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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0: 트루 컬러즈 (1)
Episode 50: 트루 컬러즈 (1)
한상태의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었다.
놀라움도 노여움도 분명히 거기에 있었으나, 훨씬 더 많은 감정들이 또한 섞여 있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한상태의 머릿속에는 이준기에 관한 생각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구라모토가 분명히 처리했다고 말한 바로 그 이준기.
제일 처음 떠오른 감정은 거짓말을 한 구라모토에 대한 분노.
아직 40도 되지 않은 주제에 영감탱이 말투를 쓰는 그 녀석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바로 이런 걸 예감한 게 틀림없다.
태연히 거짓말을 하다니.
비행기에서 떨어진 시체를 찾았다고, 화장한 시체를 드럼통에 넣어 태평양에 가라앉혔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실종된 이준기를 못 찾은 게 아니라, 이준기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놓친 것이 분명하다.
생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렇게 길고 자세한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
다음은 이준기 본인에 관한 한상태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사라지기 직전, 이준기는 이상덕의 오른팔이었다.
한상태의 적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천 공항 차원문에서 패싸움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그는 분명히 이상덕의 적이었다.
해운대 던전에서 처음 만났던 이준기.
저레벨임에도 불구하고 공격대를 사실상 지휘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던전을 클리어하게 했다.
제대로 키워볼 만한 저레벨이라고, 기특해하던 생각이 난다.
엄청난 속도로 레벨업을 하는 이준기를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다시 만난 것은 11월 와이번 네스트, 그러니까 인천 공항 던전에서였다.
두 달 만에 레벨이 두 배가 되어 20위권에 진입해버린 이준기.
해운대에서 박충기를 대신해서 공격대를 지휘했듯, 이번에는 이상덕을 대신해서 사실상 공격대장 역할을 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기대주가 아니라, 이제는 든든한 동료의 느낌.
그러나 그 느낌은 조금 후에 철저히 파괴되었다.
박충기 일파를 제거하고 그들의 아이템을 노획하려는 이상덕을, 한상태는 가로막았다.
비아냥거리면서, 이상덕은 한상태 네놈 옆에 누가 있냐고 물었다.
한상태에게 떠오른 것은 길수연과 이준기.
구원자의 본분에만 충실하고, 파벌 싸움과는 가장 거리가 먼 둘.
분명히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 믿었다.
의기양양, 한상태는 이상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옆에 정말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이상덕은 여전히 그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되받아쳤다.
“아무도 없잖아?”
그때,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이 한상태는 언덕 위쪽에 나란히 선 둘에게 외쳤다.
“이준기! 길수연! 당신들은 이런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겠지?”
한상태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자기편을 들어 이상덕을 막아서려는 길수연을 제지하는 이준기를.
길수연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이준기.
의문을 표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내젓는 이준기.
‘제기랄.’
바로 그때 속으로 되뇌었던 욕설이 지금 다시 그대로 한상태의 혀끝을 맴돌았다.
‘결국, 이준기에 대한 나의 감정은 분노다. 저놈은 나의 적이다.’
그렇게 정리하고, 한상태는 이준기를 향해 외쳤다.
“이준기, 살아 있었구나.”
*****
한상태를 환영한다는 문구의 종이를 들고 나타난 어디에서 본 듯한 남자.
그의 정체가 이준기라는 걸 알아채고 후지와라의 팔이 저절로 올라가 그를 향했다.
살아 있었다니.
시체는 못 찾았지만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구라모토 회장이 분명히 말했는데.
후지와라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한상태와 이준기가 먼저 대화에 돌입했다.
“그럼요. 아주 잘 살아 있죠.”
“비행기에서 떨어졌다더니, 헛소문이었나 보군.”
“비행기에서 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비행기에서 떨어졌는데 살았다고?”
“총을 쏴대는 통에 구멍이 좀 나기는 했지만,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거든요.”
