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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6)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6)
차원문에서 나오자마자, 이준기는 문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적 부담이 없지는 않았지만,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 해야 할 일을 떠나, 그는 문아린을 만나보고 싶었다.
전화번호를 바꿨다면, SSF 구급차가 환자를 날랐던 병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날아온 통화를 받고, 문아린은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아린아.”
두 개의 전화 사이를 오가는 전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길게만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전화 저쪽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오··· 오빠!”
“미안해. 아린아, 미안하다.”
“저··· 정말 준기 오빠야?”
“내가 너무 늦게 연락했지.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사··· 살아 있었구나! 저··· 정말 다행이야! 하아··· 오빠··· 하··· 한국에 온 거야?”
“러시아야.”
“러··· 러시아? 나··· 나도 지금 러시아에 있어!”
“우리··· 만날까? 아르바트 거리에 해적 커피라고 알아?”
전화 건너편이지만, 문아린이 울먹이던 눈으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응, 알아. 커피 귀신인 것 보니, 오빠가 맞구나.”
*****
불 꺼진 해적 커피.
저녁 6시까지가 영업시간이라는 것을 이준기는 몰랐다.
먼저 도착했으니 기다리면 만나게 될 것이다.
선글라스와 마스크 때문에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이준기는 다시 전화를 하는 게 나을까 싶어 전화를 꺼내 들었다.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동양인 여자가 그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왔다.
와락 안겨 오는 그녀를, 이준기는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것도 잠시.
떨어지자마자, 이준기의 옆구리를 향해 묵직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준기는 아픈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고··· 공성타야?”
“오빠 맞네. 썰렁한 거 보니.”
그들은 근처의 카페로 이동했다.
이준기의 머릿속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커피숍 지도라도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커피를 주문했다.
“SSF 일은 어때? 적성에 맞아?”
“어떻게 알아? 내가 SSF 들어간 것.”
“사실은, 오늘 오후에 널 봤어. 네가··· SSF 구급차와 함께 왔었지.”
“뭐라고? 아까 총격전이 벌어지던 거기에 있었다는 얘기야?”
“그래. 너와 마찬가지로, 나도 오늘은 일하는 날이었지.”
“러시아에서··· 차원문 정리라도 한다는 얘기야?”
“긴 얘기가 될 텐데, 시간이 돼?”
문아린은 팔짱을 끼면서 대답했다.
“흠··· 시간은 없지만 일단 들어는 볼게.”
“그보다··· 아린이, 실력이 늘었던데. 내가 곁에 없어서 실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싸우는 걸 봤어?”
“넌 몰랐겠지만, 네가 상대한 그 녀석이 아마 너보다 5레벨은 높았을 거야.”
조금은 억지스러운 느낌으로, 문아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고맙기는 하지만 그건 너무 허무맹랑한 얘긴데. 격려가 안 된다고.”
“웃으니 좋구나.”
“아하하··· 아까 그 녀석을 생각하니까 웃겨서 그래. 허세만 잔뜩 들어서는···”
“정말, 껍질을 깨기라도 한 느낌이야. 한 단계 더 성장했구나, 문아린.”
“왜 그래? 너무 진지하니까 적응이 안 되잖아.”
“아, 잠깐. 커피 나왔다. 가져올게.”
이준기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운터를 향해 걸어 갔다.
가벼운 발걸음.
해운대에서, 종각에서, 오사카에서, 광주에서 보았던 그 뒷모습.
그걸 다시 볼 수 있다니.
곁에 있어 주지 않아도 좋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해준다면.
*****
이준기와 문아린은 카페가 문을 닫는 시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에 파는 음식이라고는 점심때 팔고 남은 샌드위치뿐이었지만, 그걸로도 좋았다.
이준기는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바실리사와 푸가초프의 이야기가 아닌, 이준기 자신의 러시아 방랑기를 들려주었다.
