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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9)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9)
“이··· 개새끼!”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아마쿠사를 향해 세르게이가 발길질을 했다.
옆구리를 해머로 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아마쿠사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러시아어를 말했다.
“살려줘···”
“어? 러시아어를 하네? 러시아 여자들을 강간하려고 러시아어를 배웠냐?”
“살려줘···”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아마쿠사는 세르게이의 바짓자락을 끌어안았다.
털 빠진 원숭이가 코에 피어싱을 한 모습의 아마쿠사.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 자신의 다리를 붙잡는 그 모습을 보자, 세르게이는 전신의 모공에서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 벌레만도 못한!”
“이제 됐어, 세르게이.”
다시 발길질을 하려는 세르게이를 바실리사가 말렸다.
세르게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바실리사? 이딴 놈을 동정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세르게이. 이놈은 내가 죽일 거야.”
“아··· 그렇지. 그래야 말이 되지. 그래, 네가 죽여, 바실리사. 내가 죽이면 아마 흔적도 남지 않게 갈아버릴 것 같으니까.”
“그래, 알았어. 하지만 일단 놈들의 아지트에는 들어가야지.”
“이··· 이놈을 이용하자는 거야?”
“그래.”
이준기가 거들었다.
“계획에는 없었던 거지만, 이놈을 데려가면 더 쉽겠지. 그렇게 하자, 세르게이.”
“그래, 대장. 알겠어. 하지만 이놈은 확실하게 죽이는 거다?”
“물론이다. 강간살인 미수 현행범이니까.”
“이놈이 그동안 강간하고 죽인 러시아 여자가 몇 명이나 될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나도··· 지금 당장 죽여버리고 싶어. 하지만 조금만 참자고.”
아마쿠사는 신음하면서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살려줘···”
이준기는 선 채로 바닥의 아마쿠사에게 일본어로 말했다.
“이름이 뭐냐.”
“이··· 일본인? 나··· 나 아마쿠사 쿠로다! 참의원 아마쿠사 지로의 외동아들!”
“휴우···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난 지금, 널 찢어 죽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거니까. 난 한국인이다.”
“조··· 조선인? 나한테 왜 이래?”
“너한테··· 왜 이러냐고? 범행 현장에서 잡힌 강간범이 할 말이냐, 그게?”
“아··· 아니야··· 장난이었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사··· 살려줘.”
“아마쿠사 쿠로라고 했나?”
“그··· 그래.”
“지금 너는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저기 저 커다란 저택에 묵고 있겠군?”
“그걸··· 어떻게 알지?”
“하시바 세이이치로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온 거잖아?”
“그··· 그렇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질문은 내가 한다.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다면, 아까처럼 공중에 매달아주마.”
“아··· 알았다. 제발 그것만은···”
“이제 모두 다 함께 우리는 그 저택으로 갈 거야. 네가 앞장서서 가는 거지. 알겠어?”
“무··· 무슨 말이야··· 설명을 좀 해줘.”
“방문 약속을 잡지 못해서 말야, 말하자면 우리는 불청객인 거지.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좀 데리고 들어가야겠어.”
“그,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할게.”
“저택 정문에는 경비 병력이 얼마나 있나?”
“스무 명 정도 되던가? 러시아 마피아들이고, 전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그놈들도 나쁜 놈들이기는 하겠지만, 약한 자를 그렇게 많이 죽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네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겠다.”
“아··· 알겠다.”
*****
한 시간 전에 저택을 나갔던 아마쿠사가 돌아왔다.
어쩐지 나갈 때보다 얼굴형이 조금 갸름해진 것 같다.
오늘은 수확이 없었는지, 마약중독자처럼 실실거리던 표정 대신 얼굴에는 왠지 어두운 빛이 감돌았다.
그래도 웃고는 있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어쩌면 원래 생긴 것이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문 경비 총괄 마피아가 그에게 인사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 하나로 40명의 마피아를 갑자기 부하로 부리게 된 그다.
“아마쿠사 님, 이제 오십니까.”
