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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4)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4)
39레벨의 사토 켄이치 대 38레벨의 쿠로사와 카츠.
선발대 공격대장과 후발대 일본 팀 에이스.
온몸에 자상이 가득한 사토와 상처 하나 없는 쿠로사와를 그냥 싸우게 하는 것은 공평치 않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사토에게는 힐링 포션과 약간의 회복 시간이 주어졌다.
장검 대 단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양쪽 모두 근접 딜러다.
바람의 책을 중심으로 하는 스킬 트리도 비슷하다.
접전을 예상했지만, 승부는 비교적 싱겁게 끝났다.
이긴다는 뜻의 이름, 카츠(勝). 그가 이겼다.
힐링 포션으로 회복할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충분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준기를 상대로 스킬을 낭비한 사토와 달리 쿠로사와에게는 스킬책도 충분했다.
일본 팀의 공적이 된 쿠로사와.
그가 이기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은 이를 갈았다.
사토 켄이치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은 다음, 쿠로사와는 무릎 꿇고 앉은 일본인들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모두 마음속으로 사토를 응원했던 그들은 쿠로사와가 다가오는 걸 보고 흠칫했다.
“네 이년!”
욕설과 함께 쿠로사와는 와타나베 아카리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와타나베가 배를 포개며 쓰러졌다.
“결투 중인데 힐을 넣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고통에 신음하는 와타나베 대신, 옆 사람이 쿠로사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더러운 배신자 새끼! 만약 돌아가게 되면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생생하게 증언할 거다!”
쿠로사와는 화내는 대신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으하하! 살아돌아가? 어디를? 꿈도 야무지군.”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쿠로사와는 이준기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이준기 님! 제가 이겼습니다! 여기 이 녀석들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대결이 싱겁게 끝나는 바람에 이준기는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쿠로사와 카츠.
비겁한 녀석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쩌면, 오늘 일을 밀봉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뭘 어쩌겠다는 거지?”
“전부 죽여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쿠로사와를 보니, 역겨움을 참기 어려웠다.
이준기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
“너 자신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다.”
“네? 저는 이미··· 이준기 님의 심복이 된 것 아닙니까? 이준기 님과, 마리아 보로닌 님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극동 마피아의 번영을 위해 이 몸이 부서지도록 뛰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다.
이준기의 원래 계획은, 우크라이나 키예프 황금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전투력을 적당히 빼앗은 다음 경찰에 넘기려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보다도 더 신뢰가 가지 않는 러시아 경찰이라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런데 한 사람의 비열한 행동으로 이준기에게는 선택지가 늘어났다.
“마리아 보로닌 님을 위해, 네 목숨 다하는 날까지 충성하며 러시아의 부흥을 위해 발로 뛸 자신이 있나?”
“네?”
일부러 긴 문장을 러시아어로 물어보자, 쿠로사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준기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뭐라고 하신 겁니까, 이준기 님?”
쿠로사와가 러시아어를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이준기는 바실리사와 세르게이를 향해 돌아서서 러시아로 말했다.
“마리아··· 상황이 묘하게 전개되는군요. 배신자는 역겹지만, 우리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황을 정리할 기회예요.”
“하아··· 생각을 좀 해볼게요.”
“뭘 고민해, 대장? 내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시나리오인 것 같은데.”
이준기가 대답했다.
“살인만 죄인 건 아니지. 살인 교사도 죄야.”
“아아···”
세르게이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준기가 말을 보탰다.
“하지만, 난 살인만 해도 벌써··· 셀 수도 없이 저질러왔지. 살인 교사 정도는, 감내할 수 있어. 내가 문제가 아니고··· 마리아···가 문제야.”
러시아어 대화라도 이름은 분명히 들을 것이다.
그래서 바실리사를 마리아로 지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괴롭다.
가장 진심 어린 대화가 필요한 시점에 가짜 이름을 불러야 한다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면서, 바실리사가 말했다.
“찬성합니다. 더 큰 정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죠.”
이준기가 바실리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손에 묻은 피는 이미 흥건해요. 어쭙잖은 마음의 평온을 구하겠다고 일을 그르칠 수는 없어요.”
*****
비열하게 웃으며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사람들을 처단하는 쿠로사와 카츠.
바실리사도 세르게이도 이준기도, 고개를 돌리고 학살의 현장을 외면했다.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쿠로사와 카츠는 한국어를 모른다.
그래서 이준기는 편하게 한국말로 말했다.
한국인 구원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이다.
“러시아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이번에 한일 연합군에 참가하면서 들은 것 정도입니다. 러시아에 4대 마피아가 있고, 그들의 연합체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무정부 상태의 러시아를 사실상 지배한다는 것 정도죠.”
“푸가초프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 아뇨. 그건 뭡니까?”
최현이 모른다고 대답하는데, 고윤아가 손을 들었다.
“저는 들어봤어요. 마피아에 대항하는 구원자 조직이라고, 말하자면 레지스탕스 같은 거라고.”
“맞습니다.”
“인터넷에는 확인하지 못할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아다니지만, 이런 얘기도 있더군요.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러시아 마피아 수뇌부를 처치한 것은 연합군이 아니라 푸가초프라고요.”