“한일 연합 이야기는 처음 듣네. 뉴스에서도 못 봤는데.”
“현재까지는 극비 프로젝트겠지. 하지만 언론이 가세해서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몰고 가면 여론도 달라질 거야.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듯이.”
“종각 던전은 시작에 불과했던 거구나. 이제는 던전 규칙도 아닌데 구원자들끼리 서로 죽인다니.”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지.”
“그래서, 오빠는 한일 연합을··· 저지할 거야?”
“응? 이미 저지했는데?”
“오늘 던전에서 처리한 건 일본인 구원자 5명 정도라면서?”
“아린이 네가 무력화시킨 한 사람도 포함시켜야지.”
“그래 봐야 여섯 명이야. 그걸로 됐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뭐 먹을 게 그렇게 많겠어. 이 정도 피해라면 물러갈 거야.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이준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준기의 계획을 알게 되면, 문아린은 함께하려 할 것이다.
문아린은 훌륭한 동료가 되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위험한 일에 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
한일 연합의 잔당은 평균 레벨이 30대 후반이지만, 문아린은 아직도 35레벨에 불과하니까.
“그럼, 준기 오빠는 이제 뭘 할 생각이야?”
“푸가초프의 재건을 도와야지. 사람들 만나고, 조직 정비하고··· 사무적인 일이 될 거야.”
“그거라도 도우면 안 될까?”
“미안하지만 무리야. 러시아어 할 줄 알아?”
“러시아어는··· 모르지만··· 잡일이라도 도우면 되잖아!”
“국경 없는 구원자회 일은 어떻게 하려고? 당장 그만두겠다는 거야?”
“정리하고 나오면 되지.”
“아린아.”
“응.”
“조금··· 옛날얘기인데, 아린이가 TV 인터뷰하던 걸 식당에서 본 적이 있어. 용병 뛰다가 식당에 가서 봤지.”
“에··· 부끄럽게 그런 걸 왜 얘기해.”
“그때 모습, 좋아 보였어. 실력을 키우겠다는 다짐을 얘기했었지, 너는.”
“오빠가 볼 줄 알았으면 인터뷰에서 그런 말 안 하는 건데··· 오빠는 집에 TV도 없다면서!”
“그래, 맞아. 하지만 식당에서 밥 먹는데 TV에서 나왔단 말야.”
어쩔 줄 모르는 문아린을 이준기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오빠 얘기는··· 일단 국경 없는 구원자회 활동을 하라는 거야?”
“그래. SSF에서 하는 일이 전부 다 마음에 들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일이 원래 그런 거잖아? 길드가 하는 일이 마음에 쏙 들었던 적이 있었어?”
“당연히 아니지. 길드 일도 그랬지만, 국경 없는 구원자회 활동도 결국 사회생활이니까.”
“가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만두는 건 너무하잖아? SSF에게도 문아린이라는 뛰어난 구원자를 활용할 기회를 줘.”
“에··· 느끼한 표현은 그만 좀 써.”
“미안, 미안. 아무튼, 당분간은 SSF의 문아린으로 있어 줘. 내 쪽에서 준비가 되면, 그때 아린이에게 도움을 부탁할게. 그때 도와줘.”
“정말이지?”
“그럼.”
“연락 끊지··· 않을 거지?”
“이번엔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였지만, 약속할게. 다시는 안 그럴게.”
*****
모스크바 마피아 두목, 아브람 쉬넨코의 사망으로 우크라이나 내전은 끝났다.
그러나 갈등의 불씨는 다른 곳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폴란드 랭킹 4위의 구원자, 아가타 하바로프스키(Agata Khbarovsky).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그녀는 구원자로 각성하고 나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곧 환멸을 느끼고 하원의원 자리를 내던졌다.
1979년에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의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자유 노조(Solidarność) 활동 중에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3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아버지는 형무소 내에서 불온사상을 전파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3년을 더 보내야 했다.