“그래. 수고한다.”
“헤헤··· 왠지 조금 우울해 보이십니다. 오늘은 상대가 별로였나요?”
“아··· 아니야. 나 지금 기분 좋다. 하하하.”
“아··· 그러시군요. 저는 또 무슨 일 있나 해서, 헤헤.”
“그건 그렇고··· 친구들을 좀 데려왔어. 같이 들어가려고.”
“네에? 아마쿠사 님··· 아무리 아마쿠사 님이라도 그건··· 하시바 님 허락이 필요합니다.”
“내··· 친구들이야. 내가 보증한다고. 귀가 먹은 거냐?”
덩치가 큰 마피아가 움찔하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아, 아닙니다. 아마쿠사 님. 하지만···”
“하시바, 하시바 하지 마. 내가 하시바 눈치나 볼 것처럼 보이냐?”
“아마쿠사 님···”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길을 열어라. 네가 말한 대로, 오늘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죽인다고 협박하는데 비킬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가 손짓을 하자, 경비들이 양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었다.
벽 뒤에 서 있던 이들이 나타났다.
동양인 하나, 러시아인 둘.
모자를 눌러 쓰기는 했지만, 여자는 패션 잡지 커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아마도 아마쿠사의 일본인 친구가 러시아 사람 둘을 데려온 모양인데, 어쩐 영문인지 아마쿠사가 쩔쩔매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보다, 하시바 놈이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는데, 바로 옆을 지나가던 러시아 여자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크헉! 뭐··· 뭡니까!”
아마쿠사의 범죄 행각을 잘 알고 있는 마피아 조무래기.
실실거리며 아마쿠사에게 아부하는 그 모습이 역겨워서 바실리사가 가볍게 한 방 먹인 것이다.
정강이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바실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조금 이따가 보자. 여기에서 기다려.”
“뭐··· 뭐라고요?”
아마쿠사의 친구라고 하니까 공손한 말투를 써서 물었다.
여자는 듣지도 않고 벌써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쿠사 일행이 저택 정문에 도달하기까지 10미터 정도 남았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이 튀어나왔다.
*****
“아마쿠사 님! 이 자들은 뭡니까?”
쿠사나기 린은 옆구리에 찬 칼에 손을 댄 채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뽑아 들 기세였다.
그녀의 양옆에는 일본인 구원자 두 명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아마쿠사가 대답했다.
“내··· 친구들이야. 안에서 같이 놀려고.”
“아무리 아마쿠사 님이라도 그건 안 됩니다! 하시바 님 허락을 받으셔야죠!”
“하시바도 허락한 일이다.”
“듣지 못했어요.”
“비켜라, 쿠사나기.”
“저는 정문을 지켜야 합니다. 하시바 님 허락 없이 모르는 자들을 안으로 들일 수는 없어요!”
연기력이 형편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마쿠사의 목소리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쿠사나기에게 대답하는 아마쿠사의 목소리가 뭉개졌다.
“쿠··· 쿠사나기···”
“애원하셔도, 안 됩니다. 하시바 님 허락을 받아오세요.”
“그··· 그게 아니고··· 사··· 살려줘!”
그렇게 외치면서 아마쿠사는 바로 앞의 아군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아··· 아마쿠사 님?”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칼을 빼 들려는 쿠사나기 린.
그런데 옆구리에 칼이 없었다.
“어?”
손에 잡히지 않는 칼을 찾아 옆구리를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칼은 거기 없었다.
고개를 들고, 그녀는 알아차렸다.
아마쿠사의 뒤에 서 있던 세 사람 중 하나가 사라졌다.
“끄악!”
짧은 비명과 함께 아마쿠사가 눈앞에서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쿠사나기의 양옆에 서 있던 부하들도 다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동양인이 그녀의 목에 칼을 대고 서 있었다.
자신의 옆구리에 있었던 바로 그 칼.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칼이 대단히 잘 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하시바에게 나를 안내해라.”
*****
거실에서 그들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최현은 즉각 이준기를 알아보았다.
