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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8)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8)
2월 21일.
속칭 유럽연합군이 러시아 국경을 넘던 그 날, 이준기는 하시바의 아지트로 들어갔다.
하시바가 유럽연합군으로부터 개전 소식을 통보받은 것과 거의 동시에, 이준기도 미겔 산체스의 연락을 받았다.
“가능성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진행되니까 놀랍기도 하네요.”
“이걸 예상하셨다는 거예요?”
“지금 국제 정치의 키워드는 민족주의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죠.”
“유럽연합군이라니, 그렇게 이름을 지으면 EU가 러시아를 침공하는 것 같잖아요.”
“브렉시트, 그리고 그리스가 유로권을 탈퇴하면서 EU는 힘이 완전히 빠진 상태죠. 구원자들 각성하고 민족주의가 발흥한 것도 EU 약화를 가속시켰거요. EU라는 단체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EU 소속 국가들 구원자들이니까, 그 이름을 쓸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사태의 본질이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식으로 치장하기에 좋잖아요. 연합군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일 연합군에 이어, 유럽연합군이라니.”
“한일 연합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쪽의 구원자 인구 비례로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한일 연합군의 수뇌부는 일본인들이죠. 유럽연합군도 마찬가지잖아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내전 당시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나라들이죠.”
“러시아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못된 짓을 한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건 차르와 독재자들이 한 일이잖아요! 전쟁이 일어나면 고통받는 건 국민들이라고요. 가해자와 징벌의 대상이 달라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상황이 더 복잡한 거죠.”
“저들은 마피아를 공격한다고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자기 조국이 공격받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민중이 마피아를 지지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고요.”
“그게··· 제가 이 시나리오를 우려했던 이유입니다.”
“어떻게 하죠, 준기 씨?”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할 겁니다.”
“그럼, 예정대로 하시바의 저택을 치는 건가요?”
“네.”
배신자가 된 쿠로사와 카츠가 정보를 보내오기는 했지만, 이준기는 확인 차원에서 이중으로 정보 확보에 나섰다.
바로 오늘, 하바롭스크 원정이 준비되어 있다.
유럽연합의 제2전선 형성 소식이 전해졌지만, 계획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고 오히려 좋아할 일이니까.
현재 연해주에 진주해 있는 한일 연합군의 규모는 총 59명.
잡일 처리를 위한 저레벨 구원자들을 제외하면, 약 20명 규모다.
2차, 3차로 충원된 인력까지 해서 30명 정도였으나, 사망 등의 이유로 빠진 것이 열 명 남짓.
사망 ‘등’이라고 말한 것은 살아 있지만 전력에서 이탈한 야스다 겐지 때문이다.
문아린에게 제압당하고 나서, 그는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썩어빠진 러시아 경찰이 돈 몇 푼에 석방할 거라는 하시바의 장담은 빗나갔다.
모스크바 경찰청장 타샤 카플론스카야 때문이다.
썩어빠진 경찰인 것은 맞지만, 그녀는 열혈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마피아이기는 해도 자국민을 학살하려던 일본인 구원자를 그녀는 절대 석방하려 하지 않았다.
하시바는 예측이 빗나가서 부하들 볼 면목이 없자, 욕설을 해댔다.
“왜 계집년이 경찰서장이야? 그것도 수도 모스크바의 경찰서장이라니···”
어쨌든, 20명의 ‘실제 전력’ 중 6명이 오늘 하바롭스크로 이동한다.
6명 정도,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지만, 중요한 것은 그 6명에 한국인 2명이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전투가 일단 시작되면 한국인 구원자들의 안전을 확보할 방법은 없다.
유탄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저쪽이 이준기를 알아보면 한국인 구원자들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한국인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하시바를 제압하기 위해, 이준기는 오늘을 D-day로 잡았다.
*****
최현과 유지호는 장대한을 환송하고 있었다.
하바롭스크 원정대에 포함된 한국인은 장대한과 진태형.
