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06화 (20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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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9: 가면 무도회 (4)

Episode 49: 가면 무도회 (4)

이준기는 두 개의 루트를 동원해서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의 뒤를 캤다.

문아린을 통해 SSF를 이용한 쪽은, 백색 스파이에 가깝게 공개 정보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했고,

바실리사의 극동 마피아 부하를 이용한 쪽은 은행 계좌부터 시작해서 비공개 정보의 수집에 치중했다.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학교 교사 재직 시절부터 금품수수 경력이 있고, ‘솔리대리티’ 길드 관련한 자금 운용에 있어서도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드러났다.

에르미타주 약탈 사건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의 치부.

다시 들춰내는 것은 역시 어렵지 않았다.

에르미타주 약탈 사건.

바로 앞 광장이 불타고, 박물관 건물에까지 총격이 들이닥치는 와중에,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텔레키네시스를 이용해서 그림을 바깥으로 빼냈다.

도둑치고는 너무 대담한 것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사람들은 빗발치는 총알 세례 속에서 대피하기에 바빴다.

미술관 직원들도 도망치는 것은 관람객들과 마찬가지였다.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딱 사흘 동안 그 그림을 ‘소유’했다.

우크라이나-폴란드-리투아니아 3국 연합군이 자체 감사를 실시했는데, 그녀의 숙소에서 그 그림이 나온 것이다.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뻔뻔한 건지, 그녀는 그 그림을 제대로 된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 놓고 감상 중이었다.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지나치게 몰염치한 행동.

아가타의 가증스러운 범죄는 러시아를 침공한 나라들의 국내 여론을 들끓게 했고, 결국 3국 연합을 와해시켰다.

당시,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이득을 본 나라도 손해를 본 나라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거의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소유권 분쟁 중인 영토들은 여전히 분쟁 지역으로 남았고, 소수 민족이 힘들여 일으켜 세운 새로운 독립국가들은 여전히 자주권을 위협받았다.

전 세계가 공통으로 직면해야 했던 새로운 위협, 조슈아 테일러 때문이다.

구원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2등 시민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공언은 모든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렇다고 대결 구도가 구원자 대 일반인이 된 것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조슈아 테일러에 반대하는 구원자들은 이준기와 헬렌 카자크를 중심으로 하는 반 조슈아 연합의 기치 아래로 몰려들었다.

이 부분은 인류라는 동물의 고귀한 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일도 일어났다.

일반인 중에서도 조슈아 테일러의 하수인 노릇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일반인들을 관리하려면 구원자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다.

그 일을 맡아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핍박하는 대가로 조금 더 나은 식사와 숙소를 쟁취하겠다는 꿈을 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치 치하에서 스스로 유대인의 적이 되기를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치 치하의 유대인 카포나 경찰의 얼마 정도가 정의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왔던 유대인 경찰은 러시아군이 들어오자 곧바로 공산당에 가입하여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일반인이 아니고 구원자였기는 하지만,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조슈아의 선언을 누구보다 반겼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슈아 테일러 본인도 그런 사람을 참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 아래 선에서 아가타는 처단당했다.

조슈아의 핵심 간부 중 하나였던, 인도 출신의 크리샤 마무드(Krisha Mahmoud).

그녀는 유럽 지부 명단에서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바르샤바까지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 아가타를 불태워 없앴다.

*****

미겔 산체스를 크림반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시키고 난 후, 총사령관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태도로 제2군 사령관 바이런의 노선을 옹호했다.

각 군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인명피해가 큰 바이런의 제2군에 보충하는 안건이 논의되었다.

제3군 사령관 반 고흐, 제4군 사령관 엘 시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1군 사령관 나폴레옹은 단순히 썩은 표정을 짓는 데 머물지 않고 명시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저는 반대합니다! 제2군에는 한 명도 차출해 줄 수 없어요. 지금 이 전쟁, 바이런이라는 저 사람만 하는 거 아닙니다. 모스크바에서만 전쟁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삿대질이라도 하면서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겨우 침착을 가장해 가면서 조용히 말했다.

