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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9: 가면 무도회 (3)
Episode 49: 가면 무도회 (3)
골목 안쪽에서 부하 십여 명과 함께 미겔 산체스의 공격대를 기다리던 셀레나 하트료신.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고 어수선하게 흩어지는 유럽연합군을 보면서 그녀는 부하에게 물었다.
“뭐야? 별동대야? 네가 준비한 거야?”
“아··· 아닙니다. 제가 무슨 권한으로···”
“뭐야? 광장 건너편에서, 저격도 아니고 도발을 하는 저 여자는 뭐냔 말야?”
“저··· 저도 모르죠.”
“유럽연합군을 공격하고 있잖아! 러시아 편이라고! 모스크바, 아니 예카테린부르크 쪽인가?”
“예카테린부르크는 아니겠죠. 에센바흐 씨에게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쪽도 볼가그라드 쪽에서 꽤 고전 중인 걸로 아는데요. 이쪽에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지원군을 보냈다면 그러기 전에 한참 생색을 냈겠죠. 에센바흐 씨 성격 모르십니까?”
“그래. 세바스찬이라면 생색도 내지 않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줄 위인이 아니지. 하지만 예카테린부르크 쪽이 아니면 어디란 말야? 극동이고 모스크바고 박살이 났잖아!”
“호··· 혹시···”
우물쭈물하는 부하를 보며 셀레나는 역정을 냈다.
“뭐야! 말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
“혹시··· 푸가초프의 잔당 아닐까요?”
“뭐, 푸가초프? 그놈들이 우리 편을 든다고?”
“지금 공격받는 것은, 우리 조국, 러시아니까요.”
“푸가초프한테는 우리가 저들보다 더 원수일 텐데?”
“외··· 외세의 침략이니까요!”
“감동스러운 애국심이군. 내 생각에는 말야···”
“네, 말씀하십시오, 보스.”
“카플론스카야 그 여자가 뭔가 한 거 아닐까?”
“모스크바 경찰청장이 여기까지 신경을 쓴다고요? 모스크바는 연일 불바다라고 들었습니다만.”
“그 여자는 뭔가 할 거야. 그냥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라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는 말야.”
“보··· 보스!”
“뭐야?”
“저놈들··· 이동합니다!”
“뭐?”
광장 건너편 건물 위에 있던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느새 차를 나눠 탄 유럽연합군도 광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셀레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오늘은 공쳤군. 두 블록 뒤에서 여기를 지켜라. 오후 7시가 되면 철수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보스.”
*****
미겔, 바실리사, 그리고 이준기의 계획대로, 3월 1일 에르미타주 차원문 공략은 실패했다.
각 군 사령관들과의 회의를 짧게 끝내고, 총사령관 아가타 하브로프스키는 미겔 산체스를 자기 방으로 호출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다리를 꼬고 앉은 아가타는 들어서는 미겔에게 잔뜩 비꼬는 투로 말했다.
“산체스 씨, 오늘 저에게 아주 큰 모욕을 줬군요?”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공격대원들이 전원 무사 귀환한 것만으로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 코왈스키 말대로, 미겔은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거, 왠지 모르지만 어제 제가 만난 미겔 맞아요? 하루 만에 성격이 확 변한 건가요? 원래 이렇게 비꼬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저도 오늘은 어제와 기분이 상당히 다르군요.”
“이봐요, 산체스 씨! 여긴 군대예요. 당신은 어제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던 것처럼 군인이란 말이야! 군에서는 상명하복이 절대적이고!”
“군인들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군대라면,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떠나겠습니다.”
“이봐요!”
아가타가 커피 테이블을 내리치자, 그녀의 손바닥에 맞은 쟁반에서 찻잔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가타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정면의 미겔을 주시한 채, 떨어지는 찻잔을 쳐다보지도 않고 하나씩 손아귀에 포개 잡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가타는 미겔에게 말했다.
“산체스 씨. 나도 구원자 레벨을 거저먹은 건 아니에요. 방금 그게 뭔지 알기는 해요?”
