놈이 우리 일본에서는 꽤 유명인사거든.”
“나쁘지 않은 얘기군. 소개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테니. 일단 나와라. 공공시설에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으니.”
“덤비라며? 여기에서 하자는 게 아니었나?”
“장소는 어디든지 좋다. 던전 안이든 밖이든. 단지,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서 하자는 얘기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까는 소리.”
사이토는 문밖으로 나오는 대신 오른손을 들었다.
“빛의 방패!”
이준기를 향해 빛의 원반이 날아들었다.
“네놈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그렇게 말하며 이준기는 주머니에서 꺼낸 발리송으로 빛의 방패를 쳐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빛의 원반을 바라보며, 사이토가 말했다.
“어? 빛의 방패가 겨우 주머니칼에 막힌다고?”
사이토가 오른팔을 휘젓자, 날아오던 빛의 원반이 방향을 바꾸어 공항 건물 안쪽으로 움직였다.
카트를 정리하던 공항 직원을 향해, 빛의 원반이 웅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갑자기 날아드는 거대한 빛 덩어리를 보고 직원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뭐야!”
직원이 제자리에 주저앉는 동시에, 빛의 원반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사이토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이토가 소리 질렀다.
“이··· 이거 뭐야! 마··· 말을 들어!”
사이토는 오른팔을 공중에서 휘저었지만, 빛의 원반은 그대로 그를 향해 날아왔다.
빛의 방패를 막으려고 양팔을 겹쳐 머리 쪽으로 가져가면서, 사이토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빛의 방패에 직격당해 찌릿해질 것을 예상하면서, 사이토는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빛의 방패가 내는 웅 소리가 멀어져 갔다.
사이토가 눈을 뜨자, 빛의 방패는 이준기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웅성거리기도 했다.
“빛의 방패를··· 빼앗겼어?”
“남의 빛의 방패를 제어하는 게 가능한가?”
“저것도 염력이야?”
“저게 이준기!”
사이토가 움츠렸던 몸을 펴고 이준기를 향해 소리쳤다.
“이준기! 과연 명불허전이군!”
빛의 방패가 주변을 빙빙 돌게 하면서, 이준기는 사이토를 향해 말했다.
“경고하겠는데, 조금 전처럼 애먼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참지 않겠다.”
“하하하! 자신감이 넘치는걸! 마음에 들어!”
“자리를 옮기자.”
“하하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사이토는 가면라이더 같은 포즈로 두 팔을 십자 모양으로 겹치고 외쳤다.
“신성 불꽃!”
사이토의 팔에서 밝은 주황색 불꽃이 혀를 낼름거리며 이준기를 향해 날아왔다.
이준기의 주위를 돌던 빛의 방패가 좌우로 한 번씩 움직이며 불꽃의 혀끝을 쳐냈다.
사이토에서 이준기까지, 5미터가 넘는 길이로 길어졌던 불꽃이 수축되면서 사이토에게 돌아왔다.
“크읏!”
빛의 방패는 방어하면서 빛의 책을 소모한다.
이준기는 사이토의 공격을 사이토의 빛의 방패로 막아냈고, 그 결과 사이토의 빛의 책이 추가로 소모되었다.
불꽃이 사그라들자, 사이토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네놈! 제법이군!”
“경고를 무시하다니,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사람들 구하는 걸 좋아하는 놈이군. 이것도 한번 막아봐라.”
사이토는 이준기의 시야에서 달아나려는 듯, 공항 안쪽으로 달리면서 외쳤다.
“겁화(劫火)!”
불바다를 만드는 스킬, 겁화.
희귀한 스킬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도 모르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 스킬을 아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공항 바깥으로 내달렸다.
도망치던 사람들과 가만히 있던 사람들.
그들의 시야에서 순간, 이준기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로 다음 순간, 마치 돌개바람에 치이는 것처럼, 스킬을 시전하던 사이토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가 넘어진 자리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이토 카이는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꺄아아악!”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려는 것을 막은 것인데, 사람들은 시체를 보고 기겁을 했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이준기는 주머니칼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일본 팀 구원자의 반은 아직 공항 건물 안쪽에 있고, 나머지 반은 바깥에 나와 있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유창한 일본어로, 이준기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순식간에 사이토 카이를 제압하는 이준기의 모습에 위축된 일본인 구원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당신들은 지금 당장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공항 밖으로 나올 생각 마세요. 공항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저와 일대일 대결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겁먹은 눈길만을 교환할 뿐이었다.