“하하, 나폴레옹 사령관. 우리는 하나의 군대입니다. 이건, 총사령관 직권으로 제가 직접 하는 조정입니다. 제2군에 사람이 너무 모자라요.”

“내가 처음부터 지적했던 게 바로 이거 아닙니까? 바이런 저 작자가 병력을 마음껏 불태워버리니 공백이 발생하는 건 당연하죠! 자기가 한 일, 자기가 책임지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왜 저 사람 실수를 메워줘야 하는 겁니까?”

바이런도 마이크를 켰다.

“실수를 메운다고요? 유럽연합군이 러시아에서 이룬 전공의 절반 이상이 제가, 아니 저와 제2군이 이룬 겁니다. 숟가락을 얻는다는 표현이라면 몰라도, 실수를 메운다뇨? 나폴레옹 사령관이 프랑스 사람이라 그런지 영어 표현이 좀 서투른가 봅니다.”

“뭐가 어째요? 내가 분명히 첫날 회의 때부터 지적했죠. 인명피해를 감수하고 돌격만 하다가는 병력이 모자랄 거라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된 거요. 당신 일은 당신이 책임지시오. 당신이 결정을 했으면, 뒷감당도 당연히 당신의 몫이지.”

“바이런 사령관, 당신이 병력이 모자랄 거라는 얘기를 언제 했다는 거요?”

“하하, 본색이 나오시는군. 미안하지만 이 컨퍼런스 콜 기계에는 녹화기능도 있다는 걸 모르시는군? 첫 회의부터 전부 다 동영상으로 기록되어 있단 말이오. 한 번 까볼까?”

“그러시든가. 내가 그딴 말에 쫄 것 같소?”

“비디오를 까고 나서 이야기할까 했는데, 당신 전공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소. 지금까지 죽인 마피아 구원자들이 대개 저레벨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뭐라고?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그런 주장을 하는 거요? 그따위 주장으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다니. 정식으로 책임을 묻겠소. 증거를 내놓든가, 아니면 목을 내놓아야 할 거요.”

“뭐라? 너나 나나 피차 구원자니까 하는 말인데, 그냥 사나이답게 한번 뜨는 건 어떠냐?”

“기다리던 말이다. 날 잡고 결투나 함 해보자. 네놈 면상을 제대로 구겨지게 해줄 테니.”

“하하하! 제정신이 아니군. 나한테 덤비겠다고? 내가 누군지 알면 지금 그 말, 당장 철회하고 싶어질걸?”

“너야말로 꼬랑지 내리지 마라. 내가 너처럼 떨거지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테이블을 탁탁 치는 소리가 울렸다.

나폴레옹과 바이런이 고개를 돌리자, 아가타가 말했다.

“총사령관으로 중재하겠습니다. 우리끼리 싸우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싸우던 둘이 서로 상대방을 탓했다.

“나폴레옹 저 인간이 먼저 도발하는 거 보셨잖습니까.”

“저는 당연한 얘기를 한 것이고,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건 것은 바이런 저 작자죠.”

제3군 사령관 반 고흐가 테이블을 쳤다.

“두 분, 그만하시고요. 총사령관님 말씀을 들어보죠.”

“반 고흐 사령관, 고맙습니다. 총사령관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사이에 분란은 안 됩니다. 우리는 연합군이고, 여기는 적지예요. 두 분이 그렇게 원하시는 결투는, 러시아 원정이 완전히 다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죠. 저희들 전부 증인을 서드리겠습니다.”

나폴레옹과 바이런이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자, 총사령관이 말을 이었다.

“병력 조정은 필요합니다. 모스크바에서 승기를 겨우 잡았는데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어요. 지금 밀어붙여야 합니다. 단, 병력 조정은 철저히 개인 차원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이런의 제2군에 참가해서 모스크바에서 싸우고 싶다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만 이동시킵니다. 내일 아침까지 모든 병사들에게 설문을 돌려주세요. 휴대폰으로 하면 뚝딱이니까.”

*****

3월 3일 목요일, 오후 1시 15분.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

비행기에서 내리는 한상태는 함께 일등석에 탔던 승객과 환담 중이었다.

