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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7)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7)
2월 21일 아침, 하시바는 웃는 얼굴로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비행 편으로 날아온 식자재로 차린 소박한 일식 상차림.
찬은 몇 가지 되지 않지만, 재료 하나하나의 가격은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좀 드세요, 최 선생. 와쇼쿠(和食)가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시바의 아침 식사 맞상대는 최현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하시바와 마주 앉을 일을 피하려고 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이틀 연속으로 하시바의 아침 상대가 되어준 장대한이 더는 못 참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흘 전에 아침 상대를 한 유지호도 못 하겠다고 뺐다.
설국헌을 비롯한 ‘제레벨’ 구원자들은 감히 하시바와 겸상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꼭 한국인을 맞은 편에 앉혀 놓고 아침을 먹으려는 걸까.
한일 연합군이라고 하면서도 한국인 구원자들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한 사람씩 불러서 속마음도 떠보고 감시도 하려는 것이라고 최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두 나라의 이런저런 다른 점을 얘기하며 식사하는 걸 하시바는 즐겼다.
딱히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하시바의 결론은 늘 같았다.
한국이 지금은 미개하지만, 곧 일본과 같이 내외적으로 성숙한 나라가 되리라는 얘기였다.
‘또 그런 얘기를 들어야겠지.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려나? 메이와쿠? 엔료?’
사실 최현은 일식 마니아다.
한국식 명절 상차림은 몰라도, 가이세키에 관해서라면 한 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안다.
그러나 하시바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조금도 즐길 수 없었다.
최고의 일식 요리사가 최고급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이지만,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 때문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 집중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시바는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중간중간에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부가의문문을 붙이는 것은 물론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최 선생?”
“아··· 네. 날씨가 좋군요.”
“이런 데 별장을 마련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은퇴한 다음에는 이런 곳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최 선생 생각은 어때요?”
“무··· 물론 좋을 겁니다! 은퇴 후 느긋하게 지내기에 좋아 보이네요.”
“이런 저택을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물론 건축 양식은 일본 식으로 할 겁니다만···”
“글쎄요.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큰 집은 저도 처음이라서··· 돈이 꽤 많이 들지 않을까요?”
“들어요, 들어. 낫또 숙성도가 아주 딱이에요. 낫또, 싫어합니까?”
낫또라면 사족을 못 쓴다.
하지만 하시바 앞에서라면 진흙 씹는 느낌일 거다.
“자··· 잘은 못 먹습니다.”
“하하. 그런 분들 많죠. 한국에도 비슷한 게 있는데 왜 낫또는 못 드시는지, 참 요상하단 말이죠.”
“청국장···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청국장도 잘 못 먹어서.”
“뭐, 좋아요. 드시고 싶은 걸 드세요. 오늘 아침은 컨디션이 정말 좋군요. 아주 좋은 소식을 들어서 말이오.”
하시바가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거라면, 최현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나 며칠 전 던전 일이 발각되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최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조··· 좋은 소식···이라뇨?”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말이오. 러시아··· 아니 소련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뭐였을 것 같소?”
“네? 제2차 세계대전이오? 그··· 글쎄요.”
“생각을 해봐요, 생각을.”
“아··· 뭘까요? 도··· 독일이 핵무기라도 만들어서 공격하는 것? 독일도 핵무기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들어서요···”
“하하, 최 선생, 순진하시군.”
“소··· 소양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당시 핵무기는 그냥 큰 폭탄이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방사능 같은 걸 아는 사람은 없었지. 핵무기 따위보다 훨씬 더 큰 변수, 소련은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지.”
“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뭐겠소? 바로 일본의 참전이지. 독일의 동맹이었던 일본이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 그게 그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거지.”
“아··· 그도 그렇겠군요.”
최현은 나름대로 수긍하는 표현이라고 말한 것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하시바가 역정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맹렬히 끄덕여야 하는 건데.
