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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0: 트루 컬러즈 (4)
Episode 50: 트루 컬러즈 (4)
이준기의 이야기가 끝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대답이 되었냐고 묻는 이준기에게, 최아람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윤동직의 곁으로 다가가서 섰다.
김나리, 김범규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윤동직의 옆으로 와서 섰다.
한상태 쪽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람들은 윤동직의 왼쪽으로 섰다.
그렇게 모두 한상태에게서 가급적 먼 위치에 서자, 한상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선 것이 윤동직이 되었다.
단 한 사람, 후지와라 테츠를 제외하고.
후지와라 테츠가 이준기에게 물었다.
“저··· 전부 사실이겠지? 제··· 제발 대답해줘. 정말로 전부 사실이야?”
“그래. 원한다면 증인이라도 불러주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들으면 납득하겠지.”
“다른 사람이라면?”
“미안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정보 보안을 유지하는 중이다. 증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증인들을 만나고 싶다면,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둘?”
“나에게 죽든가,”
피가 더 남아 있지도 않은 것 같은 후지와라의 얼굴에서 혈색이 조금 더 사라졌다.
“나의 동료가 되든가.”
후지와라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도··· 동료?”
“아주 불리한 고용계약이다. 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한데, 급료는 한 푼도 줄 수 없어. 그래도 숙식은 제공한다. 구원자 시절처럼 호사스럽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게다가 직업 만족도가 높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보람 있는 일이라고나 할까.”
“혀··· 협회를 탈퇴하라는 얘기?”
“정확히 말하자면, 구원자 은퇴지. 김창수 구원자의 사례를 참고하면 될 텐데. 현재 내 동료가 되어,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거든.”
한상태, 김범규, 윤동직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김창수?”
“김창수가 살아 있다고?”
윤동직을 바라보며 이준기가 대답했다.
“네, 살아 있습니다. 지금 문아린 구원자와 함께 자원봉사 활동 중이에요.”
“문아린도?”
“네. 제가 존경하는 구원자 중 한 사람, 문아린 구원자님과 함께요.”
한상태가 외쳤다.
“무슨 수작이냐! 구원자들을 은퇴시켜서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나?”
“이득? 생각해 보니 이득이 있군요. 저로서는 적이 줄어드는 셈이니까.”
“하! 구원자들은 모두 너의 적이다? 그런 얘기야?”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에요.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예요. 유혹에 쉽게 무너지죠. 구원자들은 점점 더, 권력과 소유에 대한 유혹에 이끌리게 될 겁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질수록, 점점 더 말이죠.”
“그러니까··· 타락한, 아니 부패한 구원자를 처단하는 게 너의 일이다?”
“그렇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한상태는 자기 가슴을 쾅 치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런 부패한 구원자란 말이지!”
“한상태 회장은 일본 야쿠자와 연합해서 러시아를 침략했습니다.”
“야쿠자? 나는 일본 구원자협회와 연합한 것뿐이다! 구원자들끼리의 일이다!”
“구원자들은 내키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도 되는 겁니까?”
“우린 마피아를 처단하려고 온 거야!”
“그건 러시아인들이 할 일입니다.”
“러시아인들이 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온 거다!”
“제가 지금 한상태 회장과 이야기 중인지, 구라모토 회장과 이야기 중인지 헷갈리는군요.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구라모토는 마피아 나와바리를 빼앗아 야쿠자에게 넘기는 것뿐입니다. 야쿠자의 두목이 바로 구라모토 신스케입니다.”
“그건 모두 네 이야기일 뿐이잖아!”
“제삼자의 증언을 원하십니까? 제삼자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한상태 회장에게도 있습니다. 아까 후지와라에게 이야기한 것, 들으셨잖습니까?”
“나더러 죽으라는 얘기냐? 아님, 네놈의 개가 되라고?”
“개가 아니고 동료입니다. 한상태 회장에게는 동료가 개로 보입니까?”
“헛소리 집어치워라!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자!”
“당신 혼자서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호··· 혼자라니!”
한상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지와라가 어느새 윤동직의 왼쪽으로 멀리 물러가 있었다.
“후지와라! 제정신이냐!”
후지와라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구라모토 회장이··· 야쿠자를 수하로 부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준기의 말이 맞아요.”
“저런 뻔한 농간에 넘어가다니. 후지와라! 정말로 구원자를 은퇴하겠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준기와 싸우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준기가 확인해 주었다.
“맞습니다. 윤동직 구원자 쪽에 서는 것은 단지 그걸 의미할 뿐입니다. 지금 저와 싸우지 않고, 귀국하겠다는 거죠. 귀국 후에 뭘 하든, 그건 당사자 자유입니다.”
한상태가 외쳤다.
“나··· 나는!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나··· 나는··· 지금 이자리에서··· 내 모든 것을 부정당했다! 내가, 뭘 어째야 한단 말이냐!”
“제 의견을 구하는 겁니까, 설마?”
이준기의 물음에, 한상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말해봐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김범규 회장님, 기억하고 계시죠?”
김범규가 대답했다.
“네. 하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고 한일 연합군을 해체한다. 둘, 앞으로도 일본 협회와는 협력 사업을 하지 않는다.”
이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이상덕과 용병 계약을 할 때 넣었던 조건과 정확히 같죠. 제가 원하는 것은 단지 그뿐입니다. 한국 협회가 당당히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것. 일본의 농간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는 것. 한국 협회가 그 이후에 뭘 어떻게 하든, 그건 한국 협회에서 여러분들이 정할 일입니다.”
한상태가 크게 웃어젖혔다.
광인과도 같은 웃음.