모범수로 5년 만에 출소했지만, 아버지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없고, 틈만 나면 불평만 늘어놓는 그런 사람.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자유 노조 멤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야 그녀는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소련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키워왔다.
역사를 가르치게 된 것도,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반러시아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다.
구원자로 각성하고 하원의원 선거에 나가서 당선되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구원자 정치인이라는 독특한 존재로서 당에 이용만 당한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정치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마스터로 있는 길드, ‘연대(Solidarity)’는 현재 폴란드 최대 길드다.
국제적인 어필을 위해 길드 이름도 영어로 지었다.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가 아니고 솔리대리티(Solidarity)다.
폴란드의 탈 공산화, 탈소련화를 이끌었던 자유 노조.
정치판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는 구원자 길드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폴란드인들의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러시아에 복수하는 것.
우크라이나 내전에도 직접 개입했다.
모스크바 마피아 수뇌부가 갑자기 괴멸되고, 러시아가 평화 협상에 나서는 바람에 전쟁은 빨리 끝나버렸다.
그녀는 만족할 수 없었다.
침략군을 격퇴한 다음에는, 그들을 내모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진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그대로 모스크바까지 진격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뜻밖의 방문자를 만났다.
일본 구원자협회의 구라모토 신스케 회장.
일본 랭킹 1위를 유지하며 협회까지 주무르고 있는 인물이다.
“비밀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비밀··· 이야기라고요?”
“우리 일본은, 마피아가 판치는 러시아의 현재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인의 입에서 러시아 이야기가 나오다니, 아가타는 놀랐다.
그녀의 길드가 민족주의를 모토로 하고 있는 것은 공개된 사실이지만,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공개적으로 논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그녀는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러시아는 마피아 세상입니다. 그건 여사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일본이 왜?”
“유럽 사람들은 쉽게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일본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는 나라입니다. 사할린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겨우 바다 건너편입니다.”
“그렇기는 하죠.”
“마피아가 지배하는 러시아는 일본에게 안보 위협입니다. 부끄럽지만, 일본에도 야쿠자라는 깡패 조직이 있지 않습니까? 러시아를 마피아가 지배하는 것을 보고, 야쿠자도 꿈틀거린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가만히 놔두면, 일본 국내 치안 상황도 영향받을 수밖에 없어요.”
“폭력조직 문제는··· 구원자들이 나타난 이후로 많이 개선되지 않았나요?”
“구원자가 공권력 편에서 싸우는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나 그런 겁니다. 러시아에서는 구원자의 최대 고용주가 마피아죠. 일본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이신지···”
“우리 일본은, 러시아 마피아를 직접 정벌하기로 했습니다.”
“네?”
문맥상 분명히 예상했던 이야기인데도, 아가타는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대하던 이야기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하바로프스키 여사님은 지난 우크라이나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그걸 어떻게···”
그녀, 그리고 그녀가 마스터로 있는 길드의 성향으로 보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지만, 아가타는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을 대외비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걸 일본 협회에서 알고 있다니, 조금 불안했다.
“일본 협회 소속 구원자는 1,500명이 넘습니다. 정보망도 탄탄할 수밖에 없죠.”
“그렇습니까.”
“오늘 여길 방문한 것은, 그 얘기를 드리려고 한 겁니다. 그냥 새겨두세요.”
“네? 겨우 그 얘기를 하려고 여기에 들르셨다고요?”
“영국과 독일 협회에 일이 있어 왔습니다. 유럽에 온 김에 여사님 생각이 나서, 폴란드에도 오게 됐네요.”
“자··· 잠깐만요.”
일어서려는 구라모토를 향해 아가타가 말했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구라모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다시 앉아, 아가타 하바로프스키와 긴 이야기를 나눴다.
2022년 2월 11일 오후였다.
그로부터 겨우 열흘이 지난 2월 21일 새벽.
‘유럽연합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