“이··· 이준기 구원자님!”
“아직까지 집안에 계시다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쿠사나기 그 여자가···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가세요.”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현을 선두로 한국인들은 열린 정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고윤아와 설국헌도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고맙소.”
저택이 너무 큰 탓인지, 정문에서 약간의 소동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안은 조용했다.
아마쿠사는 죽고, 쿠사나기와 함께 있던 두 명은 다리가 부러진 다음 제압당했다.
이준기의 손에 들린 칼날을 오른쪽 어깨에 얹은 채로, 쿠사나기는 길을 안내했다.
“세··· 세 명으로 될 것 같아요? 망나니 아마쿠사쯤이야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하시바 님은 달라요.”
“그건, 직접 눈으로 보라고.”
“저택 안에는 지금 구원자만 해도 30명은 있다고요.”
“그건 이미 알고 있어.”
“제··· 제정신이에요? 다··· 당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이 칼이 대단한 것이지. 이렇게 무시무시한 도검을 들고 다니다니, 야쿠자들은 정말 막 나가는군.”
“야··· 야쿠자라뇨? 저는 선량한 시민이에요. 협회에 등록된 정식 구원자라고요.”
“야쿠자를 부하로 부리는데, 야쿠자가 아니라고?”
“그··· 그건···”
“야쿠자와의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시바의 방이 어느 거야?”
“저··· 저쪽 복도 맨 끝방이에요.”
“아닌데?”
“네···?”
“마피아에만 배신자가 있고, 야쿠자에는 배신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 무슨 얘기예요?”
“뒷조사는 했어. 너희들 중에서 한 명을 살려준다면, 난 그걸 너로 하려고 했다. 쿠사나기 린. 신의를 지키는 것은 좋지만, 상대가 틀렸어. 하시바 같은 버러지를 위해 네 목숨을 버리지 마라.”
쿠사나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쿠사나기 린.
여자라서 조금 희귀하기는 해도, 흔해빠진 밀덕에 불과하다.
과 내 괴롭힘으로 대학교를 무기한 휴학하던 히키코모리.
그의 어떤 면모가 그녀를 매료시켰는지는 몰라도, 하시바 세이이치로를 만난 이후 그녀는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한다.
이준기가 기억하는 쿠사나기 린은 그랬다.
‘이르헬의 눈’으로 바라본 그녀의 상태창 역시, 그의 기억이 맞음을 확인해 주었다.
39레벨에 스탯 합계 245, 구원자 살해로 얻은 보너스 스탯이 없다.
“당신은, 집단 괴롭힘의 고통을 알고 있잖아. 그런 당신이 고통을 주는 쪽에 서는 건 당치도 않아. 안 그래?”
“왜··· 이러세요.”
“말했잖아. 당신을 살려주려고 그러는 거야. 하시바 세이이치로의 무엇을 보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거지?”
“그··· 그는··· 압도적으로 강하잖아요.”
“정말이야? 겨우 그거야?”
쿠사나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구원자가 된 다음에도 왕따였어요. 그런 절 구해주신 것이 하시바 님이세요.”
“그래. 그건 나도 좀 알아봤지. 내가 아는 하시바라는 인물하고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아서.”
“무슨 얘기예요?”
“널 왕따시키던 길드 사람들··· 하시바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시바가 그런 식으로 만든 충견은 너뿐이 아니다. 쿠사나기 린. 그게 그놈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방법이다.”
“아··· 아녜요. 그럴 리가···”
“그게··· 네 인생에서 처음 느낀 타인의 친절이었어?”
쿠사나기는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녜요! 그런 게 아녜요!”
“넌 지금 나의 적이다, 쿠사나기 린. 하지만 난 너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아마쿠사를 단칼에 죽인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쿠사나기가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이준기는 드라이하게 말을 이었다.
“약속을 지켜라, 쿠사나기. 넌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하시바의 강력함··· 그것 때문에 그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겠다.”
“네?”
“고용 계약을 제안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