“구라모토 이 썩을 놈···”
“구라모토 회장이 그러던가요? 내가 죽었다고.”
“네놈 장사를 직접 지냈다고 하더군.”
한상태의 말에 후지와라는 재차 놀랐다.
구라모토 회장이 여러 사람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 이해는 합니다. 구라모토는 제 장사를 지내고 싶겠죠.”
“블라디보스토크라니··· 여기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잘못을 바로잡고 있습니다.”
“잘못? 그게 뭔데? 설마··· 네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비판, 인정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정의가 있는 거겠죠. 저는 자신이 별로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는 합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다고? 네가?”
“왜 그렇게 의아해하시는 거죠? 제가 그렇게 독불장군으로 보였습니까?”
“넌 언제나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냐? 나는 전부 기억하는데? 해운대에서도, 인천 공항에서도.”
“던전 공략쯤이야 연구하고 공부하면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죠.”
“그런데? 다른 건 또 뭐가 다른데?”
“구원자들끼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건 답이 잘 보이지 않아요. 정말, 누군가가 명확하게 답을 내려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흠! 그런 문제라면 답이 더 명확한 거 아닌가?”
“무슨 얘깁니까?”
“내가 살고 봐야 하는 거잖아. 그런 싸움에서야말로 바로 내가 정의인 거지.”
이준기는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과연 그렇군 하는 표정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하지만 남의 싸움에 끼어들 때는 어떻게 하죠?”
“남의 싸움?”
“한상태 탱커님이 여기 러시아 땅에까지 오게 된 것. 남의 싸움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이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한상태 탱커님, 제가 당신에 대해 좋아하던 점이 바로 그거죠. 언제나 자신에 차 있는 모습.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실망했어요.”
이번에는 한상태가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과 썩소를 섞은 표정으로, 한상태는 이준기에게 말했다.
“넌 지금 나에게 실망했는지 몰라도, 난 이미 예전에 너에게 실망했다. 이상덕의 개가 된 그 시점에서 말야.”
“어떻게든 한국 구원자들끼리 싸우는 걸 막아보려고 그랬던 건데, 결국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거죠. 그건 저도 반성합니다. 이상덕을 곁에 두고 천천히 독성을 중화시켜보려고 했는데··· 인정합니다!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걸로 모자라서 뒤통수까지 제대로 맞았죠.”
“네가 못 했던 일, 내가 해냈다. 지금 한국 구원자 계는 나를 중심으로 하나로 똘똘 뭉쳐있으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부정하고 싶은 거냐? 하긴, 네가 못 한 일을 내가 해낸 것이 고깝게 보이기는 하겠지.”
이준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똘똘 뭉친 것과 독재는 다릅니다.”
“뭐? 독재?”
“이상덕이 한상태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없어요.”
“하하하! 부정하고 싶겠지. 개처럼 따르던 이상덕이 사라지고 내가 전국 통일을 이루었으니까! 그러나 이게 현실이다. 내 뒤로 선 이들이 보이지 않는 거냐?”
한상태의 뒤에는 짐을 가지고 빠져나온 한국 구원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손바닥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한상태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통령도 못 했던 일이다! 랭킹 20위권 구원자 전체가 여기에 와 있다! 바로 나, 한상태의 명령에 의해서! 마피아 구원자들에게 고통받는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왔단 말이다!”
“김창수 구원자,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김창수의 이름을 듣고, 한상태의 얼굴에 거만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김창수는 정의로운 미션을 수행하다가 전사했다. 구원자란 원래 그런 직업이다.”
“30레벨도 안 되는 김창수를,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낸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김창수 본인이 자원했다.”
“그래요? 김창수 탱커 본인의 말과는 조금 다르군요.”
이준기의 주장에, 한상태 뒤쪽에 선 한국 구원자들 사이에 작게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한상태는 수습하려는 말을 허둥지둥 꺼냈다.
