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49: 가면 무도회 (2)
Episode 49: 가면 무도회 (2)
3월 1일 화요일, 오전 10시 50분.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애정해 마지않는 그림, <탕아의 귀환> 앞에 서 있었다.
러시아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때문인지, 미술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평소보다 적을 뿐이다.
인간의 적응력은 놀랍기만 하다.
총격전이 매일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생활은 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서 그런지, 그 ‘생활’이라는 것에는 미술관 관람도 포함되는 모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미술관을 들르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 중인 나라로 관광을 와서 미술관에 들르는 사람들은 또 뭔가.
취소 수수료가 아까워서 그랬는지, 모처럼 얻어낸 휴가를 포기하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그들은 계획한 여행을 결국 강행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른 김에 에르미타주에 들렀다.
외국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림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림이 생각보다 크군요. 러시아에 있는 렘브란트 그림이라길래 뉴욕에서 보던 식으로 초상화 크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게요. 렘브란트가 왜 러시아 미술관에서 대표 그림으로 행세하나 의아했는데, 보니까 조금 납득이 됩니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그러세요. <야경> 못 보셨나 봐요? 그건 이 그림의 열 배는 될 텐데?”
“여기가 암스테르담입니까? 그리고, 렘브란트의 <탕아의 귀환>은 여기 이 그림뿐이잖아요?”
조금 뒤쪽에서 그림을 넌지시 바라보면서, 아가타는 속으로 관광객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 그림이 좀 크기는 하지. 그래도 액자에서 꺼내서 둘둘 말면 되니까 걱정은 말라고. 무식한 놈들이 그림 앞에서 침을 튀겨가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군. 내 그림에 침 묻힐 생각 말고 빨리 꺼져.’
유럽인뿐 아니라,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들도 떼 지어 그림 앞을 지나갔다.
잠시 멈춰 서서 보는 사람들도 있고, 걸어가면서 휙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실히 이 그림 앞에는 유동인구가 넘쳐났다.
에르미타주가 대표작으로 내세우는 그림이니 그럴 것이다.
이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유명하다니까 우선 여기부터 와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소를 넘어 경멸의 기운이 그녀의 눈빛에 섞여들었다.
미술관 안내인이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아마도 그 눈빛을 보고 뭔가 수상쩍어서 그런 게 아닐까.
“안녕하십니까, 부인. 이 그림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아가타는 수염이 덥수룩한 초로의 안내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하고 재빨리 시선을 거둬들였다.
가면을 쓰고 상대방을 훑어보던 버릇이 엉겁결에 나온 것이다.
현재 그녀는 유럽연합군 총사령관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아니다.
그림 애호가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일 뿐이다.
조금 전의 무례를 수습하려고, 아가타는 조신한 숙녀의 목소리를 최대한 흉내 내서 말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말을 거셔서 놀랐어요.”
안내인은 모자를 들어 보이며 다시 인사했다.
“놀라게 해드렸다니 제가 죄송합니다, 부인. 이 그림을 한참 동안 보고 계시길래, 뭐 도와드릴 것은 없나 여쭤본 겁니다. 이 그림은 저도 아주 좋아하거든요.”
이 그림을 좋아한다니, 고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아가타는 매너 있는 관람객 흉내를 계속해야 했다.
“그러시군요! 저는 렘브란트의 모든 그림들 중에서 바로 이 그림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하하. 저도 그렇기는 합니다만, 부인 취향은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군요? 보통 렘브란트라고 하면, <야경>이나 <자화상> 시리즈들 중에 한둘, 그것도 아니면 <유대인 신부> 정도가 제일 유명하잖아요?”
어디서 아는 척이냐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아가타는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착한 사람 코스프레가 필요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술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이가 감히 설교를 하려고 드는 판국이다.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말을 받았다.
“<유대인 신부>는 반 고흐가 절찬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잖아요? 제가 그림 보는 눈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그 그림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모르겠어요. 이 그림을 2주 동안 볼 수 있다면, 내 인생에서 10년 정도는 떼어 줘도 좋다···. 그렇게 반 고흐가 말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안내인은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좋은 지적이십니다, 부인. 하지만 저는 <유대인 신부>도 좋아합니다. 렘브란트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은 빛의 처리를 중점적으로 보죠. 빛의 화가라는 별명도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 신부>도 빛의 처리가 정말 뛰어나죠. 남편의 웃옷 팔 부분이라든가, 아내의 붉은 색 드레스 부분을 보면···”
지금 앞에 있지도 않은 그림에 대해 디테일을 들이대며 이야기하는 안내인에게, 아가타는 조금 기가 죽었다.
