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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3)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3)
모두가 모였다.
C 등급 던전 안에 들어온 무려 14명의 고레벨 구원자들.
한국 출신 구원자 5명과 일본 출신 6명은 따로 그룹을 지어 앉았다.
전원 수갑을 찬 일본인 구원자들과는 달리, 한국인 구원자들은 수갑도 상처도 없다.
분할하고 통치하라.
굳이 그 격언이 아니더라도 한국과 일본의 구원자들을 똑같이 다룰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격언이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구한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고, 유효성을 증명한 명제들이다.
연합군을 상대하는 상황에, 이보다 더 좋은 전략이 있을까.
“야쿠자들의 범죄 목록을 읊고 싶지만, 자료가 없네요.”
바실리사의 말에, 세르게이가 대꾸했다.
“목걸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 아니다.”
‘아름다운 바실리사의 해골 랜턴’이 있었다면 거짓말을 쉽게 가려냈을 것이다.
아브람의 던전에서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아이템.
세르게이는 말실수를 깨닫고 수습하려 했지만, 입을 나온 말은 엎어진 물이나 다름없다.
바실리사가 웃으며 세르게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아이템은 있다가도 없는 거지. 내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 보여?”
“미안해, 바··· 아니, 마리아.”
말실수를 한 번 더 저지를 뻔한 세르게이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르게이를 향해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인 후, 이준기는 바실리사를 향해 말했다.
“저는 그런 아이템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구원자 능력을 싹 없애버리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죽이지는 않으면서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를 수 없게 하는 거군요.”
“맞아요. 구원자들은 그냥 놔 주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라서요.”
“바로 지금, 그런 아이템이 있다면 좋을 텐데.”
“일단 이 정도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꿇어앉은 일본인 구원자들 앞에는 그들의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던전 소멸과 동시에 사라질 물건들이다.
아이템이 없더라도 이들은 위험하다.
여전히 화염구를 쏘고 우사인 볼트의 속도로 뛰어다닐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레벨업은 많이 힘들어질 것이다.
레벨이 제한되면 악행의 수준도 제한된다.
쿠로사와를 제외한 일본 팀의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구원자의 강철 체력으로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통스럽다.
게다가,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
한국인 구원자들은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수갑도 상처도 없고, 아이템을 빼앗기지도 않았다.
이제 던전을 나가면, 이들 두 그룹은 서로를 같은 편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일본 멤버들 중 혼자서 멀쩡한 쿠로사와를 향해 이준기가 다가섰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쿠로사와에게, 이준기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브게니 오블론스키(Yevgeniy Oblonsky)라고, 알지?”
“그··· 그렇다.”
“지금 어디에 있지?”
“나··· 나는 모른다. 정말이다.”
“아는 편이 나을 거다.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사··· 살려줘! 나··· 나는 모르지만··· 이중 누군가는 알고 있을 거야! 누··· 누군가 다른 사람···”
말을 더듬던 쿠로사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함께 꿇어앉은 일본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준기를 상대할 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와는 달리, 일본인들을 향해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예브게니 영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말해라!”
싸늘한 증오의 눈빛들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일본인 구원자 6명 중 유일하게 상처 하나 없이 편히 앉아 있는 그가, 이제는 동료들을 윽박지른다.
사토 켄이치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쓰레기··· 같은 놈.”
“뭐가 어째? 사토! 네 녀석이 뭔가 알고 있나?”
“배신자에게··· 말할 것 같으냐?”
쿠로사와가 무릎을 땅에 댄 채로 일어서서 이준기를 향해 외쳤다.
“사··· 사토! 맞아! 저 녀석이 알고 있다! 저놈을 취조하면 알 수 있어!”
이준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쿠로사와를 쳐다보았다.
쿠로사와가 다시 이준기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사··· 사토 켄이치! 생각해 보니, 저 녀석이 러시아인 포로를 담당한 적이 있어! 지난번 1차 원정 때, 중요 인물을 본국으로 호송하는 일을 맡았단 말야! 이제 기억났어! 저놈이 알고 있다! 사토 저놈을 조지면··· 예브게니 오블론스키··· 그 영감의 행방을 알 수 있단 말야!”