“흠... 텔레키네시스 아닙니까?”
“하! 조금 알기는 하는군요. 방금 그게 쉬워 보이죠?”
“어렵겠죠.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자유낙하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제가 다 텔레키네시스로 유도한 거예요. 게다가, 컵들을 보지도 않고 조종한 거죠.”
“하하하!”
“뭐··· 뭐죠? 이 무례한 행동은?”
“세상은 넓습니다. 그 정도의 텔레키네시스를 할 줄 아는 구원자는··· 아마 전 세계에 백 명, 아니 천 명은 있지 않을까요?”
“뭐··· 뭐욧!”
아가타는 바닥에 발을 구르며 일어섰다.
요즘 맹연습을 해서 달성한 컨트롤인데, 뭐가 어째?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를 향해, 미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비밀 얘기 하나 해드리죠. 오늘 일은 다 제가 꾸민 계략입니다.”
“뭐··· 뭐라고요?”
*****
놀라서 눈을 치켜뜨는 아가타를 향해, 미겔은 사람 좋은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총사령관님은 물론 다 파악하고 계시겠지만, 복습 차원에서 러시아 상황을 브리핑해보겠습니다.”
“뭐··· 뭐요?”
“진정하고 좀 앉으세요. 총사령관께 부하가 보고를 하겠다는 겁니다.”
아가타는 땀이 나지도 않는 이마를 훔치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분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그녀는 거친 숨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홍차를 들이켰다.
“제기랄! 뜨겁잖아.”
“조심하셔야죠.”
“좋아요, 미겔. 10분, 아니 5분을 허락하죠.”
“그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시작할까요?”
“잠깐··· 난, 시간을 재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가타는 휴대폰에 스톱워치를 작동시켰다.
“시작하세요.”
“감사합니다. 우선,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보스는 셀레나 하트료신이고, 구원자 규모는···”
“기본적인 건 생략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점은 말하고 지나가야겠습니다. 모스크바나 블라디보스토크와는 달리,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는 아직도 전력이 팔팔하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당연히 잘 아시겠죠. 제1군 사령관 나폴레옹의 지지부진한 작전을 지금까지 참아오신 이유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전력이 모스크바나 다른 지역 마피아에 비해 강하다는 걸 감안하신 거겠죠.”
아가타는 콧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흥! 당연한 것 아닌가요? 하지만···”
“하지만, 나폴레옹 사령관의 무능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맞습니까?”
“맞아요.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물어봐도 제대로 설명도 못 하는 걸 보면, 아마 생각이 없는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죄송하게도 총사령관님은 전쟁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 한 가지를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뭐죠?”
“첩보전 말입니다.”
아가타는 나름 공식적인 대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의문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응?”
“첩보, 정보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전쟁의 일부였습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손자병법··· 고리타분한 말은 집어치우고 본론을 말해봐요. 내가, 첩보전을 망각하고 있다고?”
“나폴레옹 사령관이 구체적인 작전 내용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말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 내가 그 정보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까 봐?”
“뭐···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겠군요.”
“이봐, 산체스 씨. 내 부하들 중에 스파이라도 있다는 거예요?”
“화만 내실 일이 아닙니다. 이걸 좀 보시죠.”
미겔이 내민 휴대폰 화면을 보고, 아가타는 즉각 대꾸했다.
“이게 뭐?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 보스 셀레나 하트료신이잖아요?”
“하하. 역시 총사령관님은 빠삭하십니다. 그런데 날짜를 좀 보시죠.”
“2020년 3월··· 1일? 오늘?”
“제가 나갔던 곳, 바로 그곳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매복에 걸릴 뻔했던 거죠.”
가면을 쓴 아가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미겔을 향해 말했다.
“이 사진, 누가, 어떻게 찍은 거예요? 어떻게 알고?”
*****
서열 5위, 마리아 보로닌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던 극동 마피아.
이준기 일행에 의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어느 정도의 조직은 남아 있다.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러시아 마피아 4인방은 서로의 조직에 첩자를 심어왔고, 그것은 극동 마피아 보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도 마찬가지였다.
