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87화 (18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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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5)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5)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일단 탈퇴하고 나면 협회에서 나중에 다시 받아줄지, 그것도 불확실한데.”

“괜찮습니다. 제 결심에 대한 대가는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협회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스포츠카 같은 것도 없고, 경찰이 신호 위반을 봐주지도 않을 거예요.”

“자동차는 지금도 없습니다. 신호 위반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떠돌이 생활이에요. 먹을 것도··· 아··· 그건 아닌가.”

떠돌이 생활 중이지만, 먹을 걸로 괴로웠던 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던전 안에서 딱딱한 빵을 씹을 때만 제외한다면.

이준기는 내용을 고쳐 다시 말하면서 웃었다.

“먹는 건 걱정 없는 것도 같네요. 세르게이가 나름 부자라서.”

“그럼 다행이네요. 저도 배고픈 건 못 참는데.”

김창수가 따라 웃었다.

이준기를 따라 길을 나서면서, 세르게이는 람보르기니를 비롯한 재산을 처분했다.

덕분에 이준기와 바실리사도 돈 걱정을 한 적은 없다.

세르게이가 극동 마피아 출신이라는 얘기는 안 했지만, 부자라는 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김창수 구원자님, 국경 없는 구원자회라는 단체도 있습니다.”

“SSF 말씀하시는 거군요.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그곳도 이미 조사해 봤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알아본 것뿐이지만, 거기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단체는 아닌 것 같더군요. 실제로 하는 일보다 꽤 많이 과장된 단체이기도 하고요.”

SSF에 대해서도 이미 알아보았다니, 신중한 성격의 김창수답다.

하지만 한 가지가 틀렸다.

조직과 구성원은 결국 별개의 존재라는 것.

SSF는 허풍이 심한 조직이지만, 문아린은 오늘 대단히 훌륭한 일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푸가초프 역시 마찬가지다.

푸가초프는 결국 실체가 없는 가짜 조직이었다.

모스크바 마피아의 대부, 아브람 쉬넨코가 머릿속에서 운영하던 조직.

그러나 마피아가 만든 가짜 조직 속에서도 바실리사는 빛났다.

단지 그녀만이, 홀로 진정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브람 쉬넨코가 내세운 가짜 대의를 진실로 바꾸고 있었다.

그래도, 현재 김창수에게 가장 잘 맞는 조직은 결국 푸가초프겠지.

아브람의 푸가초프가 아니라, 바실리사의 푸가초프.

이준기는 일부러 영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김창수 구원자님. 마리아에게 정식으로 입회를 요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현, 장대한, 설국헌, 그리고 고윤아.

이들에게 입단속을 부탁하며 이준기는 말했다.

“푸가초프에 이준기가 있더라··· 이런 얘기도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셔도 상관은 없는데, 그런 얘기를 하시면 아마 여러분들이 곤란해지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여쭤봐도 됩니까?”

최현의 질문에, 이준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상태 회장의 협회, 이상덕의 협회와 많이 다른가요? 이상덕에게 제가 눈엣가시였듯이, 한상태 회장에게도 저는 불편한 존재입니다. 제가 살아 있더라는 소식을 들으면 좋아할 리가 없어요. 게다가 일본과 진행 중인 협력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그건 이준기 구원자님이 곤란해지는 이야기잖아요? 구원자님이 살아 계시다는 정보를 물어다 주면, 한상태 회장은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적극적인 악행이 아니라면, 저는 단죄하고 싶지 않아요. 한상태 회장에게 죄가 있다면··· 아니 있겠지만, 그건 그가 불완전한 존재라서, 인간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한상태가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생각은··· 아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상태가 잘못 판단하고 저에게 덤벼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승패는 뻔하니까요.”

다들 속으로 움찔했다.

잠깐 동안 이상덕과 그의 일당에게 밀렸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한국 랭킹 부동의 1위였던 한상태.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이상덕을 상대로 일대일 대결을 벌여 승리했던 한상태.