하지만 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기운을 차린 아가타는 곧바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빛의 처리라고 한다면 <야경>이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요? 게다가 <유대인 신부>의 빛 처리는, 제가 보기에는 전형적인 렘브란트하고는 조금 달라요. 오히려 페르메이르(Vermeer) 같은 느낌이죠. 그냥 제 느낌이기는 합니다만···”
“하하. 정말 박식하시군요. 렘브란트의 빛 처리가 정말 영롱하기는 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려던 것은 다른 겁니다. 저는 <유대인 신부>에 나오는 남편의 표정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건, 어디 보자··· 여길 좀 보십시오!”
안내인의 손가락은 <탕아의 귀환>의 그림 중간쯤, 아버지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가타가 그의 손을 따라 그림을 바라보자, 안내인은 말을 이었다.
“저 아버지의 표정을 보십시오. 그렇게 말썽만 부리다가 집을 나간 아들입니다. 그런데 저 표정을 보세요.”
그것 또한 뻔한 얘기잖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가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죠.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 무한한 사랑.”
안내인은 그렇게 말하는 아가타의 얼굴을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대인 신부>에서 신부를 바라보는 남편의 표정도 같습니다. 제가 아까 부인께 말을 걸었던 이유도 그겁니다. 그림을 바라보시는 부인의 표정이, 정말 아끼는 대상을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었거든요. 정말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어떤 것을 바라보는···”
아가타는 뜨끔했다.
그 많은 날 중에 하필 오늘 여기에 온 이유를, 이 늙은이가 눈치챈 것인가?
아가타는 조신하게 웃으면서 안내인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소유하고 싶다든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당치도 않죠. 인류 전체의 유산인걸요.”
“물론입니다. 인류 전체의 유산입니다. 소중하게 간수해야죠.”
“소중하게 간수한다··· 말씀 나온 김에 묻고 싶네요. 이렇게나 유명한 그림을 왜 이렇게 두는 거죠?”
“무슨 말씀이신지?”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방탄유리로 뒤덮는 것은 조금 지나치겠지만, 그래도 좀 더 잘 보관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어떻게 말입니까?”
“무장 경비라도 세워야 하는 건 아닌가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아가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이후에는 이미 늦은 일이겠지만 말이지.’
“흠··· 흠!”
안내인의 헛기침 소리에, 아가타는 그를 쳐다보았다.
허리춤에서 꺼낸 물건을 그는 아가타를 향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런 권총이면, 무장한 경비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아가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겁주는 거야? 젠장. 이 늙은이도 죽여야 하잖아.’
미겔과 그의 수하들이 이곳 광장 차원문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는 시점이 이제 곧이다.
왜 11시 이후로 해야 하냐는 미겔의 질문에, 아가타는 그냥 정한 시간이라고 둘러댔다.
‘왜긴 왜야. 에르미타주 개장 시간이 10시 30분이니까 그렇지. 네놈들이 소동을 피우기 시작할 때, 나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11시 이후 언제가 좋겠냐고 하는 미겔에게, 아가타는 그럼 11시 정각으로 하라고 못 박았다.
“그럼 그냥 처음부터 11시 정각에 공격 개시하라고 명령하시면 되는 일 아니었습니까.”
“전 미겔 산체스 씨의 의견도 들어보고, 논의하려는 차원에서 얘기를 꺼낸 겁니다.”
“전 군인입니다. 총사령관 명령에는 복종합니다.”
“언제라도 스페인으로 돌아가겠다고 협박하실 때는 또 언제고?”
“아무리 총사령관님 명령이라도,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할 수 없죠.”
“알았어요, 알았어. 또 논쟁을 시작하면 잠도 못 자게 생겼으니, 내일 11시 정각에 정확하게 작전 개시해 줘요.”
그렇게 말하고 미겔 산체스와의 입씨름을 끝냈던 것이 어제의 일이다.