무슨 험한 말을 들을까 하시바의 표정을 살폈지만, 하시바는 오늘 아침 정말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시바는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얘기를 내가 왜 하는 것 같소?”
“그··· 그건··· 지금 저희가 여기에 와 있으니까? 제2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일본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그래서 말씀하신 건가요?”
“좋아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최 선생, 감이 좋아지셨군.”
“감사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지 못했던 일을, 우리가 해냈소. 무슨 얘기인가 하면,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해내지 못했던 러시아 정벌을··· 이 내가!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해내게 되었다는 말이오.”
“네?”
“러시아 땅은 넓어요. 전선을 두 개는 열어야 하는 거요.”
“그 말씀은···”
“오늘 새벽, 유럽연합군이 러시아로 진입했소. 현지 시각으로 오늘 새벽이니까, 바로 조금 전이오. 러시아는 이제 정말로 전선 두 개를 가지고 양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지.”
“그··· 그런!”
최현은 뉴스를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시바는 잠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아무런 뉴스도 찾지 못한 최현이 고개를 들었다.
하시바의 시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뉴스는 아직이지.”
“그렇다면, 그 소식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와 독일이 동맹이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네···?”
“이번에는 유럽연합과 우리가 동맹이지. 러시아 국경을 넘으면서 동맹군인 우리에게 통보를 해 온 거요.”
“아!”
최현의 탄성에는 놀라움이 짙게 배어났다.
예상치 못했던 전개가 놀라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저 놀라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최현이 현재 가담하고 있는 바로 그 전쟁이다.
생각보다 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일한 연합군은 동쪽에서부터, 유럽연합군은 서쪽에서부터 악의 제국을 점령해나갈 것이오. 핍박받는 민중을 해방하면서···”
*****
야마토 연합의 소수파, 정러파의 어젠다에는 언제나 사할린 수복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한파가 휴전선 남쪽의 한반도 전체를 노리고 있는 데 비해, 겨우 사할린이냐고 비아냥거림이 나올 수 있는 상황.
정러파는 언젠가부터 연해주를 고토 수복의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그거, 꽤 위험한 얘기 아니오? 연해주가 수복 대상이면, 싱가포르도 괌도 수복 대상이오?”
“멀쩡히 잘 돌아가는 국가를 통째로 삼키겠다는 주장은 위험하지 않고요?”
“우리 주장은 한국에 괴뢰 정권을 세우는 거지, 땅을 통째로 접수하자는 게 아니오. 그런데 정러파 주장은 땅 자체를 먹겠다는 거잖아요?”
“러시아는 무정부 상탭니다. 그러지 못할 건 또 뭡니까?”
그렇게 정한파와 정러파의 설전이 오가고는 했다.
야마토 연합의 회주는 아니지만, 구라모토는 연합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병력을 동원하려면 협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야마토 연합의 회주 자리는 허울에 불과할 뿐, 실제 권력은 협회장의 손아귀에 있다.
정한파였던 구라모토는 야마토 연합의 다수파를 등에 업고 한국 침략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런데 이준기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오사카 도톤보리 차원문에서 일본인 구원자 4명과 친일파 한국인 구원자 2명이 참살당했다.
일본인 중 혼자서 살아나온 다케다 시게히데는 몹들이 몰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얘기했지만, 말하는 투가 영 어색했다.
협박과 회유에 다케다가 실토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전용택을 제거하려는 계략을, 이준기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대응했다.
총 하나 쥐여주면 구원자 따위 쉽게 사냥할 수 있다고, 하시바가 간언했다.
그러나 이준기는 그것도 쉽게 빠져나갔다.
야마시타 시게루씩이나 되는 실력자가 결국 이준기를 직접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차원문과 함께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한국 쪽 원정은 이준기라는 변수 하나 때문에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방향을 틀어야 하나 고민하던 구라모토에게, 하시바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정러파로 태세 전환을 해야 한다고.