“흠.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보통 이렇게 NCND 하겠다고 하면, 사실상 긍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푸가초프가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 정말 멋져요.”
고윤아가 탄성을 지르자, 이준기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에게 떨어졌다.
32레벨이나 되어서 아직도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인지, 의아했다.
뭐가 멋지다는 말인가. 전쟁이다.
“푸가초프라는 저항 조직이, 강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 멋져 보이시나요?”
“아··· 저도 모르게. 하지만 멋지잖아요. 마피아에 맞서 싸운 거니까.”
“여러분들도 마피아에 맞서 싸우려고 여기에 오신 겁니다.”
“아···”
“푸가초프가 마피아에 맞서 싸우는 것, 사실 멋진 거죠.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한 것은 어떤가요? 지금 한일 두 나라가 러시아에 온 것은요? 우크라이나 내전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모르시나요?”
모두, 대답이 없다.
“우크라이나 마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러시아가 들어간 겁니다. 우크라이나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 마피아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우크라이나는 그걸 해결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서, 직접 해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침략한 거죠. 어떻습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그··· 그건!”
최현이 항의하듯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그저 감탄사에서 끝났다.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일본인 관광객이 차원문 안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도대체 차원문 관리를 어떻게 하냐고, 일본 협회에서 구원자들을 대거 파견해서 한국에 있는 차원문을 관리하겠다고 나선다면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차원문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죠. 실수 한 번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더 나아가, 그런 핑계는 조작이 가능하죠.”
“네?”
“루거우차오(卢沟桥, 노구교) 사건이라고, 역사 시간에 배우셨죠? 중일전쟁을 일으키려고 일제가 조작한 사건 말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할힌골 전투라고, 일본이 몽골에 똑같은 짓을 하려다가 호되게 당한 일도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려고 조작한 통킹만 사건도 있죠. 찾아보면 얼마든지 더 나올 겁니다.”
“아··· 그런 것도 가능하겠군요. 하시바 세이이치로 그 사람이라면.”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한국 팀 구원자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준기의 말이 먹히는 데 도움이 되니 다행이었다.
본성은 못 속이는 법이다.
정한론의 선두 주자이자, 한일 전쟁을 주도했던 하시바 세이이치로라면 그런 조작쯤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저는 도덕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민족주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정말 간단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나와 대등한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극히 당연한 주장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언제나 동전처럼 양쪽 면이 있는데, 그 두 개의 입장은 서로 모순되죠. 앞뒤로 딱 붙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너무 횡설수설해서 죄송합니다. 원래도 말을 잘 못 하는데,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니까 혀가 꼬이네요.”
설교 투가 되어가는 것 같아 이준기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다들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고윤아가 대답했다.
“아녜요, 이준기 구원자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고윤아의 말에, 김창수와 설국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대한이 손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기 구원자님, 저희들 대부분은···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최현도 맞장구를 쳤다.
“장대한 구원자님 말이 맞아요. 저도 여기에는 절대로 오고 싶지 않았어요. 제 의지에 반해서 끌려온 거라고요. 저는 어떻게든 빠지고 싶었는데··· 인천 공항 차원문 공격대에서 빠진 것 때문에 길드에서도 찬밥이고, 한상태 협회장님도 저를 마뜩잖게 생각하셔서··· 정말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제명됐을 겁니다.”
이준기는 잠시 최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선에서 힘을 빼려고 했지만, 어떤 것은 말을 안 해도 전달되는 법이다.
“이··· 이준기 구원자님! 그래고 제가 거부해야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명되면요?”
“네?”
“제명되면 큰일이 벌어지나요?”
“그··· 그건!”
최현의 얼굴은 항의하고 싶다는 열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남의 일이라고 말을 막 하는 것 아니냐, 딱 그렇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상대는 이준기.
제명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한 사람이다.
눈을 감으며 이준기는 표정을 풀었다.
미소를 지어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준기는 말했다.
“이제,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
이야기를 끝날 때쯤, 고윤아는 울먹이고 있었다.
당황하는 이준기와 사람들을 향해, 고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너무··· 감동적이에요. 특히 마리아 보로닌이라는 저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어, 이준기는 바실리사의 이름을 마리아 보로닌으로 바꿔 이야기했다.
한 여성 구원자가, 마피아가 지배하는 세상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뜻이 맞는 동지들을 만나 조금씩 정의를 이뤄가는 이야기.
이준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생략했다.
설국헌은 고개를 끄덕여댔고, 장대한과 최현도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엄숙함을 지나 얼어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김창수가 입을 뗐다.
“저··· 이런 얘기 갑자기 드리는 것이 죄송하기는 하지만···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말씀하시죠.”
“저는 아직 레벨도 낮고 미숙하지만··· 푸가초프에··· 가입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준기는 우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창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게 결정하다니.
조금은 놀란 것도 사실이다.
“진심입니까? 결정권이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는 합니다만···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하기 전에 김창수 구원자님 말씀을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는 확인해야죠.”
“진심입니다. 혹시 비자 문제가 걸리는 건가요?”
“절차적인 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푸가초프에 가입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협회에서는 탈퇴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실상 구원자 은퇴에 가깝게 되겠죠. 국가 지원금도 없고, 생활도 어렵겠죠. 하지만··· 마음만은 편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