대화 상대는 일본 측 구원자 후지와라 테츠.

한국 협회장이 직접 제3차 원정대를 이끄는 상황.

일본 측으로서도 어느 정도는 예우를 해야 했다.

그래서 일본 랭킹 20위권의 하이 랭커를 한상태에게 비서역으로 붙여 준 것이다.

쿠사나기 린이 하시바 세이이치로의 비서 역을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

한상태 회장의 뒤를 따라 잰걸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후지와라는 덧니가 훤히 드러나게 크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용기로 오셔도 될 것을, 일행분들과 함께 일반 비행기로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확한 한국어다.

정확한 한국어 발음 때문인지, 한상태는 한국인 비서를 대하듯 편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는 손바닥을 크게 펴고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협회장 자리를 꿰차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스처는 벌써 재벌 회장급이다.

“아닙니다. 전용기라는 거, 생각보다 불편하더라고요. 일등석이 훨씬 좋네요.”

“저도 협회장님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식사도 맛있었고요.”

“한식이 좀 입에 맞으십니까?”

“그럼요. 원래부터 한국 음식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요? 저는 요즘 와쇼쿠(和食)를 배우는 중인데, 알게 될수록 오묘한 식문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후지와라 상은 정말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군요. 어쩌면 저보다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한국어는 도대체 언제 배우신 건지? 혹시··· 친척 중에 한국 분이라도?”

“아닙니다. 대학교 다닐 때 배우게 된 건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게 되네요.”

“후지와라 상이 뒤에서 부르면, 얼떨결에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하게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칭찬하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간단한 입국 심사를 거쳐 다시 합류한 둘은 가방을 찾으러 갔다.

가방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둘은 대화를 계속했다.

한상태가 이야깃거리를 먼저 꺼냈다.

“제가 일본 문화를 조금 공부하는 중인데, 후지와라는 귀족 성씨라던데요.”

“아, 그거요. 그게 예전에는 귀족 성씨였는데,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이 씨라고 다 왕족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요? 전 후지와라 상이 귀족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미나모토니 후지와라니, 원래는 난다긴다하는 귀족 성씨였습니다만, 요즘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에도 시대 중반부터 그냥 아무나 가져다 쓰는 성씨로 알고 있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조선 중반부터 양반이 갑자기 확 늘었으니까요.”

“하하하. 회장님한테 여러 가지 배우네요. 한국과 일본은 정말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연합군을 만들어 외국에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회장님.”

“앗, 저기 저거 제 가방입니다.”

“저··· 저기 노란색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후지와라는 노란색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 올려 카트 위로 올렸다.

그리고 카트를 밀며 종종걸음으로 한상태에게 돌아왔다.

“가시죠, 회장님.”

“후지와라 상은요?”

“저는 이게 전부입니다.”

후지와라는 등에 멘 백팩을 가리켰다.

“가볍게 여행하시니 좋군요. 저도 좀 그래야 하는데···”

“가시죠, 회장님. 나머지 분들은 뒤에서 따로 챙길 겁니다.”

“흠,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출국장의 자동문이 열리자, 마중을 나온 듯한 사람들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지와라가 비서 역으로 따라붙기는 했지만, 당연히 공항에서의 환영도 준비되어 있다.

공항 영접 담당은 2차 원정대의 생존자 중 하나인 쿠로사와 카츠.

그러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당황해서 얼굴이 굳어지는 후지와라 테츠.

몇 안 되는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한글로 쓰인 이름을 발견하고 안도한다.

‘환영합니다. 한상태 회장님.’

그러나 후지와라의 표정은 다시 굳었다.

예상했던 쿠로사와 카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종이를 들고 있다.

모르는 사람인데, 왠지 익숙한 얼굴.

허둥대며 자신이 모시는 상관, 한상태의 표정을 훔쳐보다가 그는 멈칫하고 말았다.

한상태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재벌 회장 흉내가 몸에 뱄는지, 한상태는 손가락을 들어 상대방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기다리다 지친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한상태 탱커님.”

후지와라는 그 얼굴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실종 몇 달째로 여전히 수배 중인 사람이자, 일본 협회의 공적.

이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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