단호한 눈빛으로 좌중을 제압하고, 이준기가 말을 이었다.
“돌아가서 구로모토 신스케 회장에게 보고하세요. 오늘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면 됩니다. 요점은 간단합니다. 한국 원정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원정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이 이상의 희생을 과연 일본 협회가, 아니 야마토 연합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다.
제3차 원정대의 일본팀 리더인 사이토 카이가 없어졌다.
원정대 멤버 중 다음으로 높은 서열인 랭킹 5위 야마다 유이를 향해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소극적인 성격의 힐러인 그녀는 대답을 구하는 눈길로 쿠사나기 린을 찾았다.
제2차 원정대 멤버였고, 하시바 세이이치로의 심복이기도 했던 그녀에게 사람들의 눈길이 쏟아졌다.
이준기가 미리 예고했던 상황이었지만, 쿠사나기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틀리지 않고 연습한 대로 연기할 수 있을까?
쿠사나기는 고개를 돌려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요구사항을 전달 중인 적을 바라보는 건 당연한 거죠. 쿨한 성격의 쿠사나기 씨가 그렇게 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그렇게 하세요.”
이준기의 눈빛을 만나자,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중요한 순간이라고, 이준기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부분이다.
“사이토 카이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게 된다면, 쿠사나기 씨가 나설 일이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아는 사이토 카이는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어려울 겁니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사이토 카이는 자살 공격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인물이죠.”
“동의합니다. 그래서 쿠사나기 씨의 역할이 중요해요. 야마다 유이는 그룹 전체의 결정을 대신 내릴 성격이 아니잖아요. 제2차 원정대에도 포함되었던 쿠사나기 씨에게 시선이 모일 겁니다. 그때, 쿨하게 대답하시면 돼요. 저를 한번 쳐다보셔도 좋고요.”
수십 번이나 연습했던 것인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기라는 것이 들키지 않을까, 그래서 이준기와 한 팀이라는 것이 들통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흔들리지 않는 이준기의 눈동자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쿠사나기는 다시 일본인 구원자들을 둘러보았다.
하나 같이 겁에 질려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서 이준기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알았어요. 오늘은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구라모토 회장님에게 오늘 일을 보고하겠습니다.”
대사를 끝내고 쿠사나기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리허설 때에도 이준기가 말했듯, 이상할 것 없는 행동이다.
이준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의 만남, 최소한의 피해로 마무리 지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
일본으로 돌아가는 밤 비행기.
후지와라는 오히려 맘이 편했다.
‘러시아 원정 같은 거, 내키지도 않았는데 다행이군. 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러나 조용한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졸지에 스파이가 되어버렸다.
일거수일투족을 가장해야 하는 삶을 과연 얼마 동안 지탱할 수 있을까.
이준기는 말했다.
이 상황은 곧 끝날 것이라고.
일본 협회를 지배하는 비밀 조직, 야마토 연합을 붕괴시키겠다고 그는 말했다.
투항하기로 마음먹자, 후지와라는 이준기라는 괴물을 앞에 두고도 여러 가지를 물을 용기가 생겼다.
문아린의 말대로,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다.
“야마토 연합을 붕괴시킨다면, 연합장 아시카가 히로시를 처단한다는 말씀이신지?”
“아시카가는 명목상 수장일 뿐이다. 야마토 연합의 실세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는 거야?”
“그럼··· 소문대로 구라모토와 하시바··· 라는 얘기입니까?”
“그렇다.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사라진 지금, 남은 건 구라모토 신스케뿐이지.”
“그걸로 될까요? 상위랭커들은 예외 없이 거의 모두가 야마토 연합 소속입니다. 랭킹 2위 와타베 하야토는 살려둬도 괜찮을까요? 랭킹 4위, 아니 이제 사이토 카이가 죽었으니 3위가 된 츠지 준페이는요?”
