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03화 (20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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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9: 가면 무도회 (1)

Episode 49: 가면 무도회 (1)

휴대폰에 찍힌 문자를 보고 미겔은 눈을 의심했다.

오늘 날짜와 조합한 코드, 그리고 발신 번호.

예전에 이준기와 연락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방식이었다.

미겔은 발신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발신음이 세 차례 지나가고, 네 번째 울리는 도중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당시 약속했던 연락 방법이다.

“여보세요.”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여자였다.

“여보세요. 전화 거신 분은 혹시···”

“미겔 산체스 님.”

“바실리사 엘리셰프 님?”

“네.”

“무슨 일로 전화를 하신 거죠?”

“혹시나 해서 전화를 드렸는데, 정말로 러시아에 계실 줄이야. 설마 이 전화번호를 스페인에서 사용 중이신 건 아니죠?”

“러시아에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어요.”

“아하하! 역시 미겔 님은 재미있어요.”

귀여운 웃음소리가 들리자, 미겔은 머릿속에 바실리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겔이 머뭇거리는 사이, 바실리사가 말을 이었다.

“묻지 않은 것까지 다 대답해 주시고··· 하하.”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준기 씨가 이 번호로 연락을 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연락이 되다니, 놀랐어요.”

“엘리셰프 씨는 지금 어디에 계신 겁니까?”

“바실리사라고 불러주세요. 안 본 지 좀 되니까 이름으로 부르기가 민망하신가 봐요?”

“아, 네. 바실리사.”

“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어요. 미겔 님이 먼저 위치를 말하셨으니, 저도 화답해야죠. 준기 씨가 미겔 님은 100% 믿을 수 있다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조심은 해야 해서요. 어쨌든, 저도 지금 목숨을 걸고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니까요.”

“역시··· 바실리사는 지금 유럽연합군에 대항하는 쪽에 서 계신 거군요.”

“러시아 민중은 마피아도 원하지 않지만, 외세의 침략 역시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푸가초프의 잔당이니까, 더욱 그렇게 생각하겠죠?”

“네··· 이해합니다.”

“미겔 님이 유럽연합군 소속이라면, 현재 우리는 서로 적인 거죠. 하지만···”

“저··· 저는 바실리사나 준기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원하신다면, 당장 스페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원하지 않으셔도 그렇게 해야겠네요.”

“아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쩌면 우리는 같은 적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부터 제가 할 얘기는 사실 제 얘기가 아니고 준기 씨 분석이에요. 맞으면 맞다고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첫째, 지금 유럽연합군의 주도 세력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겠죠?”

“네, 맞아요.”

“사실 그 정도는 저도 유추할 수 있어요. 그다음 질문부터가 진짜죠.”

“네, 질문하세요.”

“유럽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여자입니다. 맞나요?”

“네··· 그걸 어떻게 아셨죠?”

“사실, 이름도 맞출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군요.”

“총사령관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준기 씨 말은, 소거법이라고 하더군요. 유럽 전체의 고레벨 구원자들 명단을 뽑아서, 한 명씩 제거하면서 추리했다고. 믿기 어렵지만, 준기 씨는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 그건 정말···”

“믿기 어렵죠?”

“하지만 준기 씨라면 그럴 것도 같군요.”

“하하. 저도 이제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하나씩 설명하게 하는 것도 미안해서요.”

“그래서··· 저에게 연락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총사령관의 뒷조사를 해주세요. 준기 씨 말에 따르면, 미겔 님 정도의 고레벨 구원자라면, 총사령관이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올 거라고 하더군요.”

“뒤··· 뒷조사를요?”

“총사령관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 민중의 구원 같은 게 아녜요.”

“총사령관은 폴란드인입니다. 러시아에 대한 증오가 진짜 동기겠죠.”

“그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그 이상의 목적이 있어요. 총사령관은 사실 아주 잇속에 밝은 사람이거든요.”

“네?”

*****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대부, 아니 대모는 셀레나 하트료신이다.

러시아 마피아 4인방 중 홍일점으로, 아브람 쉬넨코가 사망한 현재 시점에서 러시아 최고레벨 구원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 중인 유럽연합군 제1군이 고전 중인 이유는 나폴레옹의 신중한 작전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완강한 저항이 더 큰 이유였다.

이준기 일행에 의해 파산 직전까지 간 모스크바 마피아와는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는 아직 건재하다.

아브람 쉬넨코와 마찬가지로 셀레나 하트료신 역시 첩보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라이벌 마피아인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예카테린부르크에 첩자를 심은 것은 기본이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같은 구소련 국가는 물론, 폴란드와 독일에까지 첩자를 심어 놓고 있었다.

