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96화 (19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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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7: 압도적인 힘 (5)

Episode 47: 압도적인 힘 (5)

분명히 병원이라는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입원실을 갖추었다고는 볼 수 없는 행색의 빌딩.

낡은 5층 빌딩의 구석에, 병상 여덟 개를 갖춘 병원이 정말로 있었다.

도대체 이런 병원을 왜 골랐나 싶었지만, 비밀 유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명을 쓰는 것은, 위조 기술자를 휘하에 두고 있는 예브게니에게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그것도 깐깐한 병원이라면 발각될 수 있는 일이다.

야쿠자가 돈과 인력을 동원해서 찾으려고 할 경우를 생각해도, 이런 허름한 병원이 낫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나스타샤 레온스키? 그 환자 보호자시라고요? 정말 때마침 잘 오셨어요.”

“네?”

“그 환자 보호자가 연락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이었다고요. 그래도 병원인데, 환자를 길거리로 쫓아낼 수도 없고.”

“무슨 말씀인지···”

“병원비가 산처럼 밀렸어요! 오신 김에 수납 좀 해주세요.”

세르게이가 품속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고액권을 보고 잠깐 놀랐지만, 병원 직원은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돈을 세고 있었다.

“환자 상태는 괜찮은가요?”

“그럼요. 처음에는 정말 위험했지만··· 이제는 안정된 상태예요. 그래도 중환자입니다. 조심해주세요.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해요. 한 6개월 정도 지나면 퇴원도 고려해 보시죠. 너무 늦기 전에 재활도 시작해야 할 거예요.”

허름하기는 해도 1인실이었다.

마리아는 위쪽을 들어올린 침대에 기댄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이 자기가 예상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예브게니와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군.’

마리아는 차분히 책을 덮고 물었다.

“누구시죠?”

“마리아.”

“네?”

*****

세르게이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예브게니에 관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지던 마피아 대 야쿠자의 항쟁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질문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마리아는 세르게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무안해져서, 세르게이가 먼저 물었다.

“왜 그러시죠?”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맞나요?”

“절 아세요?”

“맞군요.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인상이 조금 다르군요. 실물이 훨씬 부드러워 보여요. 사진은 정말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그건 바실리사도 느끼고 있었다.

푸가초프의 정보망에서 봤던 세르게이의 사진과 지금의 세르게이는 인상이 많이 다르다.

겨우 두 달이었지만, 이준기와 함께한 시간이 그의 인상을 변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절··· 알고 계셨군요.”

“그럼요. 사할린 쪽에 나가 있기는 해도, 극동 마피아 유망주셨잖아요. 이제는 아니겠지만.”

“네? 무슨 말씀이신지···”

“마피아··· 그만두셨군요. 잘하셨어요.”

“그··· 그걸 어떻게···”

“눈빛만 봐도 알겠어요. 그게 어딜 봐서 마피아 조직원의 눈이에요?”

“그렇다면···”

“왜 세르게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냐는 질문이겠죠?”

“그렇습니다···”

“저도 이제는··· 극동 마피아가 아니니까요.”

“네?”

“이 몸으로 뭘 하겠어요··· 그래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동정도 필요 없어요. 죗값을 치른 거죠. 범죄자의 삶을 살았던··· 지난 3년에 대한 죗값을요··· 그래도 만족해요. 제가 그냥 헛수고를 한 건 아니게 된 거잖아요? 야쿠자를 몰아냈다니, 그것만으로도 기뻐요. 범죄 집단 사이의 나와바리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저는 제가 러시아를··· 그 한 구석이지만 지켜냈다고 생각하니까요.”

바실리사가 나서려는 것을, 이준기가 눈짓으로 말렸다.

마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알아요. 그렇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자기 위안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제가 뭘 어쩌겠어요? 이런 시대를 살게 된 것이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구원자로 각성하고 군대에 계속 있었다면 제 삶이 달라졌을까요? 군대라는 조직 안에 있었더라도, 하는 일은 마피아와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세르게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건, 그렇겠죠.”

“세르게이, 당신은 어땠어요? 제가 알기로 세르게이는, 먼저 마피아가 되고 나중에 각성을 한 케이스죠?”

“네, 맞아요.”

“나쁜 짓을 하고 싶어서 마피아가 된 건가요? 그렇지 않죠?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누구나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만··· 세르게이는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 대학생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요. 너무 뻔한 얘기 같지만, 돈이 필요했어요. 동생이 많이 아팠거든요.”

“가슴 아픈 얘기군요. 그래서··· 동생은 이제 건강해요?”

“죽었어요. 마피아가 되어도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거든요. 죽기 직전에나 되어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할 수 있었죠. 다··· 못난 오빠를 둔 탓에.”

“너무 슬픈 얘기네요. 다시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정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세르게이는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냥 있기가 무안해서인지,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세르게이는 세르게이만의 방식으로 속죄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부러워요··· 저도 그런 길을 누군가 열어주었더라면···”

세르게이는 고개를 돌려 이준기와 바실리사를 보았다.

그 눈빛을 좇으며 마리아가 말했다.

“저분들이군요··· 세르게이에게 새 세상을 열어준 사람들. 어떤 분들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어요?”

하반신을 잃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서인지, 바실리사는 이준기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사에게 살짝 눈웃음을 보여주고, 이준기는 세르게이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게이가 마리아를 향해 말했다.

“마리아··· 우리는··· 푸가초프랍니다.”

“아! 푸가초프···”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조금쯤은 예상했다는 어조가 섞여 있었다.

세르게이를 올려다보던 마리아가 시선을 내리며 혼잣말을 했다.