며칠 전 던전에서 이준기를 조우했던 최현은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장대한과 악수를 오래 끌었다.
보다 못해 하시바가 끼어들었다.
“아니, 며칠이나 헤어진다고 그렇게 손을 못 놓으시는 거요?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겁니까?”
최현도 장대한도 그런 농담에는 펄쩍 뛰었다.
“전 딸이 둘이나 있습니다. 농담이라도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남자 취향은 절대 아닙니다. 아직 한국 문화는 그런 쪽에 유연하지 않아요.”
코에 피어싱을 한 남자가 지나가다가 한마디 했다.
“별걸 다 가지고 호들갑이십니다, 들. 남자가 남자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하시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마쿠사, 산책이라도 나가는 거야?”
“아, 하시바 상! 평소와 마찬가지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영 성미에 안 맞아서요.”
“알아서 하겠지만, 경찰은 좀 피해 다녀라. 여긴 외국이야. 잡혀들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단 말이다.”
“헤헤, 제가 경찰 따위한테 잡힐 리가 없잖아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나도 다 알아.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는 거다.”
“러시아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요. 캬캬캬.”
아마쿠사는 하시바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갔다.
장대한과 헤어지고 나서, 방에 돌아온 최현은 유지호에게 물었다.
“아마쿠사? 아까 그 사람 뭡니까? 하시바에게 껄렁하게 대하는 녀석은 처음 봅니다.”
“아, 아직 모르시는구나. 아마쿠사 쿠로라고, 참의원 아들이라고 합니다.”
“참의원? 그게 뭔지는 몰라도 국회의원 같은 거잖아요? 겨우 그걸로 랭킹 3위 구원자를 씹는다고요?”
“그냥 참의원이 아니고, 일본 왕실 친척인가 뭔가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만.”
“생긴 것도 말린 멸치 나부랭이 같이 생겨가지고, 행동거지는 완전히 양아치던데요.”
“외모만 그렇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것 같아요.”
“아··· 그래서 아까 하시바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뻔히 상상이 되니까, 더 열 받아요. 이죽거리는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데.”
“어차피 다른 나라 사람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범죄를 저지르든 말든.”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저놈이 우리나라에 온다면요? 연합군까지 만드는 상황에 일본 놈들이 한국에 오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최현 구원자님은 딸도 있잖아요.”
“뭐라고요? 내 딸은 아직 어리지만··· 참의원이고 자시고 오크같이 생긴 저 녀석이 만약 내 딸에게 손이라도 댄다면··· 당장 산 채로 불태워 죽여버립니다. 당연하죠!”
“우리 구원자들이라면 사적으로 복수라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요? 당하고도 법의 심판을 기대할 수 없겠죠.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
“기분 나쁜 녀석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것보다는, 우리 어딘가 외출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준··· 아니, 그 사람 얘기하시는 겁니까?”
“네. 장대한, 진태형 씨처럼 출장이라도 가면 딱 좋은 건데.”
“그냥 나가면 되잖아요? 외출도 마음대로 못 합니까?”
“출입을 체크하니까 그렇죠.”
“아··· 거실에 늘 죽치고 있는 쿠사나기라는 그 여자 말씀이시죠?”
“네. 그러니까 그냥 외출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로 깐깐하게 합니까?”
“군 작전이라고, 병사들 외출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냐고 말하더군요.”
“아마쿠사 그 녀석은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요?”
“이런, 다시 그놈 이야기로 돌아와 버렸네요.”
*****
최현과 유지호는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거실로 나오니, 설국헌과 고윤아가 이미 쿠사나기 린과 이야기 중이었다.
코스프레라도 하는 것인지, 쿠사나기는 여군 복장이다.
허리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썼다는 ‘30년식 총검’ 레플리카가 달려 있다.
레플리카라고는 하지만, 날이 제대로 선 진짜 칼이다.
세관을 피해서 몰래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안 됩니다. 하시바 님에게 허락을 받아 오세요.”