“와타베 하야토는 정러파의 수장이었지. 구라모토와 하시바가 정한파에서 정러파로 진로 변경을 하기 전까지는 말야. 그 친구는 야심이 만만치 않으니까 변수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츠지 준페이는 살려둘 생각이다. 전국시대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중소 영주에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일본 총독이 되는 셈이군요?”
“총독이라고?”
“죄··· 죄송합니다, 이준기 님. 말하자면, 이준기 님이 일본에 세우는 통치자···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 일본을 정복하려는 게 아냐. 일본은 일본인에게, 러시아는 러시아인에게 돌려주려는 것뿐이다.”
“아··· 알겠습니다. 말조심하겠습니다.”
쿠로사와가 말한 대로, 이준기의 말투는 단호하고 매서웠다.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구라모토나 하시바와 마찬가지로 독재자 스타일의 리더다.
‘그런데, 이준기 님을 바라보던 쿠사나기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건 무서운 상사를 쳐다보는 눈빛이 아니었어.’
이제 한배를 탄 세 사람.
후지와라 테츠, 쿠로사와 카츠, 그리고 쿠사나기 린.
후지와라는 쿠사나기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이준기가 그렇게 명령했으니까.
*****
“휴! 오늘 하루 정말 길었다.”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 이준기는 러시아어로 말했다.
세르게이가 커피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수고했어, 대장. 이건 허브차야. 긴장을 풀어주고 잠을 푹 자게 해준다는데.”
“고마워, 세르게이. 그런데 갑자기 허브차는 어디서 난 거야?”
“오늘 장을 좀 봤지. 아린 씨랑, 창수 씨랑 다 함께.”
“에? 그거 재미있는 조합이네.”
“무슨 소리야? 대장이 만든 조합이잖아. 극동 마피아 잔당 처리반. 잊었어?”
“아니, 하지만 그건 일이잖아? 일이 끝난 다음에도 다 같이 장을 봤단 말야? 팀 케미스트리가 죽여주는데?”
“아린 씨가 리더십이 있어서 그렇지, 뭐. 한국에는 인재도 많지.”
“아린이 실력은 내가 잘 알지. 구원자가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이고.”
“대장이 커피를 너무 마신다고, 아린 씨가 걱정하더라고. 오후 늦게부터는 커피를 멀리하는 게 좋다면서, 허브차를 고르던데.”
‘마치, 아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세르게이에게 기시감이 일었다.
‘대장은 복도 많군. 하긴, 저 정도 사람이라면.’
이준기와 세르게이는 숙소 하나를 같이 쓰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있었다.
바실리사는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푸가초프의 새내기, 김창수는 별도의 숙소에서 지낸다.
문아린은 SSF에서 마련한 거처에서 지내고 있다.
푸가초프 멤버들과는 달리, 일급 호텔이다.
SSF는 비밀조직도 아니고, 세계 각국의 대기업들로부터 후원금을 듬뿍 받고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제2차 원정대 생존 멤버들과 함께 별도의 숙소에서 지내던 쿠로사와는 지금 밤 비행기로 귀국 중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이준기에게 협력 중인 일본인 구원자들의 역할은 곧 끝날 것이다.
야마토 연합이라는 사조직이 사라진 일본 구원자 계가 정신 차리기를 희망할 뿐이다.
정신 차리는 거라면, 한국 협회에게도 당면한 숙제다.
한상태가 예전의 그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이준기.
한상태 정도 되는 인물이 중심을 잡아준다면, 기억과는 다른 역사가 펼쳐질 공산이 크다.
되돌아오기 전, 이준기가 보았던 역사.
잿더미가 되었던 한국 구원자 계.
이상덕의 계략으로 일본 협회의 지부가 될 뻔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본의 침략은 결국 막아낸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가.
권영호, 박충기, 전용택, 방혁우, 그리고··· 한상태.
일순간 증발한 선배들의 뒤를 이어 갑자기 한국을 대표하게 된 이준기와 길수연은 조슈아 테일러를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한상태 회장··· 내가 조슈아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도록, 내 가족이 사는 우리나라를 지켜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