“무··· 무슨 말이냐! 김창수 본인이 분명히 나에게 자원 의사를 표명했다. 내가 직접 면담했단 말이다!”
“김창수는 프리스타일 길드 소속입니다. 여기에도 같은 길드 소속 분들이 많군요. 한상태 협회장 체제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이준기의 시야에 방혁우, 박희주의 얼굴이 잡혔다.
윤동직은 아직 짐을 찾지 못했는지, 거기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한상태가 버벅거리며 응수했다.
“어··· 어떤 기분이냐니! 이상덕 그놈의 길드 소속이니, 죄책감이 있는 거겠지!”
“박충기, 전용택이 죽고, 문경새재와 신선자 길드가 공중분해 되었을 때, 그래서 이상덕이 황제처럼 굴던 그때, 한상태 회장 당신도 느끼던 그 느낌이겠죠. 익숙한 기억 아닙니까? 아니, 이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벌써 그 기억을 잊은 겁니까?”
한상태는 얼굴이 붉어져서 외쳤다.
“헛소리는 집어치워! 이준기, 너를 체포한다. 한국 길드협회장 직권으로, 한국 구원자 계를 대표하는 내 전권으로 말이다. 너··· 너는···”
“체포한다고요? 혐의는 뭐죠?”
“고··· 공무집행방해, 그리고···”
“한상태 협회장, 당신과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게 제 죄목인가요?”
대답 대신, 한상태는 옆을 돌아보며 외쳤다.
“후지와라, 아니, 김범규 회장! 이준기 저놈을 당장 체포하세요!”
후지와라가 멍하니 한상태를 쳐다보는 동안, 김범규가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이준기를 슬쩍 쳐다보고 나서 한상태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 회장님? 이준기가 살아 있었군요! 그런데 체포··· 라뇨?”
“공무집행방해! 아니, 우리 일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소!”
“네? 제가 보기에는···”
말끝을 흐리는 김범규를 향해, 한상태는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살아 있었다면 당장 돌아왔어야지! 지금까지 숨어지내다가 내 앞에 나타난 저의가 뭐겠소!”
“제가 처음부터 두 분 대화를 듣지는 못해서요··· 이준기 씨 주장도 들어봐야죠.”
“저따위 놈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흥분해서 말을 못 잇는 한상태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준기는 김범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김범규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김범규는 황망히 고개를 숙이려다가 말고 대답했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이준기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 이준기 씨. 안녕하세요.”
“한상태 회장님 말대로, 살아 있다고 정부에 보고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은 아니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정리할 일도 있고 하니까요.”
“지··· 지금은··· 하···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러시아는 마피아 천국입니다. 러시아 구원자라면 거의 대부분 마피아라고 보면 되죠.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하늘이 준 힘을, 약자를 짓밟고 착취하는 데 사용한다니.”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한상태가 외쳤다.
“그래, 바로 그거다! 우리는 러시아 마피아를 정벌하러 온 거야! 그걸 네놈이 방해하겠다면···”
“한상태 회장님, 마치 이상덕을 보는 것 같군요. 이렇게까지 변하시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이상덕이라고? 그런 악인과 나를 비교하다니!”
“이상덕이 협회장이었다면, 지금 이 장면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을까요? 뼛속까지 친일파··· 아니,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니까.”
“뭐라고? 이상덕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하긴, 네놈이 그 매국노의 개 노릇을 할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군. 그래. 그 녀석이 그러던가? 자기가 사실은 일본인이라고?”
“죽기 전에, 그러더군요. 자신의 마음의 고향은 일본이고, 자기 이름은 마츠야마 아키히로라고.”
한국인들은 물론, 후지와라도 놀라움에 표정이 변했다.
마찬가지로 놀라서 눈이 커진 한상태가 대꾸했다.
“주··· 죽었다고? 이상덕이?”
“불과 열흘 전의 일입니다. 바로, 제가 죽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