자신의 길드, ‘솔리대리티’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마피아의 끄나풀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러시아 원정에까지 따라와, 총사령관과 같은 호텔에 묵는 중인 그 끄나풀이 셀레나 하트료신에게 일일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100%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내일 공략 지점은 에르미타주 광장 차원문이 거의 확실합니다.”

“근거는?”

“총사령관이 제4군에서 고레벨 구원자를 직접 데리고 왔어요. 직속 부하들로 공격대를 만들어 투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거는?”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게 에르미타주 광장 차원문입니다. 저도 총사령관 방에 몇 번 가봤지만, 그 여자는 언제나 그걸 쳐다보고 있더군요.”

“그래?”

“에르미타주를 바라보는 건지, 차원문을 바라보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갖고 싶은 보석이라도 바라보는 그런 눈을 하고요.”

“그 정도로는 근거가 부족한데?”

“그 차원문을 직접 거론한 것도 여러 번이에요. 그거 하나 빨리 정리하지 못하냐고. 마음 놓고 에르미타주 구경도 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거기에 렘브란트가 있다면서요?”

“렘브란트? 그게 뭔데?”

“화가 이름입니다. 그 사람의 아주 유명한 그림이 에르미타주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총사령관이라는 여자가 에르미타주에서 그 그림을 도둑질이라도 해가려고 한다는 거야?”

“말하는 투가, 영··· 그렇게 들려서요.”

“미친년이군. 정신 상태를 고쳐줘야겠어.”

“어쩌면 말입니다. 내일 그곳에 직접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호텔 방에서 연습하는 걸 봐서요.”

“뭘 연습해?”

“벽에 붙은 액자를 텔레키네시스로 떼어내 움직이는 걸 매일 연습합니다.”

“뭐?”

“그냥 제가 소설 한번 써보자면, 화염구 같은 걸로 입구에 경보 장치 부순 다음에, 그림을 벽에서 떼어 차에 싣고 나오려는 것 아닐까요?”

“하하하! 그게 말이 돼? 웬 여자가 박물관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해 손짓을 하면서 염력을 쓰는 게 보이는데, 아무리 경보 장치가 부서져도 그걸 가만히 두고 보겠어?”

“총사령관 그 여자가 연습하는 게 그 부분입니다. 움직이는 대상을 쳐다보지 않고, 손도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물건을 움직이는 거죠.”

“그으래? 내가 그쪽 스킬 트리가 아니어서 모르는 거지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지?”

“직접 봤습니다. 그 여자가 으스대는 걸 좋아해서요. 지금 같은 호텔에 묵는 유럽연합 구원자들은 전부 한 번씩은 봤을 겁니다.”

“재미있는 얘기군. 좋아. 내일 에르미타주에 병력을 배치한다.”

“병력은 좀 넉넉히 보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 그래야 하지?”

“제4군에서 데리고 온 그 고레벨 구원자 말입니다. 이름이 미겔 산체스거든요.”

“미겔··· 산체스? 아브람을 죽였다는 그놈이란 얘기야?”

“가면도 쓰지 않고 호텔 복도를 돌아다니는데, 모른 척 하려고 해도 그럴 수도 없습니다. 미겔 산체스는 유명인사 아닙니까. 스페인 정부에서 인터폴에 수배를 요청한 바람에 전 세계에 사진이 돌아다니는데.”

“흠. 재미있군. 내일 에르미타주에는 내가 직접 간다.”

*****

“세상이 끝장나는 걸 보여주지.”

천사 같은 미소를 짓던 조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손아귀를 웅크려 주먹을 쥐자,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지듯 금문교가 끊어졌다.

굉음을 내며, 그 거대한 구조체가 바닷속으로 추락한다.

“헉!”

땀을 흘리며 이준기는 잠에서 깼다.

새벽 5시.

한 시간은 더 자야 하는데, 일찍 일어나버렸다.

이준기는 휴대폰을 꺼내 유명한 구원자 팬 사이트에 접속했다.

가장 정확하고 빠른 정보를 자랑하는 곳.

첫 페이지에는 헬렌 카자크와 조슈아 테일러의 모습이 나와 있다.

- 현재 세계 랭킹 1위. 헬렌 카자크. 영국. 52레벨.

- 랭킹 4위 (추정). 조슈아 테일러. 미국. 49레벨.

미묘하게 조슈아의 레벨이 낮다.

원래대로라면, 3월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조슈아는 50레벨을 달았어야 한다.

3월 1일.

세계에서 가장 시간이 이른 축에 속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벽 5시다.

시간이 가장 뒤늦은 쪽에 속하는 캘리포니아라면, 아직 2월 28일이다.