고레벨 구원자를 수족처럼 부리게 되어서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듣던 대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을 줄이야.
아무 생각 없이 다 퍼줄 것처럼 생긴 인상과는 전혀 딴판의 성격이다.
아가타는 손목 소매를 걷고 시계를 흘끗 보았다.
11시 정각을 넘겨 초침이 숫자 6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깥에서 총성이 울렸다.
고대하던 그 순간이 왔다.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고 아가타는 썩소를 지었다.
‘시작된 건가. 미겔 산체스, 역시 제법이군. 바깥에서 최대한 소동을 피우라고. 나는 혼란을 틈타 이 그림을 가지고 나갈 테니 말이야.’
*****
같은 날, 오전 11시.
총사령관의 요구 시각에 맞추어, 미겔과 공격대원들은 에르미타주 광장 앞에 나타났다.
붉은색 오픈카에서 내린 미겔 산체스는 경치를 훑어보는 것처럼 광장을 빙 둘러보았다.
구원자의 시력이라면 뭔가 보일 수도 있다고 기대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겠지.
아브람 쉬넨코와 칭퉁 야우라는 강적들을 손쉽게 제압했던 이준기와 그의 동료들.
그들의 작전에 빈틈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겔은 차에서 내리는 공격대원들을 지켜보았다.
미겔의 붉은색 오픈카를 뒤따라온 승합차 두 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사람들이 내리고 승합차 문이 닫히자마자, 총격 음이 광장을 가로질렀다.
광장 건너편 건물에서 총알 몇 발이 날아온 것이다.
“뭐, 뭐야!”
“기습이다! 저격이야!”
한 명이 다리를 맞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가벼운 부상.
미겔의 공격대원들은 차량 밑으로, 근처 건물의 벽 뒤로 숨었다.
총알이 날아온 건너편의 건물 옥상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거리지만, 구원자들의 눈에는 저격수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손수건 마스크로 입을 가린, 짧은 금발의 여전사.
그녀가 소총을 한 손에 들고 흔들며 그들을 도발하고 있었다.
“저런 미친!”
건물 벽 뒤로 숨은 부하 하나가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정말, 괜찮을까?’
미겔은 그대로 놔둬도 정말 괜찮은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바실리사가 신신당부했던 일이다.
부하가 손가락을 당기고 총성이 울려 퍼지자, 미겔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하하!”
바실리사의 음악 같은 웃음소리가 광장을 가로질러 미겔의 귀에까지 도달했다.
다른 공격대원들도 망연자실, 광장 건너편 건물 옥상을 바라보았다.
바실리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금 전의 자세로 서 있었다.
‘저것이··· 포켓 유니버스!’
공격을 자동으로 방어한다는 바실리사의 성흔, ‘포켓 유니버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험지에 바실리사를 파견하는 결정을 하는 데 있어, 이준기가 가장 믿은 요소는 바로 이 성흔이었다.
말로는 설명을 들었지만, 처음으로 직접 목격한 광경은 미겔에게도 놀라웠다.
어찌 된 연유인지 모르는 공격대원들은 놀라서 외쳤다.
“뭐야, 총알이 사라졌잖아!”
“투명한 뭔가에 부딪쳐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어!”
“마르셀! 제대로 쏜 거 맞아?”
“저 여자 머리로 총알이 날아가는 걸 다들 똑똑히 봤잖아!”
포켓 유니버스의 발동을 목격할 기회를 놓쳤다.
눈을 감지 말고 똑똑히 봐둘 걸 그랬다고 미겔은 후회했다.
아무튼, 바실리사와 약속한 다음 단계를 진행해야 한다.
미겔은 아랫배에서부터 끌어올린 우렁찬 목소리로 공격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저 여자를 추적한다! 저격수를 밖에 놔둔 채로 차원문에 진입할 수는 없어!”
아가타의 직속 부하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미겔! 총사령관의 명령은 오늘 중으로 차원문을 정리···”
“현장 지휘는 내 권한이야! 지금은 일단 저 여자를 추격한다!”
미겔은 성격에 맞지 않게 거칠게 외쳤다.
건물 옥상에서 사라지는 바실리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격대원들은 차례로 승합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