그를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준기의 태도에 허풍은 조금도 없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준기는 1 더하기 1이 2라는 느낌으로 승패는 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요점은 그겁니다.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저를 제거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살아 있다는 정보는 독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도 불행하겠지만 저도 불행해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쓸데없는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아요.”

설국헌을 시작으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고윤아가 살며시 손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준기 님··· 준기 님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그들에게는 사실을 얘기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던전을 함께 뛰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휴우···”

이준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문아린, 길수연, 윤동직··· 어쩌면 김새로미나 신다은, 김나리, 최아람, 하정태도···

아차, 하정태는 죽었다고 들었다.

대구의 어떤 차원문에서 공격대가 전멸했다고.

길수연은, 아마도 만나게 되겠지.

조슈아에 맞서게 될 최후의 싸움, 거기에 길수연이 아닌 다른 힐러의 존재는 생각하기 어렵다.

문아린 역시, 조금 후에 만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으니까, 이제 마음고생은 그만두게 해야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슈아와 동귀어진 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그들을 왜 불러들인단 말인가?

긴 침묵 끝에, 이준기가 대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여러분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말씀하시면 뭐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저라는 사람··· 알고 지내봐야 좋을 게 없는 사람이에요. 구원자···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죠. 죽은 셈 쳐주시면 좋겠어요.”

고윤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말하려다가, 그만두려다가, 다시 말하려다가···

결국 그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기뻐요. 준기 님이 살아 계셔서.”

*****

극동 마피아가 왜 던전을 소멸시키려는지, 그들은 묻지 않았다.

극동 마피아 팀이 차원문을 닫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준기는 나서지 않았다.

세르게이가 거의 혼자서 몹들을 정리하고, 보스를 쓰러뜨렸다.

세르게이는 대망의 40레벨을 넘어 41레벨에 도달했다.

경험치 바가 오른쪽 끝에 붙어 있던 이준기와 바실리사도 던전 클리어 보너스로 레벨이 올랐다.

광렙을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무려 다섯 명의 구원자를 죽인 쿠로사와 카츠.

38레벨로 던전에 진입해서 그야말로 경험치 폭탄을 맞고 41레벨이 되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쿠로사와는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본인 구원자들의 아이템 무더기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제가 아이템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차원문과 함께 사라지고 싶어?”

“아, 아닙니다. 이준기 님. 죄송합니다.”

한국팀 멤버들 중에서는 경험치 바가 거의 가득 차 있던 장대한이 한 레벨 올라 40레벨이 되었다.

“부끄럽군요. 아무것도 안 하고 레벨이 오르다니.”

차원문을 나가기 전에, 이준기는 다짐을 받았다.

“쿠로사와, 그리고 여러분들. 오늘 던전을 어떻게 클리어했는지, 시나리오대로 보고해 주세요.”

쿠로사와가 각 잡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준기 님.”

쿠로사와의 눈길을 피하면서, 이준기가 말을 이었다.

“오늘, 마리아 보로닌과 그의 부하 두 명은 이곳 던전에서 죽은 겁니다. 그 증거로 오늘 보물 상자에서 나온 그 아이템을 가져가세요. 마리아 보로닌이 쓰던 거라고 얘기하세요.”

“무기 하나만 건져왔다는 말을 믿을까요?”

“아이템이 의외로 형편없었다고 얘기하세요. 마리아 보로닌은 최근까지 극동 마피아 서열 5위였습니다. 보스가 아이템 욕심이 많아서 다 빼앗아갔다고 얘기하죠.”

“알겠습니다.”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교활한 자이기는 하지만, 앓던 이가 빠졌다는데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차원문이 소멸했으니까요. 지금 이 싸움, 극동 마피아가 열린 채로 놔두려는 차원문을 한일 연합이 닫고 다닌다는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게 하시바 생각이겠죠.”

“네, 맞아요.”

“어차피··· 궁금해할 시간도 없을 겁니다. 하시바에게는.”