흥분해서 한 차례 말을 쏟아내고 나자, 쿠로사와는 갑자기 멈춘 엔진처럼 식어버렸다.
엔진이 식은 이유는 상대방의 싸늘한 대응 때문이다.
이준기의 냉랭한 눈빛이 여전히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며 쿠로사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준기··· 님! 사토를 취조하면··· 예브게니 영감의 행방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가, 포로의 수송을 담당했습니다. 예브게니를 데려온 것이 지난번 1차 원정 때니까, 확실합니다.”
여전히 조용한 이준기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쿠로사와는 깨달았다.
“이 자식아!”
온몸의 자상(刺傷)에서 피를 흘리는 사토의 멱살을 붙잡고, 쿠로사와는 소리 질렀다.
“이준기 님께서 물으시잖아! 예브게니 영감을 어디에 가둬놨는지, 당장 말해라!”
“더러운 새끼···”
힘없이 욕을 내뱉는 옛 동료에게서 눈을 뗀 쿠로사와는 고개를 돌려 이준기를 훔쳐보았다.
여전히 싸늘하다.
쿠로사와는 사토의 멱살을 세차게 흔들었다.
“사토 이 새꺄! 당장 답을 하지 않으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내가 못 할 것 같냐?”
“쿠로사와··· 이 배신자··· 크억!”
멱살을 세차게 흔들린 사토가 피를 토해냈지만, 쿠로사와는 멈추지 않았다.
“정말 쓴맛을 봐야 불겠나? 독화살 맛을 당장 보여주랴?”
사토를 바닥에 내팽개친 쿠로사와는 수갑을 찬 양손을 사토의 얼굴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기운이 모여 화살 모양이 되었다.
어둠 속성 스킬, ‘검은 화살’.
“독한 새끼··· 원하는 대로 쓴맛을 보여주마.”
쿠로사와의 손가락 끝에서, 바로 앞의 사토의 얼굴을 향해 검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크헉! 쿠로사와, 이 더러운 배신자 새끼···”
이준기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쿠로사와는 사토를 비웃었다.
“크하하! 어떠냐, 사토! 독이 몸에 퍼지는 느낌이!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실토해라! 예브게니를 어디에 숨겼는지, 이준기 님께 당장 말씀드려!”
“쿠··· 쿠로사와··· 내가 네놈을···”
“정말로 죽고 싶은 거냐! 당장 불어라!”
“끄으으··· 네놈만은··· 내가···”
“독화살 한 대 더 맞고 얘기하자는 거지?”
쿠로사와의 양손이 다시 사토의 머리를 향해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기운이 꾸물거렸다.
죽을힘을 다해, 사토 켄이치가 용수철처럼 허리를 튕겨 일어났다.
그는 이준기를 향해 소리 질렀다.
“말하겠다!”
이준기가 뭐라고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사토는 말을 이었다.
“예브게니의 소재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다오.”
쿠로사와가 얼어붙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사토와 이준기를 번갈아 쳐다보는 쿠로사와.
‘검은 화살’ 시전을 멈춘 손끝에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이준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토가 말했다.
“예브게니의 소재를 알려주면, 쿠로사와 이 자식을 죽여다오.”
쿠로사와가 수갑을 찬 손으로 사토를 밀어 넘어뜨렸다.
“뭐가 어째? 이 새끼가 정말 죽고 싶은가!”
사토가 몸을 다시 일으키며 말했다.
쿠로사와 따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시선은 이준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준기! 제안을 받아다오. 너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잖아.”
쿠로사와가 사토를 향해 소리 질렀다.
“사토 이 새끼··· 닥쳐라! 이준기 님이 그런 걸 허락하실 리가 없다!”
사토는 굴하지 않고 이준기를 향해 다시 외쳤다.
“부탁이다! 쿠로사와를 죽여준다면 뭐든지 말해주겠다. 나는 예브게니의 소재를 안단 말이다!”
사토에게 덤벼드는 쿠로사와를, 이준기는 손짓으로 제지했다.