이 사이트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정보 수집이 늦는 걸 수도.

하바롭스크의 차원문, 그리고 야쿠자 구원자들을 정리하고 이준기는 50레벨이 되었다.

아직까지 실종 상태로 되어 있는 그가 랭킹에서 빠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

조슈아 테일러가 아직 49레벨이라면, 이준기는 드디어 그를 앞선 것이다.

지난번 역사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준기와 조슈아의 레벨 역전.

그러나 마음속에는 초조함이 자라나고 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조슈아의 부하들 수십 명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이준기의 팀 6명과 조슈아 단 한 사람의 대결이었다.

조슈아의 하수인들은 단지 학살극을 관람하기 위해 그의 결계에 들어와 있었던 것뿐이다.

89레벨.

이준기가 확인했던 조슈아 테일러의 최종 레벨.

컨트롤도, 템빨도, 조직력에서도 밀렸지만, 아마도 가장 크게 밀린 영역은 레벨 아니었을까.

이준기와 다른 세 명이 80레벨, 헬렌 카자크는 79레벨이었으며, 키라트 싱은 75레벨에 불과했다.

그래서 레벨업에 신경 썼다.

팀워크를 해치지 않는 선이라면, 남들에게 뭘 양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레벨업과 팀 빌딩, 딱 두 가지를 보고 위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레벨업은 나쁘지 않은 흐름이다.

이미 많이 올라왔고, 앞으로도 조슈아 테일러에게 크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너무 시선을 끌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을 하고 있었지만,

각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세상이 혼란이 빠지면 그런 시선을 걱정할 이유도 더는 없다.

더욱 레벨업에 매진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팀은 어떤가?

조슈아에 대항해서 싸워줄 동료들을, 그는 충분히 확보했는가?

길수연, 그녀는 이번에도 곁에 서줄 것이다.

미겔 산체스 역시, 조슈아 테일러의 야욕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불의에 눈 감는 헬렌 카자크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잠깐 스쳐 가는 정도로만 만났지만, 린핑 루 역시 이준기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수많은 중국 공산당 소속 구원자들이 조슈아의 사단으로 몰려들 때, 유일하게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던 사람이다.

키라트 싱.

아직까지 만나지 못한 ‘최후의 6인’ 중 하나.

중국과 인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크게 성장할 인물이고, 아직은 주목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

역시, 합류해 줄 것이다.

다음은, 이전과 다른 경로로 동료가 된 사람들.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처음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실력이 성장했다.

현시점에서라면, 미겔 산체스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도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다.

이준기가 가는 길이라면 지옥까지도 따라올 기세이니, 신뢰 문제도 전혀 없다.

바실리사 엘리셰프.

포켓 유니버스의 소유자.

이준기의 기억 속에서는 조슈아 테일러의 편에 섰던 중국인 구원자, 스티브 챈이 가졌던 성흔.

성흔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심성도 실력도 모자랄 데가 없다.

20레벨에 성흔이 개방되고 나서 스킬 트리가 꼬이기는 했지만, 딜러이자 보조 탱커로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해줄 것이다.

같은 레벨에서라면, 길수연이나 헬렌 카자크와 비교해도 실력이 꿀리지 않을 것이다.

김창수.

아예 기억에 없는 세르게이나 바실리사와는 달리, 김창수는 그가 기억하는 사람이다.

일본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죽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실력은 분명히 뒤떨어진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동료라는 호칭을 매기려면, 실력보다 신뢰가 더 필요한 것이다.

문아린.

어쩌면 세르게이, 바실리사보다 더 값진 뜻밖의 발견이다.

해운대 던전 희생자 목록에서 보았던 이름만 기억했지만, 이번에 그녀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해운대 던전은 물론, 종각 던전까지 살아나오면서 한국 구원자 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이상덕의 계략으로 이준기가 실종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SSF 활동을 시작하고 러시아에서 이준기와 재회한 이후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 활약해 주고 있다.

바실리사나 길수연에 비하면 컨트롤이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최상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쿠사나기 린, 그리고 쿠로사와 카츠.

아직은 동료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실력 하나만을 보고 하시바 세이이치로에게 충성을 다했던 쿠사나기라면, 이준기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쿠로사와 카츠는 다르다.

공포에 의한 지배는 부하를 만들지언정 절대로 동료를 만들지 못한다.

실력은 둘 다 나쁘지 않은 정도.

김창수급으로, 2선에서 활약하는 정도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김창수, 문아린, 그리고 세르게이의 3인 공격대는 오늘 차원문 공략이 예정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바실리사와 미겔이 다시 만나게 된다.

이준기는 마피아 잔당 정리와 정보 수집으로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남은 고민은 꿈속에서 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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