웃음소리에 절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하하! 여기에서 꼬리 내리고 돌아가면, 나는 그야말로 개가 되겠지.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내 말은 전부 개소리로 여기겠지. 15명이 넘게 몰려와서 이준기 한 명을 상대로, 싸울 생각도 못 하고 항복한··· 그런 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하하하!”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잘못을 고쳐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하하하하! 윤리 강의 시간이었나!”
“한상태 회장, 돌아가세요. 한국 협회도 한상태 회장도, 아직까지는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으하하하! 이준기!”
한상태는 손을 앞으로 길게 뻗어 이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준기! 사나이답게 승부를 가리자! 아까 약속한 대로, 던전 안에서 일대일 대결이다! 꼬리 내리고 도망치지는 않겠지?”
“제가 지금 꼬리 내리면, 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제 조건을 들어주시겠어요?”
“으하하하! 이준기, 가증스럽구나! 역겨운 위선은 집어치우고 차라리 나를 죽여라!”
“진정하세요, 한상태 회장. 시내에 커피 가게가 있습니다. 커피라도 한잔하시면서 마음을 좀 진정시키는 게 어때요?”
“으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한상태는 공항 앞 길가에서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뽑아 들었다.
투둑 소리를 내며, 인도에 박혀 있던 정류장 표지판은 쉽게 뜯겨 나왔다.
그걸 창처럼 꼬나 잡은 채, 한상태는 이준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기이이!”
이준기를 향해 도약한 한상태가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준기는 한상태를 공중에 붙잡아 둔 채로 말했다.
“구원자라고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공공기물 파손이라뇨.”
“끄아아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겨우 그 정도의 소리만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손발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거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처럼, 한상태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 상태에서, 한상태와 표지판은 사이좋게 함께 움직여 제자리로 돌아갔다.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점프의 궤적을 거꾸로 움직여 한상태는 표지판을 손에 쥔 채 착지했다.
그리고 공중에 살짝 뜬 채로 표지판이 뽑혔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표지판이 보도블록 안으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위로 파헤쳐졌던 보도블록이 차례로 덮였다.
보도블록 중에는 부서진 것도 있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표지판은 제자리에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보도블록이 조금 튀어나왔군요. 발로 밟아 주세요.”
이준기의 말에 따르기라도 하는 듯, 한상태가 한 발을 들어 튀어나온 보도블록을 발로 밟아 눌렀다.
얼어붙었던 혀가 풀리자, 한상태는 이준기에게 소리 질렀다.
겨우 말만 할 수 있을 뿐, 발은 여전히 보도블록을 밟아 다지는 중이었다.
“이준기! 나에게 이런 치욕을! 도대체 왜!”
좌절감으로 북받쳐 오른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분을 못 이기고 한상태는 결국 혼절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설국헌과 장대한이 한상태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들과 함께 타나난 최현과 고윤아는 김범규 이하 브릴리언트 길드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김나리 힐러님!”
“윤아 씨!”
“이제 우리, 돌아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준기 구원자님이 얘기하지 않으셨나요?”
“그··· 그게 전부 사실인 거예요?”
“아뇨.”
고윤아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미소를 보였다.
“사실의 일부만 얘기한 거죠.”
“네?”
“하시바 세이이치로··· 이준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패배했어요. 혹시 그런 얘기도 있었나요?”
“준기 씨가 하시바를 직접 죽였다고는 얘기했어요.”
“그 하시바 세이이치로··· 염력으로 자동차를 구겨버리는 사람이었어요.”
“네에?”
김나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런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이준기 구원자에게는 손도 대지 못했어요. 그 대결을 직접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가 이야기해 준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나리 씨가 저희 편이 되어준다면, 가르쳐드릴게요.”
“윤아 씨가··· 준기 씨 동료···가 된 거예요?”
*****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한상태의 눈에 설국헌과 장대한의 모습이 보였다.
한상태의 길드, ‘프라이드’에서 각각 서열 3위와 2위인 그들.
한일 연합군 제2차 원정대로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던 사람들이다.
한상태는 허겁지겁 상반신을 일으켰다.
“서··· 설 교수님?”
“한 회장··· 괜찮아요?”
“여··· 여기는···”
“병원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비행기로 돌아갑시다.”
머릿속에 오늘 오후의 일이 재생되자, 한상태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설국헌이 말했다.
“한 회장···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한상태는 순간 울컥하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간신히 스스로를 제어했다.
“이제 난 끝났어요! 협회장이고 길마고 자시고··· 구원자 은퇴할 일만 남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협회를 잘 이끌어 주셔야지.”
“누··· 누가 내 말을 듣겠습니까! 이준기에게 손끝 하나 대지도 못하고 농락당했는데! 후지와라는 일본놈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거기 있던 한국 사람들 열몇 명이 전부 저한테 등을 돌렸어요!”
“등을 돌린 게 아닙니다. 그저,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뿐이잖소?”
“협회장 말을 거부하고, 적에게 굴복한 겁니다!”
“이준기 구원자가 왜 적이란 말입니까.”
“제 앞을 막아섰으니 적이죠!”
“미안하지만, 한 회장. 그렇게 말하니 마치 이상덕 같구려.”
“이··· 이상덕이라고요? 설 교수님마저 저를 모욕하시려는 겁니까?”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저도, 눈만 감으면 한평생 해왔던 바보짓이 떠올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져요. 한 회장은 아직 젊잖소? 실수를 만회할 시간도 나보다는 훨씬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서.. 설 교수님!”
한상태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설국헌은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우린 나가보겠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주무세요.”
일어서면서, 장대한도 한마디 보탰다.
“한상태 회장님, 그래도 한국 협회를 이끌어 주실 분은 한 회장님뿐입니다. 기운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