그리고 드라이한 시선으로 사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죽일 필요까지 있을까? 소인배일 뿐이다.”
“자기 살겠다고 동료를 고문하는데? 그것보다 더 악랄한 짓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악랄하기는 하군.”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이놈은 지금 너한테 잘 보이려고 날 죽이려고 했단 말이다.”
“좋다. 너의 원한은 수긍이 간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악감정을 풀 기회를 주겠다.”
“기회를 준다고?”
“사실은 네손으로 죽이고 싶은 것 아닌가? 결투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사토가 대답했다.
“좋아, 좋아! 그렇게 해주면, 당장 예브게니의 소재를 알려주겠다.”
“약속하지.”
“예브게니는 지금 이곳에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이곳에?”
“주소를 알려주마.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저택이야. 지금 우리가 아지트로 쓰는 곳이다. 그곳 지하에 갇혀 있어. 일한 연합군 전체에서 이 정보를 아는 사람은 하시바를 포함해서 5명도 되지 않는다. 저기, 한국 팀 팀장이라는 최현도 모르는 사실이란 말이다.”
“알았다. 할 말이 있다면 계속해라.”
“예브게니는 원래부터 살려둘 생각이었다. 워낙 수완이 뛰어난 늙은이다 보니, 연해주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말이야.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직후에는 자유롭게 풀어놓기도 했다.”
“그래?”
“그러다가, 마리아 보로닌의 역습으로 1차 원정대가 전멸한 다음에 다시 잡아들인 거야. 하시바 사령관이 화가 잔뜩 났지. 어디로 숨었는지 잡지를 못 하니까, 구라모토 협회장이 비밀 요원까지 풀어서 겨우 잡았단 말이다.”
쿠로사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실토하는 사토.
이준기는 건조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 시선에, 사토는 뭐든지 더 말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예브게니를 잡아 온 것은 바로 그 비밀 요원이다. 그 비밀 요원의 존재는···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그래?”
“그 사람의 정체는 나도 몰라. 저택 지하실에서 예브게니를 고문하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텐구 가면을 쓰고 있었지.”
텐구 가면이라니.
이준기는 한일 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한국인 중에도 텐구 가면을 썼던 자가 있었다.
“좋아. 더 할 얘기는 없지?”
이준기가 만족한다는 표정을 짓자, 쿠로사와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이준기 님! 사··· 사토 저놈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저 살자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사토가 쿠로사와를 향해 소리 질렀다.
“더러운 새끼! 저 살자고 동료를 고문하는 네놈이 할 말이냐!”
“사토! 네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이준기 님! 제가 직접 저놈을 취조하겠습니다! 허락만 해주십시오!”
“쿠··· 쿠로사와! 이 더러운 놈! 이준기! 할 말이 더 있다.”
이준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토가 말을 이었다.
“예브게니는 아직 마리아 보로닌의 행방에 관해 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거야. 적이기는 해도, 예브게니는 저 쿠로사와 놈과는 달라!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료를 팔지 않고 있단 말이다.”
“사토 이 새꺄! 그건 그 영감탱이가 정말로 몰라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쿠로사와 네놈처럼 더러운 놈이라면, 묻지 않은 정보까지 전부 다 불어버렸을 거다. 예브게니는 너와는 달라.”
“마피아 따위가 동료를 위해 고문을 참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토 네놈이야말로 멍청이다!”
“뭐가 어째? 세상 모든 사람이 너처럼 배신에 소질이 있는 줄 아냐?”
“닥쳐라! 너는 지금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불었으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냐? 그리고,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비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거냐? 그게 더 수상하다!”
“난 예브게니 포획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그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게 당연하지 않나?”
“네놈이 구라모토 회장의 비밀 요원을 만난 적이 있다고?”
“흥! 쿠로사와 네놈 같은 피래미는 상상도 못 할 일이겠지.”
“뭐가 어째? 죽고 싶냐?”
“당장 죽여주마!”
둘은 무릎을 땅에 댄 채 일어서서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말싸움을 방치해서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들은 것 같다.
이준기는 둘을 향해 말했다.
“때가 된 것 같군. 너희들이 원하는 결투다.”