얄궂게도 바로 그때, 이상덕이 구라모토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이준기를 포섭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상덕 그놈 말을 어떻게 믿어요?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걸 겁니다.”
“하지만, 이상덕 반대파 쪽이 깡그리 전멸한 것은 사실이잖아.”
“어쩌다 그렇게 된 거겠죠. 이상덕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정한이든 정러든, 2중대는 필요해. 이상덕이 없으면 그게 가능할까?”
“한국에 친일파가 이상덕뿐일까요? 정보를 좀 모아보겠습니다.”
정러파로 태도를 바꾸는 것이 정말 좋은 생각인지, 구라모토와 하시바는 며칠에 걸쳐 의논했다.
그러던 와중, 이상덕에게서 새로운 요청이 도착했다.
당분간 일본과의 협력사업을 중지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 봐요. 이상덕 이놈과 일을 하려면 앞으로도 계속 불안해야 할 겁니다.”
“지금 한국 구원자 계는 이상덕이 완전히 휘어잡은 상태다. 그런데도 이상덕을 버리자고?”
“당장 어쩌자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플랜 B는 가지고 있어야죠. 그쪽은 저한테 맡기십쇼.”
“나야 뭐, 하시바가 해준다면 고맙지. 하지만 일단은 이상덕을 데리고 가자고. 어렵게 한국 협회를 장악했는데, 지금 시점에 다른 사람을 구하는 건 수지에 안 맞아.”
“물론입니다. 당분간은 이상덕 체제로 가야죠.”
완전히 우리 편으로 전향한 것이라면 몰라도, 조건부로 이상덕 진영에 합류했다는 이준기는 여전히 껄끄러운 존재였다.
폭탄을 안고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상덕도 그 점에 동의했다.
언제라도 제거할 수 있다면 제거하겠다고, 이상덕은 약속했다.
그러는 사이, 하시바와 구라모토는 정한파에서 정러파로 입장을 정리했다.
야마토 연합 전체가 일시에 정러파로 기울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분리독립 유행에 편승해서, 일본에서도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구원자가 나타났다.
오키와나에 류큐 왕국을 재건하겠다니.
그냥 내부적으로 정리해도 될 일이지만, 구라모토는 꾀를 냈다.
한국과 중국 구원자들을 개입시켜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다.
그 구실로 이준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결과는 또 실패였다.
비행기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이준기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사로잡지 못했다.
이준기는 비행기에서 추락하고 실종된 것으로 정리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일본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구라모토와 하시바, 그 외의 심복 몇 명 정도.
러시아 정벌의 첫발, 사할린 접수를 논의하던 중에 구라모토는 다시 이준기 얘기를 꺼냈다.
“폭탄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인데, 다른 곳에서 일을 벌여도 괜찮을까?”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아직도 이준기 얘깁니까?”
“그래. 이준기는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한국놈인데 눈이 왜 시퍼레요?”
“으하하, 하시바. 그건 웃기려고 하는 얘기냐?”
“농담은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사할린을 지금 먹지 않으면, 앞으로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찝찝해서 그래. 풀지 못한 문제를 뒤에 남기고 앞으로 가려고 하니까.”
“찝찝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괜찮은 것 아닙니까?”
“하시바 답지 않은 말이군. 뭐든지 철저히 하는 성격 아니었나?”
“글쎄요. 실종 처리된 지 열흘이 넘었어요. 죽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그놈이 혼자서 뭘 하겠어요?”
“지금까지는, 혼자서도 우리 일에 훼방을 잘만 놓고 다녔지.”
“그때는 공식 구원자 신분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했던 거죠. 지금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 일을 얼마나 방해할 수 있을까요?”
“하시바, 잊지 마라. 이준기를 차에 태웠다는 그 여자는 그렇게 말했지. 아주 멀쩡했다고. 다친 사람 행색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구라모토 회장님, 저는 이준기가 죽었다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준기 그 녀석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된 사람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복수를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