“이게 진짜 군대도 아니잖습니까? 잠깐 외출 좀 하겠다는 건데요.”
“저, 한국말 잘 못 합니다. 쉬운 말로 좀 해주세요.”
“그러니까···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시바 님 허락이 필요합니다. 문서로 받아오세요.”
“네? 문서로요?”
듣고 있자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최현이 끼어들었다.
“쿠사나기 님.”
“아, 최현 구원자님.”
“아마쿠사라는 사람,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은 하시바 님 허락을 받아왔나요?”
“그럼요.”
“문서로요?”
“네.”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절 못 믿으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허락을 어떤 식으로 받아야 하나 해서요.”
“그렇다면··· 여기 보시죠.”
쿠사나기는 도장까지 찍힌 문서를 꺼내 보였다.
이게 집문서인지 주민등록 등본인지 어떻게 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일본어가 능통한 장대한이 곁에 없는 게 아쉬웠다.
그런데, 유지호가 문서를 들고 읽고 있었다.
“맞네요. 아마쿠사 쿠로. 외출 허가. 하시바 세이이치로. 도장도 맞는 것 같고···”
최현이 물었다.
“일본어 읽으시나요?”
“네··· 말은 잘 못 하는데, 게임 하느라 읽는 것은 익혔어요.”
“대단하시네요.”
“허가증이 맞긴 한데··· 오늘 받은 게 아니네요. 2월 8일부터 30일간 유효.”
쿠사나기가 말했다.
“허가증을 며칠 단위로 끊을지 정하는 것은, 하시바 님 권한이죠.”
유지호가 문서를 돌려주자, 쿠사나기는 그것을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걸 몸에 지니고 있다니,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위조해 놓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현이 다시 부탁해 보았다.
“연합군이잖습니까. 두 나라가 동등한 입장이라는 것 아닙니까.”
“네, 그래요.”
“그런데 외출 허락을 맡아야 한다뇨.”
“연합군이잖아요. 군대입니다. 규율은 있어야죠. 하시바 님이 총대장입니다.”
“한국 쪽은 제가 총책임자입니다.”
“전체 총괄은 하시바 님입니다.”
“휴··· 주말 동안 안에만 있어서 답답해서 그래요. 우리 넷이 이 근처를 딱 한 바퀴만 돌고 오겠습니다.”
“하시바 님 허락을 받아 오세요.”
*****
여자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아마쿠사는 여자의 얼굴 바로 옆의 벽에 주먹을 날렸다.
벽돌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1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깊이로 벽이 파였다.
여자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딸꾹질을 시작했다.
“러시아가 마음에 들어. 벽 두께가 두꺼우니까 마음껏 주먹질을 해도 뚫리는 법이 없거든. 하지만 네 두개골은 별로 두껍지 않잖아, 안 그래?”
“네··· 사··· 살려주세요.”
일본어를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 러시아 여자는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거지? 그 말은 많이 들어서 이제 알겠어. 러시아어 중에 처음으로 배우는 말이 살려달라는 거라니. 안된다는 말도 러시아어로 익혀둬야 하는데, 자꾸 까먹는단 말야.”
“사··· 살려줘요.”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어. 날 아주 많이 즐겁게 해주면··· 살려줄지도 모르지.”
“살려···주세요.”
여자는 눈을 감으며 울먹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마쿠사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무 좋아, 이런 거. 지금 너의 운명은 바로 내 손아귀에 있는 거잖아? 캬캬캬.”
아마쿠사는 여자의 옷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계속 울먹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크크크··· 인생은 즐거워. 즐겁고말고. 어··· 어엇?”
아마쿠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마쿠사는 팔을 뻗어 여자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여자는 옷깃을 여미며 털썩 주저앉았다.
“끄··· 끄아악!”
아마쿠사가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도망쳤다.
“꾸웩! 으아아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들어 올리면서 머리를 조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