첩자 관리 역시 극동 마피아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예브게니 오블론스키의 일 중 하나였고, 그가 그 정보를 차기 보스 마리아 보로닌에게 넘긴 것은 당연지사.
새로운 보스이기도 하지만, 마리아는 사실 예브게니의 숨겨진 딸이 아니었던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마리아 보로닌은 연해주를 침략한 야쿠자의 제1차 원정대를 막다가 중상을 입고 재기불능의 몸이 되었다.
의식도 없는 딸을 병원에 놔두고 야쿠자의 포로가 되어야 했던 예브게니.
한일 연합군의 블라디보스토크 아지트를 급습한 이준기 일행에 의해 구출되어 경찰에 넘겨지면서, 예브게니는 딸을 안전한 곳으로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도저히 병원으로는 보이지 않는 허름한 빌딩에서 마리아 보로닌을 찾은 이준기 일행.
너무 늦었지만, 참회하는 마음으로 마리아는 자신의 조직을 바실리사 엘리셰프에게 넘겼다.
아브람의 마수에서 푸가초프라는 조직을 건져낸 바실리사.
이제는 극동 마피아의 남은 조직까지도 넘겨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현재 점조직 푸가초프의 평 조직원 바실리사 엘리셰프임과 동시에, 극동 마피아 잔당의 보스 마리아 보로닌이기도 하다.
셀레나 하트료신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 내에, 극동 마피아 첩자는 온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실리사는 그를 통해 얻어낸 정보를 미겔에게 전달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첩자가 유럽연합군 내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총사령관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본진에.
이제는 이준기의 동료임은 물론, 푸가초프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미겔 산체스.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 수상쩍은 인물이라는 의심은 조금씩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매복을 어떻게 알았냐는 아가타의 질문에, 미겔은 꾸며낸 답변을 내놓았다.
“전, 대단히 조심하는 성격이라서요.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 사령관과 비슷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냥 조심해서 잘 찾아봤더니 매복이 있었다는 거예요?”
“위성 사진, 드론, 그리고 무엇보다 인력이 필요하죠. 구체적인 걸 총사령관님 같은 높으신 분이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산체스 씨가 별도로 부리는 인력이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까?”
“이래 봬도 바스크 독립연맹(Independent Basque League, IBL) 제2인잡니다. 저한테 그 정도 조직은 있습니다.”
아가타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정색을 하면서 미겔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셀레나 하트료신이 그 자리에 올 걸 알았다면, 아니, 몰랐더라도 그 여자를 그 자리에서 발견했다면, 당장 죽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셀레나 하트료신을요? 그 여자는 저보다도, 총사령관님보다도 레벨이 높을 텐데 무작정 덤비라고요? 게다가 부하들도 치렁치렁 달고 나왔겠죠.”
“겨우 그 정도가 미겔 산체스 씨가 할 말이라는 거예요? 어제는 그냥 겸손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겔 산체스 씨의 명성에는 거품이 좀 많이 낀 모양입니다!”
“하하.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냥 보통 구원자에 불과합니다. 과대평가는 사양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처신할 건가요? 강자를 만나면 그냥 피해 다니는 식으로?”
미겔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대꾸했다.
“총사령관님, 오늘의 교훈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목소리가 너무 크신 것 아니에요?”
“그··· 그게···!”
“어디 조용한 곳에 가셔서 얘기 나누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각 군 사령관들과 일일 회의는 그대로 하시더라도, 저와 하는 회의는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하시죠.”
“봐둔 곳이라도 있나요?”
“총사령관님이 창밖으로 매일 쳐다보시는 그곳, 어떻습니까?”
아가타의 얼굴에 나타난 기괴한 표정은 가면을 뚫고 나와 미겔에게 전달되었다.
“어··· 어디를?”
“에르미타주요. 렘브란트라도 보면서 얘기하시죠.”
“공공장소에서 말예요?”
“원래 그런 데가 더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