“저택으로··· 쳐들어오실 건가요?”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준기는 눈으로 바실리사를 가리켰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저택은 곧 공격을 받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때 적당히 도망가 주세요. 저희에게, 푸가초프에 다시 맞선다면 그때는 살려드린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

던전에서 나오고, 차원문이 소멸했다.

나오기 전에 정한 대로, 생환자들은 각자 갈 길을 갔다.

김창수는 우선 숙소를 잡아야 했다.

“첫날부터 열악한 조직의 현실을 맛보시게 됐네요. 숙소는 직접 잡으셔야 해요. 인터넷을 뒤져보면, 한인 민박이 있을 겁니다. 영어가 통하는 곳이 많으니 호텔도 괜찮아요. 이름은 가명을 쓰시고, 만약 여권을 보자고 하면 딴 데로 가세요.”

“알겠습니다.”

“연락 방법은 알려드린 바와 같습니다. 저에게 문자를 하세요. 날짜와 코드를 섞어서요. 기억하시죠?”

“네.”

“우선 며칠 동안은 혼자 지내셔야 합니다. 4일 후, 그러니까 22일 아침 10시경에 문자를 주세요. 할 일은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전이라도 비상 상황이라면 문자를 주세요.”

시나리오에 따라 생존자로 결정된 사람들은 일단 아지트로 쓰는 저택으로 귀환해야 했다.

쿠로사와 카츠, 최현, 장대한, 설국헌, 고윤아.

이준기의 밀정이 된 쿠로사와는 차원문을 나오기 전에 여러 차례 리허설한 대로, 하시바에게 보고했다.

“좋아, 수고했다. 쿠로사와. 야스다 녀석이 사고를 쳐서 계획이 틀어질 뻔했는데, 잘해줬어.”

“감사합니다, 하시바 님!”

“마리아 보로닌··· 적이지만 실력은 인정해야겠군. 5명을 죽이다니.”

“만만치 않았습니다.”

“김창수 그놈은 누가 죽였나?”

“제가··· 직접 죽였습니다.”

“최현이가 안 하고, 네가 했단 말야?”

“아무래도, 닌자술에 능한 제가 처리하는 게 자연스러워서요. 전투 중에 몰래 살수를 썼습니다.”

“마리아 보로닌과 싸우는 도중에?”

“네. 전투가 끝나갈 때쯤에요. 저를 제외하면 다들 부상으로 빌빌대던 상황이었죠.”

어차피 거짓말이다.

쿠로사와는 자신만 부상 없이 전투를 끝냈다는 내용의 양념을 마음대로 첨가했다.

“너만··· 무사했다고?”

하시바의 뱀 같은 눈초리가 그를 강타했다.

순간, 얼어붙는 느낌으로 말이 막혔다.

겨우겨우 쿠로사와는 대답을 짜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온 대답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네··· 하시바 님··· 그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부상이 덜 심한 편이어서···”

“잘했다.”

“가··· 감사합니다.”

“좋아. 인명 손실이 생각보다 컸지만, 목표한 두 가지를 이뤘으니 만족할 만한 결과다. 마리아 보로닌 일당 처치, 그리고 김창수의 살처분.”

“감사합니다, 하시바 님.”

“사토··· 그 녀석이 죽다니, 한국어 통역은 누가 하지? 내가 직접 해야 하나?”

“사··· 사토! 그 녀석이 제일 형편 없었습니다! 도망치려고 했다니까요!”

“그으래? 정말인가?”

“아··· 아니··· 정확하게 도망가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겁에 질려서···”

“쿠로사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거는 하시바.

쿠로사와는 다시 얼어붙었다.

“허풍을 치는 것은 좋아. 하지만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지는 말아라.”

“하··· 하시바 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수고했다.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라.”

작전본부로 쓰는 응접실을 나오면서, 쿠로사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시바, 역시 무서운 자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오늘 더 무서운 사람을 만났다.

하시바에게 태연히 거짓말을 할 용기가 생길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구원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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