“푸가초프··· 그런 선택지가 있었죠.”

푸가초프가 사실은 허깨비였다고, 모스크바 마피아 보스 아브람 쉬넨코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푸가초프는 이제 바실리사 엘리셰프와 동료들이 이끄는 조직이다.

그 사실은 세르게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바실리사의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을 푸가초프의 멤버로 여기고 있었다.

마리아가 다시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푸가초프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푸가초프는 점조직이라고 들었는데.”

바실리사가 대답했다.

“제가 초대했어요.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푸가초프의 바실리사 쿠즈네츠라고 합니다. 가명을 쓰는 것은 양해해 주세요.”

“그럼요. 적대하던 조직원 멤버인데요. 하지만 정말로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이제 극동 마피아도 그 어느 곳의 마피아도 아닙니다.”

“네. 그렇게 믿을게요.”

“고마워요. 저분도 푸가초프?”

이준기가 직접 대답했다.

“푸가초프의 스즈키 알료샤입니다.”

“아! 일본계 러시아인이시군요.”

“죄송하지만, 저도 가명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바깥소식··· 궁금한 것 없어요?”

이준기의 물음에, 마리아는 머뭇거렸다.

마리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준기는 덧붙였다.

“마리아··· 병원을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우리들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온 거랍니다.”

마리아의 입술이 떨렸다.

“예브게니? 예브게니 아저씨는 어떻게 됐죠?”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그렁군요··· 그래서 그동안 오지 못한 거군요.”

“네. 맞아요.”

“건강해요?”

그렇게 묻는 마리아의 눈동자는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예브게니가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건강합니다. 야쿠자의 재침공 초반에 자수해서, 경찰에 많은 협조를 했어요. 야쿠자를 물리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죠.”

“정말이에요?”

마리아는 살짝 웃음을 띠며 그렇게 물었다.

이준기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마리아는 대답 대신 웃었다.

“예브게니는···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죗값을 치를 겁니다.”

“잘 됐어요. 저도 그럴 수 있다면···”

“마리아는··· 그렇게 하기에 너무 위험해요. 야쿠자 잔당은 아직도 마리아를 찾고 있어요. 그래서 예브게니도, 병원을 옮겨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죠.”

“그렇군요. 하지만 전 이곳이 편해요. 사실, 또 어디로 옮기겠어요?”

“SSF라고··· ‘국경 없는 구원자회’라고 아시죠? 그 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어요.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예브게니 아저씨에게는 그렇게 얘기해주세요. SSF의 도움으로··· 그래요, 핀란드로 옮겼다고.”

“핀란드요?”

“예브게니 아저씨는 핀란드를 좋아했어요. 핀란드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요. 마리아가 그걸 원한다면.”

“그리고··· 염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을 해도 될까요?”

“말씀해보세요.”

“이건··· 바실리사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

하바롭스크로 가는 기차 안.

식당 칸에서 그들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에, 나무들이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세르게이가 결국 입을 열었다.

“괜찮아, 바실리사?”

바실리사는 창밖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어 세르게이에게 옮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쿨한 표정이었다.

“응? 나한테 묻는 거야?”

“어··· 그래.”

“내가 뭐 괜찮고 말고 할 게 있나?”

세르게이는 쩔쩔매는 표정이 되어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아··· 내가 또 잘못 생각했나 보네··· 미안해, 바실리사.”

“아냐, 세르게이. 아무런 느낌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바실리사는 머그잔을 들어 이제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셨다.

“어때요, 준기 씨? 커피는?”

이준기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마실 만하네요.”

바실리사가 이준기와 세르게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받아들일 만하다고나 할까. 사실 마리아가 그런 부탁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그녀 입장에서라면 이해가 되기는 해요. 하지만 왜 나에게? 여자라서?”

몸까지 앞으로 숙이고 집중해서 듣는 세르게이와 눈이 마주치자, 바실리사는 말하는 속도를 줄였다.

“세르게이, 아냐. 화난 게 아냐. 나는 그저···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그래. 마리아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말이었지. 그리고··· 사실 잘됐잖아?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도용하던 이름이었는데, 이제 본인의 허락을 받았으니 당당하게 써도 되겠군.”

이준기가 대꾸했다.

“맞아요, 바실리사. 사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요, 준기 씨. 제가 마리아 보로닌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서 정말로 마리아 보로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바실리사가 하는 일이 극동 마피아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죠. 바실리사는 여전히 바실리사. 그리고 우리는 푸가초프예요.”

“당연한 얘기인데, 준기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시원하네요. 신기하네···”

“적을 상대로 가짜 이름이나 신분을 쓰는 게 뭐 어때요? 바실리사는 마리아, 그리고 우리 3인조는 극동 마피아 잔당인 겁니다. 푸가초프는 비밀 조직이니까, 그런 위장이 있으면 더 좋죠.”

“네, 맞아요.”

마리아 보로닌이 바실리사에게 부탁한 것은 그것이었다.

바실리사가 마리아 보로닌이 되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달라는 것.

바실리사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마리아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피아가 되라는 말이 아녜요. 그저, 바실리사가 러시아를··· 우리 조국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제가 뿌듯하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미안해요. 잊어주세요.”

그러나 바실리사는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아녜요, 마리아. 그렇게 할게요. 러시아의 적에 맞설 때는, 마리아 보로닌의 이름을 쓰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바실리사는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마리아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들과 마리아 보로닌이 다시 만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리아 보로닌과의 만남이 끝났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바실리사를 향해, 이준기는 말했다.

“바실리사.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요. 바실리사 엘리셰프는··· 제가 아는 가장 훌륭한 구원자 중 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제 앞에 앉은 사람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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